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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too Aug 25. 2017

우연히, 그곳에서...<47화>

[ 47화 _ 너의 뒤에서 ]


"제일 큰 걱정은요..."

작업실 상황에 이어 자신의 현재 고민을 토로하는 해인. 진지한 표정으로 시작한 고민 상담에 세현은 귀를 기울여 주었다.

"이기적이란 거 알지만... 혹시나 화가들끼리 싸워서 갈라지거나 그렇게 되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르겠어요.

불안해요... 누가 맞는 지 아직까지 잘 모르겠지만, 카와모토씬 그래도 나한텐 은인이나 다름없잖아요. 여기서 일도 할 수 있게 해준...”

"그래서... 어떤 입장에 서야 할지 감이 잘 안 온다?”

"그래요... 먼저 번에도 몇 번 이랬었는데요, 이런 분위기 속에선, 그림 그리는 시간에도 초조해서 손에 잘 안 잡히기도 하고요..."

심각한 표정으로 진심을 털어놓는 해인.
세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음... 그래요, 해인씨가 관여를 하건 안하건 간에 그런 분위기라면 그림에 집중이 안 되긴 하겠죠..."

장난스러운 모습에서 어느 새인가 진지한 상담자로 돌아와 있는 세현.

벌써 몇 차례나 막히는 일이 있을 때에 정답과도 같은 길을 제시해 준 적이 있는 세현이기에,
이번에도 해인은 무언가 기대를 갖고 바라보았다.

"더 배울 게 있고, 해인씨 입장에선 아직 나가기 싫은 거잖아요. 여기 만한 데도 없는 것 같고, 어딘가에서 다시 자리 잡는 데까지 시간 걸리면 감도 떨어질 것도 같고..."

"...정확하네... 그런 건 또 쪽집게야..."

세현은 두 손으로 살며시 해인의 손을 잡았다.

"그럼, 버팁시다...! 나도 솔직히 해인씨 그 수상한 남자들 소굴에서, 그래도 그림 배워보겠다며 좌불안석하고 있는 거 싫지만...!! 거기 들어간 요 몇 달 간만 봐도, 해인씨 막 크는 게 눈에 보이는 걸...!!”

“버...버텨야겠죠...?”

“버텨요!! 대신, 그 남정네들이 무슨 일을 꾸미건, 무슨 작당모의를 하건, 해인씨는 절대로!! 개입하지 말아요... 신경도 쓰지 말고!! 워낙에 걱정을 만드는 타입이라 힘들긴 하겠지만...마인드 컨트롤 잘해서 작업에만 전념할 수 있게... 그리고 초반이랑은 달라요, 해인씨는 이제...!”

“초반이랑? 뭐가 달라요?”

세현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볍게 슥 가르키며 무심한 듯 말했다.

“나요, 나...! 이렇게 지켜줄 사람이 코앞에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그림이 잘 안 그려지거나 그러 거라면 내가 어쩔 수 없어도...”

미묘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해인.
그러나 지금 자청해서 고민상담을 받으러 세현을 찾았듯, 어떤 부분에서든 의지가 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텨서... 뽑아 먹을 수 있는 건 다 뽑아먹고 나와요. 그리고, 저거! 보여요?”

세현은 이야기 도중 레스토랑의 안쪽 사무실 소파의 한 켠에 놓인 가방을 가르켰다.

“저게 뭔데요?”

“내 작업용 노트북하고 자료들이요...! 나 오늘부터 일 끝나면 여기서 글 쓸 거예요.”

“응? 그게 왜요? 보통 카페에서 글들 많이 쓰잖아요...!”

“아, 나 이 여자...! 진짜 눈치 없긴... 그러니까 해인씨 시간 구애받지 말고 작업실에서 작업하라고요. 갈 때 같이 가자는 거니까...!!
어차피 나도 집에 가도 글만 쓰니까...!! 그리 큰 변화는 아니에요.

맘껏 그릴 수 있는 작업실 있겠다, 악의 무리들 로부터 맨날 지켜줄 수 있는 남자 있겠다.
뭐가 걱정이야?!”

“쳇... 그런...”

다시 복잡한 표정으로 혼자 쓸데없는 생각에 잠기려는 순간, 세현은 해인을 일으켜 세워 양 어깨를 잡고 얘기했다.

“또, 또...! 쓸데없는 생각 말고, 얼른 다시 돌아가서 일해요!! 빨리 일 끝내야 그림도 그리지...! 지금도 어디 거짓말 치고 나온 거 맞죠? 자, 얼른 복귀!! 나 멀리 안 나갑니다!!”

덕분에 다른 생각 할 겨를 없이 세현에게 등이 떠밀려 다시 작업실로 돌아오게 된 해인.

