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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too Aug 29. 2017

우연히, 그곳에서...<48화>

[ 48화 _ 하루의 끝은 늘 너와 함께 ]

           

레스토랑에서 주문을 받고, 손님들 몰래 뒷 주머니에서 꺼낸 메모장에 분주하게 무언가 기록하는 세현.

주방으로 향하면서도 힐끔힐끔 그 테이블의 손님들을 뒤돌아보며 계속해서 기록을 멈추지 않았다.

'뭘 저렇게 쓰고 있는 거야?'

레스토랑을 스쳐가며 보이는 세현의 수상쩍은 행동이 궁금하긴 했지만, 해인은 일단 급한 마음에 가던 길을 서둘렀다.


아비뇽 그림의 완성 이후, 차기작 소재로 정한 그림 자료를 위해 해인은 아를의 전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던 원형경기장 전망대로 향하는 중이었다. 

세현이 알려주었던 장소이자, 함께 특별한 기억을 만들었던 바로 그 곳. 

이번에도 몰래 작업해 완성된 이미지로 놀래켜 주고 싶은 마음이었는지, 세현에게는 일부러 먼저 말하지 않을 셈이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해 해인은 발걸음을 서둘렀다. 이동하는 중에도 머릿속에는 온통 그림의 구도와 연출 방법의 상상뿐. 

이 날은 아를 시내 전체적으로 관광객이나 주민들이 그렇게 많이 보이지 않더니, 원형 경기장 내부에도 몇몇의 관광객들만이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다.  


불과 하루 전, 세현과 같이 나란히 걸어 들어왔던 이 길. 내부로 향하는 거대한 벽돌 길 틈새로 보이는 어둑어둑한 하늘의 영향이었을지, 

유난히 웅장해 보이는 원형경기장 내부와 혼자인 자신의 모습이 대비되어 무언가 두려운 감정까지 느껴졌다.

해인이 그림에 담으려 하던 바로 그 풍경이 내려다 보이는 장소. 

꼭대기의 전망대 부근에 도착한 해인은 마침 세현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바로 그 자리에서 사랑을 속삭이고 있는 다른 연인을 볼 수 있었다.

전 날의 강렬한 기억이 해인을 이곳으로 이끈 것도 있지만, 자신이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어 했던, 바로 그 장면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셈이었다. 

어쩌면 어제의 자신과 세현 역시도 다른 누군가의 눈에는 이런 모습으로 비추어 졌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해인은 조금 떨어져 몰래 이 상황을 사진으로 담았다. 


옅은 미소로 쑥스러움을 감추고 용기를 내는 남자와 수줍은 미소를 보이며 쭈뼛 대는 모습의 여자. 

서로를 향해 사랑스러운 표정을 나누고 있는 이들의 표정 하나하나까지도 놓칠 수 없었다.

대화 내용까지는 들리지 않았으나 충분히 따뜻해 보이는 두 사람의 온기마저도 전해질 법한 장면.
이런 상황에서 인종이나 나이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해인은 예상치 못했던 인물들을 관찰하며 세세한 부분까지도 사진에 담았다.

그들이 그곳에서 자리를 뜨고 난 후, 해인은 벽의 재질을 손으로 만져보고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으며, 준비해온 연습장에 새로 짠 그림의 구도 스케치 역시도 잊지 않았다.

예상치도 못한 수확으로 꽤나 많은 정보를 획득한 해인. 


“진짜 열심이다, 해인씨, 다음 그림 뭐할 건 지 물어봐도 돼요? 신기해서...”

각종 자료조사 및 스케치로 꽤나 오랜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해인에게 화가들이 물었다.

“아, 예... 그냥 배경 장소만 보고 왔어요. 이번엔 이 동네 아를을 배경으로 해 볼 생각이거든요. 아직 세부 연출은 구상 중이고요.”

작업실 내의 화가들은 이미 서로의 스타일을 잘 알고 있기에, 아직 파악이 되지 않은, 새로 들어온 화가 동료의 스타일에 많은 관심을 가지는 듯 했다.

해인으로서도 항상 조언과 충고가 함께 따라오는 그런 관심이 싫을 리 없었다.

꼼꼼하고 세심한 연출을 생각하는 해인. 
그녀는 사무일과도 비슷하게 계획성 있게 그림을 그려가는 스타일이었다.

즐거움과 설렘으로 정신없이 진행 되어가는 작업. 
돌아가는 막차를 놓치거나 할 걱정은 없지만, 시간은 이미 밤 12시를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엇!! 벌써 시간이...'

시간을 잊은 건지, 초월한 건지... 
화가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들의 작업을 진행 중이었고, 이런 분위기 안에 있으니 해인 역시도 시간관념이 느슨해 질 수밖에 없었다.

충분한 성과를 낸듯한 하루에 뿌듯해하며 작업실을 나오는 순간, 카페에서 글을 쓰며 기다리겠다던 세현이 문득 떠올랐다.

‘음? 카페는 지금 시간이면...문을 닫지 않나...’

