[ 제36화 _ 꼭 그렇게... 다 가져가야만 속이 후련했냐?! ]
“부탁? 부탁이라니...? 네가 지금 나한테 부탁할 군번이냐?
어둑어둑한 골목을 지나,
지난 번 야마다를 처음 만나 한바탕 소동을 벌였던 자신의 집 앞까지 와 전화를 받은 아영.
공조 수사를 하기로 해 연락을 자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지만, 정작 야마다와 직접 만났던 것은
단 한번 뿐이었다.
뼈저린 경험에서 오는 방어본능에서 였을 지,
이 녀석에게 역시 완전한 믿음을 주기는 어려웠다.
아직까지 아영에게는 에릭슨을 통해 크리스를 찾고 있다는 야마다 역시, '수상한 일본 녀석'에 지나지 않았기에.
지금이야 사정상 어쩔 수 없이 같은 편에 서서 함께 하고 있지만, 애초부터 야마다를 이용해 정보를 얻을 생각뿐,
피해자들끼리 서로 만나 위로를 주고받고 싶은 생각 따윈 추어도 없었다.
그래봤자 해결될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
“아...알아, 부탁할 입장은 아니라는 거...
그건 아는데... 혹시 내일... 잠깐 만날 수 있어?”
“내일? 왜? 난 항상 바쁜 여자야! 무슨 일인데?
뭐 결정적인 증거라도 혹시 알아냈어??”
“아니, 뭐 할 얘기도 좀 있기도 하고...”
두말 할 여지없이 매몰차게 거절하려던 아영은 처음 야마다를 만나던 날,
지금 자신이 서 있는 장소에서 힘없이 뒤돌아가던 맥 빠진 뒷모습이 떠올랐다.
측은함을 넘어서 불쌍해 보이기까지 했던 모습.
거기에 이런 처량한 목소리까지 얹어져버리니 동정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하이고...이 놈의 약해 빠진 여자 같으니...’
"무슨 얘기가 더 필요한데? 쓸데없는 얘기면 얄 짤 없이 바로 신고해 버릴 테니까, 알아서 해! 그래, 내일 그럼 잠깐 보던가!"
"고...고마워!!"
‘내가 두 번 당할 소냐!!?’
라며 떵떵거리긴 했는데, 또 다른 외국인에게 말려들고 있는 건 아닐까.
원래 아영은 크리스 때부터도 겉으로는 센 척,
강한 척 해도 결정적인 상황에서는 거절도 못하는 약한 여성이었는지도 모른다.
'만나서 이상한 거 또 요구하기만 해봐라!!
당장 철창신세 지게 할 거야!!'
혹여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주위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끔 아영은 일부러 일터 근처의 번화가로 약속 장소를 정했다.
*
하루의 모든 일을 마치고 난 후,
집으로 돌아갈 전차를 타야할 시간이지만,
아영은 가련해 보이는 영혼의 부탁에 집으로 향하는 전차를 몇 대나 그냥 흘려보내고 있었다.
야마다는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약속시간이 조금 늦게 나타났다.
“어쭈? 늦어? 지가 만나자 해놓고 늦는 배짱은 뭐냐?”
“미...미안해!! 이...일이 좀 늦게 끝나는 바람에...!! 많이 기다렸어?”
“됐고! 그렇게 다정하게 얘기 안 해도 되니까,
얼른 본론부터 얘기 해! 왜 보자고 했어?!”
강하게 나오는 아영 앞에 우물쭈물하며 말을 못하던 야마다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 아영씨...별 건 아니고... 바.. 밥... 같이 먹을래?”
‘뭐야, 이 자식...! 정보를 핑계 삼아 날 가지고
논 거였어? 젠장!! 내가 속아도 두 번은 안 속는다 했더니!! 결국 집적대려고 했던 거야!?'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야마다를 노려보던 아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야마다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 퍽!! ]
“아아악!!”
“뭐? 밥을 같이 먹자고? 이 자식, 하도 불쌍해서 봐주고 같이 수사할 기회도 줄려했더니,
결국엔 남자 본성을 드러내려는 거냐?! 아니지, 내가 병신이다, 내가...!! 야!! 꺼져라!! 다시 눈에 띄기만 해봐라!!”
거칠게 야마다의 어깨를 밀치며 역 쪽으로 걸어가려는 아영.
야마다는 아직까지도 아물지 않은 듯한 정강이를 움켜쥐며 절룩이는 발걸음으로 아영의 뒤를 따라왔다.
“아...아영씨! 그게 아니라!!! 나...오...오늘 생일인데... 만날 사람이 없어서...!!
그래도 최근 계속 긴밀하게 연락 주고받는 사람이 아영씨 밖에 없어서 그랬어!! 다...다른 뜻 없어!! 정말이야!!”
