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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too Oct 13. 2017

우연히, 그곳에서...<61화>

[ 제61화 _ 두 가지만 약속해줘...! ]


“해인아!!”

“응? 왜?”

“그... 아영이가 찾고 있단 사람... 일단 내가 알아볼게. 남의 돈 뜯어먹고 튈 정도로 질 나쁜 놈들이라면, 호락호락할 리가 없어.”  

그렇지 않아도, 갤러리 수수료나 다른 화가들과의 잦은 문제가 있다던 작업실 이야기에, 카와모토의 뒷조사를 하고 있던 세현.

수 개월 전, 해인과의 술자리 뒤에 보여주었던 카와모토의 작태만으로도 뒷조사가 필요한 이유는 충분했다.

여전히 술 핑계를 댔고 있지만, 해인에게 범하려던 짓거리를 떠올리면 세현은 아직까지도 분노가 치밀 정도.

그럼에도 이제까지는 오로지 해인의 성장만을 위해 참아왔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해인 뿐 아니라 바다 건너 아영과도 해프닝 가능성이 있다면... 만약 그게 사실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들 투성. 
그렇지만 엄연히 현재 해인이 작업하는 작업실의 수장이니만큼, 아직 입증되지 않는 정황만으로 해인이 함부로 나서는 것은 위험할 것이 뻔했다.

“에이... 아영이가 나한테 부탁한 건데 나 몰라라 하고 있으면 쓰나...! 나도 알아 봐야지... 임씨도 바쁘면서 뭘 혼자 다 하겠다고...”

평소 남에게 부탁이라곤 일절 한 적이 없던 아영의 간청에, 늘 마음 한 켠으로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던 해인은 벌써부터 어떤 의무감을 가지고 눈동자를 빛내고 있는 듯 했다.

“카와모토...씨가 언제부터 여기서 그림 그렸다고 했었더라... 혹시...”

방향을 잡아, 나름 추리를 시작해 들어가 혼잣말로 뭐라 웅얼대고 있는 해인.

세현이 해인을 지켜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빠진 지금 순간에도, 해인은 신나서 문제풀이를 하는 학생마냥 앞뒤를 맞추어 보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과 가까운 곳에 아영이 찾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며 아영에게 직접 얘기했던 만큼, 이런저런 조건에 부합하는 카와모토에의 의심은 어쩔 수 없는 듯 했다.

'더 깊이 파고들어가기 시작하면 위험하다...'

어떤 일이든 시작하면 확실히 빠져들고야 마는 해인의 성격을 모르지 않기에, 세현은 걱정이 앞섰다. 

비교적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다지만, 크고 작은 트러블은 종종 발생한다던 작업실 분위기.

그 가운데 만약 해인이 자신을 용의자로 지목해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카와모토가 눈치채게 된다면, 해인의 그림 작업은 이제까지와 같지 않게 될 것이 뻔했다. 


세현은 뭔가 굳은 얼굴을 한 채 입을 열었다.

“해인아.”

“아, 진짜! 옆에 있는데 참 자꾸 불러쌌네!! 나 지금 복잡하니까 잠깐 기다려 봐봐!!”

“아냐, 지금 얘기해야 돼! 너 더 복잡해지기 전에...”

“얘기? 뭘?”

“적극적으로 친구 도와주겠다는 자세는 좋은데, 너무 단편적인 정보만 듣고 몰아가지 말고... 아직 정확한 건 없으니 차근차근 하자. 응?”

“흠...”

세현의 차분한 말투에 조금은 설득이 되기 시작했는지 해인은 잠자코 세현이 하려는 말에 집중했다.

“나도 너 그림그리는 그 작업실... 솔직히 맘에 안 들긴 해. 해인이 네 그림만 아니라면... 작업실에서 당장 나오라고 얘기하고 싶기는 하지만...!! 초반부터, 많이 도움을 받았던 건 분명하잖아? 덕분에 실력도 쑥쑥 늘었고...”

“그렇지... 여기 들어오지 못했으면 이 기간 안에 이렇게 그림을 그리지도 못했겠지..."

“그래... 그러니까 일단 상황 비슷하다고 무작정 그 사람들 몰고 가지는 말고... 그렇게 단정짓고 있으면 거기서 작업은 어떻게 같이 해...!?"

“그런가...응?? 아....!!”


화가들과의 작업...! 그러고 보니 공모전 수상 소식과 아영의 이야기에 너무 심취했었을까.

해인은 작업실에서 정식 소속 화가가 되기로 해, 이제는 일하는 직원이 아닌, 다른 화가들과 동등하게 임대료며, 비용까지도 함께 부담하기로 한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카와모토의 독촉에 어렵게 결정하기는 했었지만,
세현에게는 알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제부터 입장이 완전하게 달라진 상황에서 앞으로 작업실의 분위기는 또 어떻게 바뀌게 될지, 본인 역시도 짐작하고 있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응? 뭐야? 왜 그래?"