드문드문 들어선 가로등만이 길을 밝혀줄 뿐, 
보이는 대부분이 어둠에 묻힌 풍경. 

멀찌감치 보이는 세현이 일하는 레스토랑에도 불은 꺼져있는듯 했다.

드문드문 남아있는 빛들을 따라 이동하는 해인의 시선. 그 중 가장 가까운 빛의 정체는 카페 야외 테라스의 한 테이블 자리였다. 

하얀색 옅은 빛을 누군가의 얼굴에 쏟아내고 있는 테이블, 가까이 가 보니 노트북을 켜고 글을 집필 중이던 세현이었다. 

테이블 주변은 고요함 속에서 자그마하게 타자 소리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해인은 조심스럽게 세현이 앉은 테이블로 다가가 옆자리에 앉았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던 건지, 어둠 속에서 조용히 다가온 해인의 기척을 알아채지 못한 세현.

“흐음...”

눈앞의 노트북을 뚫어질 듯 응시하며 빠르게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려대고 있었다. 

세현은 그 자세 그대로 몇 분을 넘기고서야 겨우 노트북으로 부터 눈을 떼고 기지개를 펴며 혼잣말을 해댔다.

"후아...! 근데 이 여자, 오늘 필 받았나보네...
이 시간 까지!!"

세현은 눕듯이 의자에 기대어 해인의 작업실 방향을 쳐다보았다.

"네, 그 여자 필 좀 받았어요, 그럼 안 되나?"

"음, 뭐 안 될 거야... 없? 아아아악!!"

무심결에 옆에서 대답하는 해인에게 맞장구를 치던 세현은 순간, 너무 놀라 뒤로 나자빠질 뻔 했다.

"뭐... 뭐예요...!! 왔으면 왔다고 얘기를 하지...!! 타지에서 불명예 객사 할 뻔 했잖아요!!"

"푸훗...!! 누가 온 줄도 모르고 있으래요? 벌써 온 지 오 분도 넘었구만...!!"

"고양이도 아니고, 기척도 없이 말야... 후우... 놀래라...오늘 작업은 잘 했어요? 뭐, 이 시간까지 있다 온 거 보면 순조로운 것 같지만...”

“오늘 그림 하나 완성했어요!! 처음에 그리고 있던 아비뇽 그림이요...!! 그리고 다음 그림 구상까지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네요, 아주...!!”

“오...!! 멋있어...!! 해인씨 아주 거침이 없네, 완전 타고난 그림쟁이네...!! 아비뇽 그림?? 나도 보여줘요!!”

“음...나중에...요.”

“흥, 그래요, 뭐... 나중에 놀래켜 주는 게 해인씨 스타일이지... 저번처럼...!!”

세현은 테이블에서 주섬주섬 짐을 챙겨 가방에 넣으며 돌아 갈 채비를 했다.

“응? 할 거 더 있는 거 아니에요? 내가 방해하고 있는 건... 여기서 글쓰면 불편하지 않아요?”

“풋, 기다리던 사람 왔는데, 여기서 누굴 더 기다리라는 거예요...? 여기나 집이나 하는 건 똑같은 걸, 뭐...!! 그리고 여기 아주 집중도 잘되고 좋은데? 왜들 카페 나와 글 쓰려는지 알겠네...!
갑시다...!! 밥은 먹었어요?”

다부지게 가방에 짐을 챙겨 집으로 걷기 시작한 두 사람. 세현은 자연스레 해인의 손을 잡았다.

무심코 잡은 세현의 손으로 눈을 돌리다가 해인은 세현의 바지 주머니에 무심하게 꽂혀있는 작은 메모장을 발견하였다.

"아...!!"

"응? 왜요??"

"세현씨, 그... 보니까 아무 때나 메모장 같은 거 꺼내서 뭐 막 적던데, 그거 뭐 적는 거예요?"

"아, 이거요? 볼래요?"

낮에 잠깐 스치면서 열심히 기록해대던 메모장.
해인은 메모장을 넘겨받았다.

빼곡히 적힌 인물의 설정, 외모와 행동 등의 묘사...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많은 내용이 삐뚤빼뚤 적혀져 있었다. 

"이건..."

"이야기 소재로 쓸 인물들 보이거나 떠오를 때마다 적어 둬요. 왜 신기하게 사는 사람들 많잖아요...!
확실히 한국 일본 살 때보단 적을 게 많더라고...!  아, 그러고 보니까, 해인씨 얘기도 여기 적혀 있는데...!!"

"나를요? 내가 뭐가 신기하다고... 어디요, 뭐라고 썼나 보여 줘봐요!!"

세현은 장난스레 메모장을 다시 휙 가로채 오며 해인에게 말했다.

"어허!! 그건 안되지!! 내 얘기에 쓸 인물이니까 여기 적힌 순간부터 그건 더 이상 해인씨가 아닌 거예요!! 그냥 내 글 소재인 거지...! 나중에 글에서 확인하시죠!! 제일 먼저 확인할 수 있는 영광은 드릴께...!!”