성큼성큼 걸어가던 아영은 뒤로 어렴풋이 들린 처절한 생일타령에 뒤를 돌아보았다.
“나...나도 내가 얼마나 찌질해 보일지 알아...
근데, 에릭슨한테 속아서 모든 걸 다 잃은 나로선... 어떻게든 관련되는 걸 바로잡고 싶은 욕심 밖에 없었다고!!”
모든 걸 다 잃어? 대체 무슨 사연이었던 건지.
자기 생일이라는 날에, 친하지도 않은 아영을 여기까지 불러 낸 불쌍한 인생이라니.
아영은 한숨을 내 쉬었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 길래...
“휴우... 그래, 그 자식들 찾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 네놈 얘기 한번 들어나 보자. 혹시 또 알아?
예상도 못한데서 힌트가 튀어나올지...
네놈이 나 불렀으니까 밥 네가 사라!! 알겠냐!”
“다...당연하지!! 고..고마워!!!”
아영과 야마다는 근처에 바로 보이는 작은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필사적으로 돈을 벌기 시작하며 이런 외식다운 외식을 한 지도 꽤나 오래되었던 아영.
이런 곳이라면 종업원에게 주문을 하기보다 주문을 받는 데에 훨씬 익숙해져 있었다.
“핫, 참 이런데도 진짜 오래간만이네...
야, 그렇게 하고 싶다던 얘기나 해봐라 그럼...!
새삼스럽게 생일 축하 하네 어쩌네 하는 노래를 듣고 싶어 하는 건 아니겠지? 생일이라고 축하해 줄 만큼 가까운 사이 아니니까 꿈 깨고...
아까부터 넌 뭘 다 잃었다는 거야?”
야마다는 그제서야 조금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번에도 말해서 알고 있겠지만 에릭슨은...
나 워킹 홀리데이 갔을 때 친해졌던 친구였어.
서로 외국인이긴 하지만 우린 참 잘 맞았거든.
믿음직한 친구였어, 만나면 만날수록...!"
“워킹 홀리데이를 갈 정도면 너 집에 돈 좀 있었다는 거 아냐? 아니면, 벌어놓은 돈 좀 있었냐?"
“우리 집은 큐슈 쪽에 있는 시골 중에 시골이라 난 일찍부터 도쿄에서 따로 나와 혼자 돈 벌면서 살아 왔었어.
당연히 고향 벗어나니 친구는 사귀기 힘들잖아...! 어린 나이에 다달이 생활비 버느라 바쁘기도 했었고...”
이것저것 얘기하고 싶어 이제까지 어떻게 참았을까 ...
애처로운 마음이 들면서 아영은 본격적으로 꺼내기 시작한 야마다의 인생사부터 들어주어야만 했다.
“호주 쪽으로 워킹을 다녀오면 영어공부도 되고 돈도 좀 벌 수 있다 들어서 나갔었어.
나가서도 꽤나 열심히 살았고... 그러다 거기서 에릭슨을 만났던 거야... !! 같은 외국인 처지라 그랬는지 참 말도 잘 통하고, 오랜만에 친구가 생긴 기분이었다고...!”
“흠... 그래...”
자신 역시도 워킹으로 시작했던 일본 생활에서 외로웠던 시기를 떠올리며 나름 공감이 갔는지, 아영은 자기도 모르게 맞장구를 쳐주며 들어주고 있었다.
“고향 떠나 일본 도심에서도 만나기 힘든 친구를 외국에서 만나니, 참 좋았어. 잘해주고 싶었고...!!”
“그래서...?”
“워킹 갔다 와서 나름 대기업이란데 들어갈 수는 있었어.
영어도 늘고 준비도 착실히 하기도 했고...!
그런데 적성이 안 맞았는지 오래 있을 수가 없더라고... 난 성격이 이래서 사회 생활이 좀 어렵기도 했고...!”
“그래, 너 같은 성격이면... 그래서, 지금처럼 프리타로 전전 중이다?”
“그...그래... 그래도 워킹홀리데이 다녀온 게 후회는 안됐어. 에릭슨이란 친구도 만들었으니까!!
연락도 자주 하면서 지냈거든!! 들리는 바에 따르면 결혼도 하고 아이까지 낳았다 더라고...
근데 일본에 들를 일이 있다고 해서 가이드도 해주면서 정성을 다해 모셨었는데...!"
아영은 길게도 어디까지 올라가야 끝이 날지 모를 야마다의 개인사 이야기 중에 영양가가 있을 만한 부분을 바로 골라냈다.
“잠깐, 그 에릭슨이란 사람,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다고?”
“응, 그렇게 들었어. 그렇게 일본 와서 한창 동료랑 사업 준비한다고 하면서 내 돈을 빌려갔던 거야!”
“그 동료가 크리스 라는 거지?”
“맞아. 그 사람 뒷조사를 하다 당신도 찾아냈던 거고...”