레스토랑에서는 10분 정도 밖에 있지 않았건만 작업실에는 조금 전까진 보이지 않던 카와모토와 안톤까지 와 있었다.

“아, 해인씨...! 밖에서 일 보고 온 거예요? 어젠... 좀 놀랐죠, 미안해요...!!”

다른 화가들이 이 날 처음 해인에게 했던 것처럼 일단 사과부터 하고 보는 카와모토.

모두 모인 화가들의 분위기는 생각보다 그렇게 어색하지 않았지만 이것 역시도 모두 카와모토의 연출일지 모른다는 의심...

그렇지만 해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아니예요, 뭐 같이 계시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 있을 수 있는 거죠 뭐...”

“자꾸 안 좋은 모습 보여 면목 없네요... 앞으론 정말로 주의 할게요. 우리가 원래 그런 사이들이 아닌데 말이죠...!”

이미 다른 화가들로부터 진실을 전해 들었건만 해인을 안심시키려는 건지, 아무 일도 아니라는 투로 안심시키려 하는 카와모토.

그렇지만 이전의 몇 번의 사건들에서 보여주었던 사건들과 화가들의 뒷말들을 조합해보면,

그의 지금 말과 행동이 100% 진실은 아닐 수도 있을 거란 의심이 생기기에 충분했다.

[ 이것들이 무슨 작당모의를 하건 해인 씨는 절대로 개입하지 말아요 ]

해인은 문득 세현이 조금 전에 해주었던 충고가 떠올랐다.

“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다른 이야기가 더 이어질 법도 했지만, 일단 해인은 자신의 데스크로 가 사무 일을 보며 가능하면 화가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으려 했다.

표정연기가 서툰 해인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선택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어떠한 의심을 품고 있건 간에 자신은 카와모토가 베푼 호의로 이곳에서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입장이었기에, 대놓고 감정을 드러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화가 5명과 해인까지 모두 모인 작업실.
은은히 흐르는 음악과 함께 화가들의 작업은 계속되었다.

다른 때와는 달리 한 번의 곁눈질도 없이 일에만 전념하고 있는 해인.

작업 중에 늘 틀어놓는 잔잔한 클래식 음악들은 늘 반복되는 트랙이었지만,

그 잔잔한 음악에 화가들의 붓터치나 다른 그림 도구들을 사용하는 소리가 중첩되어 늘 새롭게 느껴지곤 했다.

그렇게 몇 번이나 트랙이 반복되는 지도 모르게 흘러간 시간. 해인은 일을 마치고 그림 작업을 위해 자리를 세팅하였다.

세현의 소설 모티브 그림 때문에 잠시 중단 되었었지만, 해인은 최초로 그리기 시작했던 아비뇽 그림을 계속해서 작업 중이었다.

이제 거의 마무리만을 남겨놓은 상태.

해인은 새삼 그림을 앞에 두고 이 그림을 그리고자 마음먹었던 초기를 떠올렸다.

처음 세현의 말을 듣고 무턱대고 흘러가게 되었던 아비뇽. 어리바리하게 이곳저곳의 낯선 풍광들을 신기해 할 때, 어떤 낯선 여행객들이 말을 걸었던 그 때.

온통 경계 투성이던 그때는 환경도 사람도 너무 낯설었었다. 해인은 배경의 모습도 모습이지만 그 ‘낯섬’의 감정을 그림에 담아보고자 했던 것.

화룡점정, 그림에 마지막 붓 터치를 하는 순간, 해인은 바로 다음 그림으로 삼고 싶은 소재가 떠올랐다.  

낯선 풍경, 처음 선보인 완성작이었던 이 작품과 반대로 이제는 익숙해진 풍경에 가까워진 사람을 그려보자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해인의 머릿속에 바로 떠오른 장면은 세현이 자신을 데려갔던 아를 원형경기장에서 보이는 아를의 전경이었다.

창틀 모양을 한 원형경기장의 벽면 구멍을 통해 드러나 있는 아를의 모습.

그리고 그 앞에는 이제 시작을 하자 약속했던 자신과 세현이 있었다.

아직까지 생생히 떠오르는 장면.
해인은 떠오르는 형태를 연습장에 스케치해 두었다.

“오, 이거 아비뇽 그림 이제 완성 된 거예요??”

분주하게 다음 그림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을 즈음, 화가들이 다가와 해인의 완성된 아비뇽 그림에 관심을 보였다.

“아, 예... 후우...진짜 오래 걸렸네요...처음 시작했던 작업인데... 하하..”

말을 건 한 화가를 필두로 너도나도 다가와 해인의 완성작을 보러 몰려든 화가들.

“오, 축하해요!! 완성까지 간 거...!! 대단한데요...!!”