“으...응?”

“왜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하고...? 뭔데, 말해봐!”

“에이... 말 안하려고 했는데..."

누구를 속이는 것에 표정마저 서툴렀던 해인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상황을 세현에게 설명했다.

“뭐?! 일하던 직원에서 이젠 정식 화가들 하고 똑같이 그림을 그리게 됐다고? 그럼... 다른 화가들처럼 거기서 임대료 내면서 같이 이용하는 식이 되어 버렸다는 거야? 그걸 받아들였고?”

“후우... 응... 공모전도 공모전이고 아영이 얘기 때문에 잠깐 까맣게 잊고 있었네... 일단, 그림 팔리는 것만으로 임대료를 감당할 수는 없으니까, 당장은 다른 데서 일하면서 병행하려고...“

“그런 걸 왜 이제 얘기 하냐!!”

아영의 부탁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세현은 여러 가지로 얽혀 가는 생각들 때문에 약간은 격앙된 목소리로 해인을 책망했다. 

“또 쓸데없는 걱정할까봐 그랬지...”

“멍청아, 대책을 좀 마련해 놓고 일을 저질러야지! 다른 데서 일하고 남는 시간에 그림을 그리겠다고? 그 다른 델 이제부터 알아보겠다는 거야?”

“일 해야 하는 건 어쩔 수 없지, 뭐... 최근에 운 좋게 하나 그림 팔리긴 한 모양이지만, 갤러리 그림 수입만으로 그걸 다 충당할 수는 없잖아. 나 같은 초보가... 뭐 이제부터라도 작업실에 정식으로 돈 내고 학원 다니는 셈 치는 거지, 뭐...”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는 해인을 바라보며 세현은 심각해진 표정으로 잠시 대책을 생각하다가, 뭔가 결심이라도 한 듯, 낮은 목소리로 해인에게 말했다.

“해인이 너, 확실하게 얘기 해줘. 이거 네 의지로 결정한 거 맞는 거지? 누가 강요하거나... 그런 거 아니지?”

“응? 내가... 결정한 것 맞아. 처음부터 이렇게 하려고 왔던 걸...너무 신경 쓰지 마. 처음이 너무 운이 좋았던 거야, 원래 하려던 대로 돌아왔을 뿐이니까...”

“그럼...이제부터 내 얘기 잘 들어. 나랑... 약속 두 가지만 하자.”

“응? 느닷없이 무슨 약속을? 그것도 두개나...!?"

거짓말을 들키기라도 한 어린아이처럼 겁 먹은 얼굴을 하고 해인은 세현을 바라보았다.

“먼저 첫 번째는... 당분간만, 자존심 버리고 이기적인 여자 되어 줘. 약속... 아니, 이건 약속이라기보다 부탁이야.”

“자존심을 버리라니? 무슨 소리야?”

“벌써 반년이 넘었지만, 그 작업실이 좋았던 건 일하면서도 그림에 관련된 환경이라 절차나 이런 과정까지도 배울 수 있었단 거잖아?"

 "응? 그거야 그렇지...! 너무 좋은 기회지..."

"여기에 와서 처음부터 일 병행하면서 그림 그리려고 했다지만, 운이 좋건 어쨌건, 갑자기 상황이 달라져 버리면 적응은 힘들어. 너 분명히 지칠 거야...!"

세현이 하는 이야기를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한 해인은 세현에게 재차 되물었다.

"그러니까 무슨...?"

“자존심 잠깐만 내려놓고, 당분간만이라도 내가... 너 도와줄 수 있게 해줘.”

“에? 임씨가? 무슨 말도... 안 되는...”

“넌... 내 여자 친구이면서, 내가 선택한 일러스트레이터야. 만약의 상황이라면 좋은 환경을 조성해 줄 의무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해...!! 

자신 있게 일과 작업을 병행 할 수 있다고 하긴 하지만... 힘들어 질 가능성이 너무 커. 다시 한 번 말할게, 이건 부탁이야. 다른 일 시작할 생각 말고 그림만 그려줘. 당장에 돈이 모자라면, 내가 부담할께.”

세현의 조심스럽지만 단호한 제안.

누구보다도 해인의 성장을 바라는 입장에서 쓸데없는 다른 변화를 맞이해 시간과 체력을 빼앗기게 하고 싶지 않은 세현의 바람이었다.

“안돼...! 이런 걸로 임씨한테 부담 주기 싫어.”

“부담주기 싫으면 내 말 듣자. 일하고 와서 여기서 다시 작업하고... 피곤에 쩔어서 기진맥진하는 모습 보여 줄 거야? 그리고, 그런 패턴이면 우리 데이트는 언제 하니?!”

“데이...트는...”

