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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too Dec 05. 2017

우연히, 그곳에서...<76화>

[ 제76화 _당장이라도 안아주고 싶었어 ]

                

"그것하고는 좀 거리가 있는 일... 아닌가요?"

카와모토는 싸늘한 눈으로 해인을 쳐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물론 남자친구분 힘든 상황이란 거 알지만, 바로 뭘 하자는 게 아니라 일단 블로그를 만들어 놓자는 거예요. 사건이야 잘 수습될테고... 다시 주목받기 시작하면 일러스트에도 관심이 쏠릴 거라고요. 그럼 찾아오..."

"무슨 말씀이신지는...알겠는데, 남자친구가 지금 이렇게 힘든 상황이고 아직 해결이 된 것도 아닌데 저만 좋자고 뒤에서 이렇게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서요."

해인은 점점 장황해지는 카와모토의 설명을 단호하게 끊으며 말했다.

조금 흥분한 듯 카와모토는 답답한 듯 다시 해인에게 설명을 시작하려 했다.

"해인씨, 그게 그러니까요..."

"아, 자 됐어, 됐어... 알았어요, 해인씨 그럼 인터넷에 올리는 거 잠시 보류하기로 해요. 본인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거죠."

옆에서 보다 못한 안톤이 카와모토를 가로막으며 상황을 중재했다.

어느 때보다 냉랭한 분위기의 작업실.
늘 작업실 내 분위기를 신경써오던 해인조차도 먼저 나서서 분위기를 바꾸려 하지 않았다.

"아하핫...! 이거 서로 좋자고 기획했던 일인데 너무 분위기가 썰렁해 졌네..! 그렇지? 카와모토? 자, 얼른 작업들 시작합시다...!! 갤러리 출품은 했으니까 여유있게들 새 작업 들어가야지?"

분위기를 수습해보려 의미없는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던 안톤, 해인을 등지고 서 카와모토에게 속삭이듯 조그마한 목소리로 눈치를 주었다.

"... 그래요 해인씨... 제가 너무 보챘죠... 미안해요, 그 일은 그럼 나중에 진행하는 걸로 합시다..."

아무 말도 없이 냉랭한 표정을 하고 있던 해인을 의식하며 끝내 사과멘트를 건넨 카와모토.

"죄송해요...이제까지 신세 진 것도 많고 여러분들 하시는 일에 바로 도움이 되어드렸어야 하는데,
요즘 너무 지쳐서요..."

어두운 표정으로 마지못해 사과를 받아들인 해인.

서늘한 분위기 속, 별다른 말도 붙이지 못한 채 지켜보던 다른 화가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자신의 자리로 복귀해 작업을 시작했다.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작업실에 흐르고 있는 잔잔한 클래식 음악.

카와모토와 해인 역시도 각자 자리로 돌아 가 이어폰을 끼고 억지로 자신의 그림 작업을 시작했다.

중재하려던 안톤만이 두 사람 사이의 냉랭한 기운 안에서 눈치를 볼 뿐이었다.




*




같은 날 오전.
출판사에 같이 갔을 때, 갤러리 전시를 시작한다던 해인의 말을 기억하고 누구보다도 먼저 해인의 그림을 구매하려 갤러리로 향한 세현.

이 전에 카와모토를 조사하기 위해 들렀던 같은 갤러리 였다. 오픈 시간에 맞추어 바로 갤러리로 진입했기에 당연히 손님으로서 들어와 있는 것은 세현 한 사람 뿐.

'그 작업실은 이 갤러리에서만 전시를 하기로 되어 있나? 다른 데도 많은데 꼭 여기서만 하더라...'

전시 준비를 막 끝마친 갤러리 오너는 지난 번에도 찾아와 그림 구경을 하던 세현의 얼굴을 기억하는 지, 반갑게 아는 척을 해 주었다.

"아, 지난 번에도 방문하셨던 분이시네요...! 진짜 그림 좋아하시나 봐요...! 마침 새로 전시 시작한 그림들이 있는데 천천히 둘러 보시죠...!"

지난 번, 해인의 작업실 화가들 그림이라며 소개받았던 바로 그 벽면 자리. 

그림들은 모두 바뀌어 있었지만 지난 번 익혀두었던 카와모토의 사인을 발견해, 여전히 같은 자리에 고스란히 작업실 화가들의 새 그림들로 다시 채워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어제... 들어온 작품들이에요. 아 그러고 보니 지난 번에도 이 작업실 화가 그림 사려고 하셨었죠?"

세현은 그간 숱하게 들어오던 이야기들을 조합해, 해인의 작품을 바로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림만을 집중해서 그리게 된 이 후라 그런 지 보다 완성도 높고 밀도가 올라 가 있는 작품.

세현은 한참동안 자연스레 지어지는 미소와 함께 해인의 그림을 감상하였다.

"이 그림 제가 사겠습니다."

"아, 이 화가분 그림을 지난 번에도 사고 싶어 하셨었죠? 지난 번에는 못사셨었는데, 이번에는 기회가 좋네요. 알겠습니다. 아, 그럼...!"