12시가 넘은 아를의 밤거리를 나란히 걷고 있는 두 사람.

소소하게 수다를 떨던 세현은 정면을 주시한 채 해인에게 말했다.


“이거, 정말 괜찮은 거 같죠?”

“에? 뭐가요?”

“하루 종일 각자 일 하다가, 기다리는 사람이 바로 옆에 있어, 늦게 잠깐이라도 볼 수 있는 거...!"

“흐음...그런 가...”

“아닌 척 하기는...얼굴에 다 써있어요!! 해인씬 보면 얼굴에 자주 써놓더라고...! 근데 안 그럴 거 같으면서 은근 부끄럼 많이 타, 보면...!”

“흥!! 뭐가요!!”

자연스럽게 찾아온 세현과 해인의 귀가 길 20여분. 

세현에게 은근 수다쟁이가 되어가는 해인과 다 맞장구쳐주며 장난치는 세현에게는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지만, 세현의 언급대로 매일이 약속되어있다는 사실에 다른 아쉬움 따위를 가질 필요는 없었다.

“자, 해인씨, 이제부터 주말에는 무조건 시간을 비워 놓기예요!!”

“주말에? 왜요?”

“우리는 지금 말이에요, 남들 오고 싶어도 못 오는 프로방스에서 지금 무려 ‘생활’을 하고 있는 ‘연인’이예요. 그런데 그거 못 살리면 되겠어요? 매주 주말은 이제부터 교외 데이트!! 거기에 매일 매일 귀가길 30분은 보너스!!”

“생활이라...”

손을 꼭 맞잡고 있긴 하지만 연인이라는 표현은 아직 어색한 해인. 

늘 걱정만을 안고 살던 해인은, 지금 이 감정을 받아도 되는 건지, 표현해도 되는 건지에 대한 불안감이 여전히 근심의 형태로 머물러 있어, 즐거워야 할 이 시간을 방해했다.

과거, 늘 바빴던 생활 속에서 남자들이 다가올 때면 자기가 만들어 놓은 근심이 늘 ‘연애’에 방해요소로 작용해 왔었다. 

한 번도 자기 자신을 누군가에게 모두 보여준 적이 없는 해인. 아니, 보여줄 자신이 없어서 일부러 부정해 왔었다.

그런데 지금 해인 옆의 이 남자.
해인이 가진 근심을 이미 다 이해한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 기술로 해인을 은근슬쩍 적응시켜 가고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집 앞까지 도착한 두 사람.

“자, 당신의 반쪽은 이만 여기서..."

“헉...! 반쪽이래...!! 참 그런 말 자기 입으로 잘도 해...!!”

“해인씨 얼굴에 그러고 써있는데요. 뭐...!"

“잘못 읽었어요, 나는 그런...!!"

"그럼 뭐라고 하는 표정이예요? 그건...?"

"에? 몰라요!! 내가 어떻게 알아...!"

세현은 가볍게 해인의 어깨를 끌어당겨 와락 끌어안았다. 세현의 품에 폭 들어온 작은 체구의 해인. 해인도 조심스럽게 세현의 옷자락을 잡았다.

“어떻게 그런 것도 모르냐? 지금 자기가 어떤 표정 짓고 있는 지 알 때까지, 나만 따라옵시다!! 나는 다 읽을 수 있으니까...”

“쳇...!”

세현은 꽉 끌어안은 작은 해인의 머리 위로 자신의 턱을 가져다 대고 장난치듯이 말했다.

“피로도 잊고 그림 그리느냐 힘들었겠네... 우리 해인씨...! 자, 얼른 들어가 쉬자!!”

“세현 씨도...!”

작업실 트러블 때문에 쌓인 스트레스, 새 작품 구상을 위한 먼 길 왕복 등, 피로가 충분히 쌓였을 만한 하루.

해인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세현의 말처럼 갑자기 인지하지 못하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 바로 침대로 쓰러졌다. 



건물로 들어가는 해인의 뒷모습을 끝까지 확인하고 문이 닫힐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던 세현은 자신의 방에 올라와 다시 노트북을 켰다.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계속 연구하고 공부하며 이어져왔던 장편 소설 작업.

창작의 세계를 동경하며 어렵게 시작한 작가 지망생. 그 후 그의 집필은 해인과의 공동 작업 결심으로 더욱 더 의욕적으로 변했다.

이 날 하루에도 몇 번이고 꺼내적었을 메모 노트를 보며 정리에 정리를 거듭하고 있는 세현의 작업은 새벽이 넘어서까지 계속 이어졌다.



*



"해인씨 빨리 갑시다!! 계속 꾸물꾸물 댈거예요?" 

주말.
세현은 차를 대동해 액상 프로방스 때처럼 집으로 들어서는 골목 모퉁이에 위치한 빵집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http://m.novel.naver.com/challenge/list.nhn?novelId=628943&page=1#volum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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