“와, 표현 과감하다...! 이거 초보자들은 망칠까봐 과감하게 잘 시도 못하는 기법인데, 역시 해인씨는 기본기가 되어 있다니까...!!”

“그래요!! 공들인 시간만큼 완성도가 있네요!! 이번에 갤러리 출품할 때 한번 같이 내봐요!!”

하나같이 칭찬일색이던 작가들은 자신이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다는 식의 첨언과 조언으로
돌아가며 한마디씩 해인의 그림을 평가해 주었다.

해인은 열심히 받아 적었다.
만면에 미소를 감추지 못한 채.

그림을 그리고 평가를 받고,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론을 하는...

해인에게는 바로 지금의 순간이 천국과도 같은 행복이었다. 역시 조금의 불안감 때문에 포기하기엔 너무도 아까운 환경.

본인 작업에 열중이던 카와모토도 다가와 해인의 그림으로 보며 거들기 시작했다.

“해인씨, 수고했어요, 그럼... 한번 화가의 그림 설명을 한번 들어볼까요?”

“에? 설명...이요?”

“그럼요!! 작품을 어떤 목적으로 그렸다거나, 보는 사람이 어떤 걸 느껴줬으면 했다던가 하는 작가의 의도를 설명할 수 있어야죠!! 첫 작품이니 뭐든 한번 말해 봐요.”

화가들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해인의 발표를 경청하였다.

“음... 좀 오래 걸렸네요. 이 그림은... 제가 아비뇽 여행을 갔을 때 느꼈던, 어떤... 이질감, 그리고 신기한 이색 풍경들을 접할 때의 당황했던 감정이 계기가 됐었던 것 같아요.

거기서 저한테 말을 걸던,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 사람들에게도 같은 감정을 느꼈어요. 그런...‘낯섬’을 이 그림에 표현하고 싶었어요...!”

화가들은 발표를 듣고는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4명의 화가들 모두에게로 번져가 점점 크게 들려오는 박수소리.

해인은 울컥함에 눈물을 쏟을 뻔 했다.
연신 고개를 숙이며 화가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해인.

“일도 잘하고 짬 내서 그림도 열심히 그리더니, 성과가 있네요...! 이거 정말 갤러리에 같이 출품해요...!! 다음 그림은 뭐 생각해 본 거 있어요?
어떤 거 할 건지...?”

해인은 주저 없이 이야기했다.

“예...! 그리면서 생각한 건데, 역시 감정을 따라가게 되는 것 같네요. 이 그림이 ‘낯선, 어색함’을 표현해 본거니, 이번에는 ‘익숙함, 친근함’ 같은 걸 그려볼까 해요...!”

화가들은 초심자인 줄만 알았던 해인의 주제를 잡아내는 능력에 모두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와... 보통 처음에 그림을 그린다는 사람들은 있는 사물을 보고 그린다거나, 습작 같은 걸로 시작하는데, 해인씨는 체험을 통한 에피소드로 감정을 이미지화 시키네요... 이건, 뭐 타고났다고 해야 하나...!?”

“아, 아니에요... 그냥 그런 게 먼저 막 떠올라서...”

화가들은 너도나도 칭찬하며 해인을 격려해주었다. 조금 전까지 불안하던 분위기도 예술의 힘 덕에 완화된 탓인지 전혀 어색하지 않게 느껴졌다.

“저, 다음 그림 위해서 자료를 좀 준비해야 할 게 있는데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와, 바로 떠오르는 게 또 있나 봐요? 완전 그림쟁이네 그림쟁이!! 그래요, 다녀와요...!!”

세현이 데려갔었던 원형경기장의 전망대 부근.

전 날의 에피소드는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있었지만, 정확한 이미지 구현을 위해 해인은 그 곳을 다시 확인하고자 했다.

작업실에서 나와 세현이 일하는 레스토랑을 지나, 집까지도 지나쳐야만 모습을 드러내는 원형 경기장.

작업실에서 거리는 꽤 멀었다.

혼자 잠깐 다녀오면 되는 일이었기에 세현에게 방해되지 않게 조심스레 다녀오려던 해인.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며 레스토랑까지 다다라, 말찌감치에서 여전히 친절하게 손님 접대를 하고 있는 세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비록 임시로 하는 아르바이트 이긴 하지만, 저렇게만 하면 정말 누구에게라도 사랑받을 듯한 태도로 임하고 있는 세현.

세현은 테이블에서 칭얼대는 어린아이가 있는, 한 단란한 가족처럼 보이는 손님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역시나 특유의 친절함과 상냥한 말투로 주문을 받으며.

주문을 받아들고 주방으로 이동하는 사이, 무언가를 생각하는가 싶더니 뒷주머니에서 메모장을 꺼내 열심히 적기 시작했다.

‘응? 저 남자 뭘 저렇게 적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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