"예? 뭔가요?"

갤러리 오너는 주문서 양식을 꼼꼼히 살피는 척을 하더니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가 해인의 그림 크기의 4/1정도 되는 캔버스를 들고 나왔다.

"뭡니까? 그건? 제가 산다는 그림은 이 그림인데..."

"아, 그러시죠. 근데 말입니다. 선택하신 그림의 화가 분이 특별히 요청해주신 부분입니다."

"??"

"자기 그림을 누가 사갈지는 당연히 모르셨을 텐데, 그림 사 가시는 분께 이 그림도 같이 전달해달라고 하시던데요. 일종의 덤인 셈이죠...!"

"덤이요...?"

갤러리 오너가 가져온 그 작은 캔버스는 종이로 싸매어 있었기에 겉만 봐서는 어떤 그림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럼 이것도 이 화가님이 그리신 건가요?"

"예, 아마 그렇겠죠! 저도 어떤 그림인지 확인 못했습니다. 그럼... 잠깐 사무실에서 매매계약서 작성하시면서 커피 한잔 하시죠."

 "예...!"

갤러리 오너는 해인의 그림과 덤이라며 딸려온 작은 그림을 포장해 박스에 담아주며 고객 관리라도 할 모양으로 끊임없이 수다를 떨어댔다.

"이 동네에 동양 분들 얼마 안계시던데 여기서 사시는 분인가 봐요? 바로 그림을 가져갈 수 있다고 하시는 거 보니...!"

"아, 예 잠시 동안 요 근처에서 머무르고 있어요."

"음...동양분이신데...혹시 어느 나라 분이세요? ...하핫, 동양 분들 솔직히 잘 구별이 안가요, 어느 나라 분들이신지..."

"저는 한국인이예요. 아..." 

문득 세현은 지난 번 방문 당시 이 갤러리 오너가 작업실의 카와모토를 잘 알고 있는 듯한 인상을 풍겼던 것을 기억해 냈다.

"음... 저, 혹시 카와모토에 대해 잘 아시나요?"

갤러리 오너는 잠시 세현의 눈치를 보더니 억지 웃음을 지어보이며 대답했다.

"하하...아, 예...! 물론이죠...! 말씀 드렸다시피 사시려는 그림 역시 카와모토 화가님 계신 작업실 소속 화가가 그린 그림입니다. 저희랑 같이 일한 지 꽤 됐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매매 계약서를 작성하던 세현은 뭔가 캥기는 것이 있어 보이는 오너에게 말했다. 

"예, 다른 건 아니고, 제가 그 카와모토라는 화가 작업실 그림에 흥미가 좀 있어서요..."

카와모토의 이야기가 나오고부터 왜인지 달라진 오너의 눈빛. 

“아, 그러시구나... 평소에 그림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그 작업실 하고 저희는 전속 계약을 맺어 전시 판매하고 있으니 주기적으로 계속 전시 할 겁니다. 자주 뵐 수 있겠는데요...!”

세현은 뭔가 수상한 낌새를 차렸지만 단지 그림에 관심이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 긴장감을 완화시키는 데 성공한 듯 했다.

이곳에서 만난 카와모토, 그리고 [크리스]. 
아영에게 들은 명확하지 않았던 이 두 존재에 대한 상관관계를 확신으로 바꿀 수 있는 좋은 기회.

“그런데 말이죠. 카와모토 화가는 왜 자기 작가 명을 [크리스]라고 하는 거죠? 항상 궁금했는데...”

세현은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오너를 떠보았다. 

천연덕스런 세현의 연기에 넘어간 오너는 어느새 의심을 모두 풀고 새로이 고객을 맞이하는 기분으로 세현의 질문에 응대하기 시작했다.

“아, 작가명까지 알고 계시다니 역시 팬은 팬이신 가 봅니다. 저도 좀 의아해서 초반에 물어본 적이 있는데요, 카와모토 화가는 일본인인데, [하프]거든요. 혼혈이란 거죠. 어머니가 서양분이라는 것 같던데 어머니 이름에서 따온 작가명이라고 하더군요.”

역시...! [카와모토]가 [크리스] 일지 모른다는 추측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

자신의 좋지 않은 상황 속, 세현은 그나마 풀리기 시작한 다른 수수께끼에 쾌제를 불렀다.

세현은 그림을 운반해 주겠다는 갤러리 측의 요구에도 직접 굳이 그림을 들쳐메고 집으로 돌아왔다. 

새로이 알아내게 된 아영의 정보와 함께 사온 그림을 어디에다 배치를 할지 한껏 기대에 부푼 채로.

그림이 마음에 드는 것도 있었지만, 덤이라고 주었던 작은 그림에는 어떤 그림이 있을지 궁금해 세현은 헐레벌떡 뛰어 이동했다.

“포장이 요란도 하네...”