아영은 재빠르게 새로운 정보를 노트에 옮겨 적으며 야마다에게 물었다.
“그런데, 넌 뭘 다 잃었다는 거야? 돈? 친구?”
야마다는 순간 목이 타기 시작 했는 지, 애꿎게 다 마신 물 컵을 들이키며 서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성격이 좀 소극적이라 누구한테 막 접근하고 그럴 수 있는 스타일이 아니야...
그런데 어렵게 생긴 친구한테 배신당한 상황이라 제 정신이 아니었어... 돈도 돈이고 그나마 유지해오던 인간관계도 그렇고...다 잃은 느낌이었어...!”
점점 떨려오는 목소리에 끝은 결국 눈물로 이어졌다. 정말 애처롭기 그지없는 야마다의 모습.
아영과 마찬가지로 야마다 역시도 그저 ‘돈’만 잃은 것이 아니었다.
남자임에도 견뎌낼 강단이 없던 야마다에게는 모든 것이 무너질 만큼의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
아영은 눈앞의 냅킨을 뽑아들어 야마다에게 휙 던졌다.
“찔찔 짜지마!! 남자 주제에... 너 지금 하소연 하고 있는 상대도 피해자란 거 잊었냐??
돈 잃고 사랑 잃고... 보통 여자애들 같았으면 한강...아니 스미다 강에 몸 던졌어!!!
참 하고 싶은 말도 많네...
내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 하고 있다고 다 견뎌냈다 생각하는 모양인데, 자꾸 생각나게 하지 말고 눈물이나 닦아!! 칠칠치 못하게 시리...!!”
아영이 건낸 휴지로 눈물을 닦는 야마다.
다 잃었다는 이 후로, 몇 번째 맞이하는 생일인지는 모르지만, 눈앞에 이야기 할 누군가가 있다는 것 자체가 고마워 죽겠는 표정이었다.
“고...고마워...!! 얘기 들어줘서...”
쌀쌀맞은 말투의 위로였지만 감동이라도 받은 듯 애틋한 눈빛으로 아영을 쳐다보는 야마다.
“잊고 싶고, 이제 와선 더럽게 똥 밟았다 생각하는 게 맞을 지도 모르겠지만, 난 크리스 그 자식 찾아내서 어떤 쌍판떼기로 살아가나 한번 확인은 해야겠어!!
친구네 뭐니 해도 너도 이제 에릭슨인지 소니인지, ‘친구였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생각은 접어라! 이 병신아!! 털리고도 정신 못 차리냐!!?”
“아, 알았어...더 열심히 찾으러 다닐 께...!!”
거친 위로에 큰 울림이라도 있었던 건지 이내 눈물을 멈추고 야마다는 선생님에게 강의를 듣는 듯한 자세로 아영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누가 뭐래도 존경과 선망의 눈빛으로.
“우리는 그냥 목적이 같아 같은 배를 탄 것뿐이니까, 이상한 생각하면 걔들보다 네가 먼저 죽을 줄 알아!! 알겠냐!?”
눈물을 보이는 자신 앞에서도 전혀 흔들림 없이 선을 그어버리려는 아영의 섬뜩한 경고에 야마다는 잔뜩 쫄아 고개만 끄덕였다.
***
프랑스 아를.
새벽에 깨어 비몽사몽하던 해인.
무의식중에 아영과의 전화통화를 마쳤지만, 아직까지도 제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깨어보니 집이라 편하게 누워 한가롭게 통화를 할 수 있었지만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아...머리야....!! 근데... 내가 어떻게 여기 들어와 있는 거지...? 레스토랑에서...음... 누가 업어서 데려와서... 막 비틀대며 걸었던 기억도...나는데...”
해인은 갈증에 물을 마시러 무겁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주방 테이블 쪽으로 향했다.
테이블에는 연습장 귀퉁이를 찢어 적어놓은 듯한 쪽지가 남겨져 있었다.
[ 해인씨, 일어나면 이걸로 해장이나 해요. 작업실 출근은 좀 늦어도 된다고 했어요. 푹 쉬어요. 이건 여기서 구하기도 힘든 희귀 아이템이니까 많이 황송해 해도 됩니다. ]
쪽지와 함께 놓여진... 한국제 3분 인스턴트 해장국 제품.
한글에 말투에 장난기가 배어있는 것으로 보아 이 쪽지의 출처는 필시 앞집의 남자...!!
“뭐야... 세현씨가 나 업고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거야? 아...”
새벽 4시에 가까운 시각.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해인은 창가 쪽을 살며시 들여다보았다. 아직까지도 켜져 있는 세현의 방 불.
“음? 뭐야? 이 시간까지 안자고 뭐하고 있지? 불..켜놓고 자는 건 아니겠지...?”
해인은 세현에게 문자를 보냈다.
[ 자요? ]
방문하셔서 응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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