“그래! 정 마음 불편하겠으면 빌린다고 생각해. 내가 나중에 어떤 형식으로든 돌려받을 테니까. 그럼 됐지? 상승세 타고 있는데... 해인인 지금부터, 저 작업실 화가들하고 같이 그림만 그리는 거야, 그림만! 알겠지?”

생각에 잠긴 해인. 가뜩이나 막막하던 차에 세현의 제안은 분명 솔깃했지만, 덥석 받아들긴 쉽지 않았다.

세현은 고민하며 안절부절 하고 있는 해인에게 다가가 덥석 손을 잡으며 속삭였다.  

“내가 아직까지도 그렇게나 인정하기 싫었지만, 베스트셀러 작가 임형우 아들이야, 사랑하는 여자 친구 힘들어 하는 거, 그냥 두고 볼 만큼 여유 없는 사람 아니라고...!! 

우리 사귄 이 후로... 내가 아직 뭔가 큰 거 해준 적 없잖아. 여자 친구한테 주는 첫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받아줘...!”

터질 듯 복잡한 해인의 머리. 거절도 승낙도, 그 어느 쪽을 선택할 지라도 탐탁치않은 기분이 들 것만 같았다.

“선물은...이런 게 무슨 선물이야!! 이런 건... 더 부담만 되는 거야... 내가 마음이 불편해 지는 걸...!"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하던 해인은 무심결에 진심을 이야기 해버리고 말았다.

자기 꿈이나 생활면에선 지나치게 완고한 태도를 보이는 해인. 세현으로선 무작정 도와주고 싶어 건넨 제안이었건만, 해인이 이렇게 까지 고민을 할 줄은 몰랐다. 

"음 좋아...! 일단 처음은 이번에 팔린 그림 대금으로 첫 임대료 낼 생각인거지? 그럼 이렇게 하자. 지금 작업 중인 다른 그림. 완성되면 그건 내가 살께. 이건 자존심이고 뭐고 하는 문제 아니다 ? 난 원래부터 해인이 그림이 좋아 공모전까지도 같이 하자고 했을 정도로 팬인 셈이니까...!"

"그림을...?? 그런...!!"

순식간에 다른 제안으로 해인을 현혹시키는 세현.
다행히 대답에 텀이 있는 걸 보니 어느 정돈 들어 먹히고 있는 모양이었다.

"예약이라고요! 이해인씨 그림...! 예약자가 그림 받으려고 목 빠지게 기다리는데 다른 일 병행한다고 설렁설렁 할 거예요? 그림에 집중해야지요...!"

"음...일단은 생각해 볼께...!"

"에헤...! 아니, 그림 구매자가 이렇게 적극적인데, 화가가 왜 이렇게 고민이 많아? 고민하지 말고, 이렇게 되면, 그림만 그려야 하는 이유는 명백해 지는 것 아냐? 그러면 된 거지...!! 자, 그럼 다음 약속...얘기하겠어.”

“에엥?”

꼼짝없이 세현의 말발에 넘어가 버린 듯한 해인은 첫 번째 제안을 받아들인 채, 고스란히 다음 약속에까지 말려든 상황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아영이 부탁에 관련된 거... 나한테 전부 일임해줘. 나도 아영이랑 오래도록 알아온 만큼 도와주고 싶고, 아까도 말했지만, 혹시나 모를 위험이 있을 수도 있는 일이야. 괜히 이것저것 알아본다고 신경 쓰다가 해인이 한테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알아보기만 하는 건데...뭘...”

“내가 이해인씨 성격 모릅니까!? 알아보기만 하겠어? 막 찾아다닌다고 이리저리 빨빨대며 돌아다니겠지...!! 

아영이 도와주지 말라는 게 아니라... 그거 내가 하겠다고요...! 내가 필사적으로 알아볼테니까,
해인이 넌 아무 걱정 마...!! 아무 의심도 하지 말고..."

두 가지 제안 모두 어리둥절 하는 사이, 순식간에 말려들어버리고 만듯한 해인. 

그렇지만 두 가지 모두 해인에게 있어선 해가 될 것이 없는 조건들뿐이었다.

바로 앞에서 눈을 반짝이며 긍정을 기다리고 있는 세현의 앞에서 뭐라 반박할 거리도 떠오르지 않던 해인은 시선을 떨군 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환해진 얼굴로 해인의 머리를 심하게 쓰다듬으며 장난스럽게 소리치는 세현.

“옳지... 착하다!! 나 진짜 해인이 그림 기다리고 있으니까, 온 정성을 다해 그려줘야 돼! 첫 번째 그림은 하도 뭐라 그러는 통에 못 샀지만 이번 만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상황을 정리한 세현.

해인의 앞에서는 평정심을 유지하느라 애를 썼지만 아영의 이야기를 전해 듣던 순간부터, 

세현은 이제까지 혼자 가지고 있는 의혹이 명확해지는 사실 한 가지가 있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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