혹여나 상할 새랴 몇 겹씩 겹쳐 싸둔 듯한 종이 포장을 벗겨내자 슬슬 모습을 드러낸 그림의 정체.

그림의 아래쪽에는 해인의 사인과 함께 그림의 타이틀이 적혀 있었다.

어디에선가 본적이 있는, 배경과 인물...
고흐의 명작 [ 밤의 카페 테라스 ]의 실물이 된 그 카페에서 해인에게 핀잔을 들어가며 모델을 서 주었던 몇 달 전 상황. 

그림 속 인물은 당시 해인의 주문대로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옆에 둔 채 테이블 위의 노트에 골똘히 무언가를 적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타이틀은 [ 작가의 아침 ].

모델서기 힘들다며 빨리 밥먹으러가지고 툴툴대던 자신에게 10분만 외쳐가며 기어이 스케치를 완성해 갔었던 해인. 

그저 스케치 연습 정도로만 생각했던 그 그림이 색칠까지 완료되어 있는 그림이었다.

물감이 발라져 완성된 캔버스는 뭔가 묵직한 기분이 들 정도로 정성이 듬뿍 담긴 그림이었다.

[ 작가의 아침 ] 이라니. 
무언가 뿌듯한 기분까지 드는 타이틀과 내용에 감동이 밀려오는 세현. 

입가는 벌써부터 귀에 걸려있었다. 그림 산다고 했더니 이런 깜짝 서비스까지 준비해 줄 줄이야...

당장에 달려가서 안아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참고 또 참았다.


[ 이해인 화백님, 지금 화백님 그림 구매하고 왔습니다. 좋은 그림 감사합니다. ]

감동을 억눌러가며 장난기 어린 메시지를 보낸 세현. 

평소와는 달리 금방 답장이 오지 않았지만 작업 중이려니 크게 신경 쓰지 않으며 방에서 그림을 전시해 둘 장소를 이곳저곳 살폈다.

한참 후 세현이 레스토랑에서 일을 시작한 무렵에서야 해인에게서 도착한 답장.

[ 응, 벌써 샀구나...! 고마워! ]

역시 자신도 일을 하느라 바로 확인하지 못했던 답장에서 뭔가 쓸쓸한 기운이 느껴졌던 세현.

[ 응, 그림 너무 좋아...! 근데 혹시...무슨... ]

“에이, 아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괜히 신경쓰이는 것을 물어봐 작업을 방해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일단 안부 정도만으로 마무리했다.

“세현아, 출근 좀 늦는다더니, 벌써 어디 갔다 온 거야? 어제 출판사는 잘 다녀왔고?”

레스토랑에 늦이막이 출근한 주인 아저씨가 일을 막 시작하려는 세현에게 말을 걸었다.

“예, 아저씨...! 어제 출판사...다녀왔어요. 말씀해 주신대로 직접 얘기해 보니까 좀 방법이 생긴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 어떻게 하기로 했니?"

"기자회견 열어서 직접 입장표명 하기로 했어요. 아마 요 주 안에 할 것 같다더라고요. 그걸로 해결까지 되지는 않겠지만..."

"그래, 잘됐네...! 아무 대책없이 시간만 보냈다간 의혹만 뻥튀기 돼...! 뭐래도 나서서 밝혀야지...
그나저나 괜찮니?"

"예? 뭐가요?"

"뭐긴, 이 녀석아! 너 네 아버지 벗어나려고 이렇게 살고 있는건데 정면으로 밝히게 된 상황이잖아!!"

세현은 입술을 굳게 다물어 어금니를 한번 꽉 깨물어 보이고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게요...! 지금 제 정신이 아니어야 맞는데... 너무 억울해 버리니까 오히려 반항심이 생기네요!"

아저씨는 뭔가 옛생각이 나기라도 한듯,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자그마한 목소리로 세현에게 말했다.

"허, 그래? 네가 나보다 낫구나...!! 그렇게 바로 태세 전환도 할 줄 알고...!!"

"에이, 무슨 말씀이세요... 그냥 억울한 걸 바로 잡는다는건데..."

묘하게 서글픈 표정으로 다시 업무에 복귀한 아저씨. 아마도 생전 세현의 아버지와의 추억이 떠올려지는 듯 했다.

저녁이 되어 업무를 마친 세현은 여전히 같은 테라스 자리에서 집필에 몰두했다.

복잡한 일들은 잠시 잊고 온전히 창작에만 매진할 수 있는 이 작은 마을.

의도치 않게 자신 때문에 세상이 떠들썩한 지금, 이 시간, 장소 만큼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않고 오롯이 자신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 있을 수 있었기에 새삼 더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지금 세현의 이 시간에 마침표를 찍어줄 수 있는 건 오직 한 사람 뿐이었다.

[ 콩콩콩 ]

얼마나 집중한 상태로 글을 쓰고 있었을까, 세현 앞에는 언제 와있는 지 모를 해인이 나타나 다소곳이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었다.

"응? 왔어?? 오늘은 엄청 일찍 나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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