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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too Dec 08. 2017

우연히, 그곳에서...<77화>

[ 제77화 _ 네가 편히 잠드는 순간까지. ]


“응? 오늘은 엄청 일찍 나왔네? 무슨 일 있어?”

불꺼진 어두운 테라스에서 혼자 조용히 글을 쓰고 있던 세현에게 다가와 가볍게 테이블을 노크한 해인.

여전히 어두운 밤이긴 했지만 늘 세현과 만나 귀가하던 시간보다는 많이 이른 시각이었다.

“일은 무슨... 그냥 좀 피곤해서...”

작업실에서 카와모토와의 설전 후, 축 쳐진 기분으로 그림 작업에라도 열중해 보려다 그것마저 실패한 해인.

갤러리 전시 그림을 막 끝낸 시점이라, 몸도 마음도 조금 느슨해져 있는 탓이기도 했다. 급기야는 볼 일을 핑계로 작업실을 일찍 나와 버리고 만 해인. 

자신이 공모전 수상 작품의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었다고, 이때다 싶어  홍보 모델을 삼으려 한 사실은 다시 생각해 보아도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은 처사였다.

게다가 본인이 싫다고 얘기하는데도 밀어붙이려 하다니, 뭔가 괘씸한 생각까지 떠올라 화실 밖의 누군가에게라도 한풀이가 필요했다.

그렇지만 눈앞에 있는 것은 수상자 본인인 세현.

세현을 위한 선택이었던 만큼, 지금 눈앞의 그에게만은 모든 상황을 얘기하며 응석을 부릴 수는 없었다.

가뜩이나 이래저래 머리 터지는 일로 산더미일 텐데...

“음...? 항상 열정적인 이 화백님이 오늘은 기운이 쭉 빠진 모습? 수상한데...”

“흥, 그러는 임씨는 왜 이렇게 밝아? 무슨 좋은 일 있어?”

“아, 아니...!! 달리 좋은 일이 있을 게 뭐 있습니까...!! 그냥 뭐... 이제 정면으로 나서기로 결정했으니 고민해봤자 해결 안되니 그냥 잊고 지내자는 거지, 뭐...!! 그렇게 보였다면 성공이네...!”

“참, 속도 좋아 임씨는...!!”

늘 장난기 어린 대화로 이곳에서 집까지 이어지는 즐거운 데이트가 진행되었건만, 이날따라 해인은 유독 어두워 보였다.

무슨 일인지 알고 싶었지만 본인이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데에는 어떤 이유라도 있을 거란 판단에 세현은 말을 아꼈다.

“내가...너무 일찍 와서 임씨 글 쓰는데 방해됐겠다... 먼저 들어갈 테니 좀 더 집중해서 쓰고 와...”

해인은 힘 빠지게 한마디 내뱉고 돌아섰다.

어쭈? 어쭈?

자리에서 잽싸게 일어난 세현.

돌아선 해인의 옆구리로 파고 들어 뒤에서 와락 끌어안고는, 자그마한 머리 위로 자신의 턱을 올려놓으며 짓궂게 장난을 쳤다.

“이 아가씨, 오늘 뭔 일이 있긴 있었나 본데...!! 
가긴 어딜 가냐!! 이리 와!”

“아야야...!! 아파...!! 쓰던 글 마저 써야 할 것 아냐?”

“됐어, 가만히 앉아 있으면 뭐 글이 막 써지니? 
좋은 것들 보고 영감도 얻고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내야 그걸 글로 남기지...! 조만간 해인이가 봐줘야 되는 글이야. 서두르지 마...!”

해인은 살포시 자신의 허리를 휘감고 있는 세현의 손을 잡았다. 콕 붙은 모습 그대로 잠시 동안의 애정 충만한 정적을 즐기던 두 사람.

“아, 낮에 얘기했지? 해인이 그림 가져 온거? 고마워, 해인아... 나 진짜 힘이 솟는다...! 
그려준 그림 덕분에...”

“아... 그러고 보니 그림 가져 갔댔지... 아... 창피해... 막상 내놓고 보니까...”

“창피하긴...! 너무 좋은데...! 게다가 가지고 있으면 점점 가치가 오를 이해인 화백 초기작들인데...! 해인이 그림엔 뭐랄까 오묘한 감성이 있어!
이제 얼마 안가서 여러 곳에서 알아 줄거야! 그림...그리느라 수고 많았어...!"

해인은 다리에 힘을 풀고 뒤편에 선 세현에게 몸을 기대며 살짝 돌아다보았다. 가볍게 입을 맞추며 더 강하게 끌어안아주는 세현.

“여기가 아를이라서, 같이 있는 게 해인이라서 다행이야...”

“...뭐야, 새삼스럽게...”

그제서야 얼굴에 가볍게 미소를 머금는 해인.
잠깐이지만 고민이 눈 녹듯 사라지는 듯한 편안한 감정이 전달 되었다.

서로를 의지한채 기대어 서 머리를 맞대어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뺨을 부비댔다.

한동안 가로등의 희미한 빛만이 둘의 실루엣을 슬쩍슬쩍 드러내주는 어둠 속에서 다시 한번 서로를 확인한 두 사람.

문득 꿈에서 깨어나기라도 한듯, 세현은 뭔가 떠올라, 살며시 해인의 손을 잡고 테이블로 돌아와 해인을 옆 자리에 앉혔다. 

“음, 해인아, 지금부터... 조금은 충격적일 수도 있는 얘기가 있어.”

“응??”

이 날 자신이 알게 되었던 사실들, 해인에게 직접 말해야 할지 고민하던 세현은 결국 이야기를 꺼내기로 마음 먹었다.

“여기... 그림 그리러 온 해인이가 나 만나서 다른 걱정 없이 그림만 그릴 수 있길 바랬고... 잠깐의 공백도 없이 쭉 즐겁기만 바랬어. 우연히 들어가게 된 지금의 작업실 같은 환경이 달라지는 걸 두려워 했었고...!"

“무슨 얘기 길래 이렇게 서론이 길어...? 나한테 무슨 죄졌니?"

해인의 똘망 똘망하게 오직 자신만을 향하고 있는 눈망울을 보며 잠시 머뭇거리던 세현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해인이의 친구이자, 내 멘토... 천아영이 찾고 있다는 사람...”

“응??”

“영혼의 짝꿍이라 서로 터치하지 않으면서, 서로 응원하며 쿨하게 만났다던 전 남자친구 말야... 결국엔... 사기꾼으로 돌변해 몇 년 동안이나 찾아 다녔다고 했었던...”

“뭐야...그 사람... 그새 차...찾은 거야?? 임씨가?”

세현은 다시 해인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야?! 누구!!”

“카와모토 케이타... 지금 해인이 작업실에 있는...”

“!!”

해인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자신이 방금 나왔던, 지금은 어둠에 쌓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작업실 방향을 돌아보았다.

“저...정말이야? 카와모토씨...가...”

하필이면 카와모토와 설전을 벌이고 나온 날에 알게 된 카와모토의 정체. 

순간, 해인은 자신에게 배려를 베풀고, 친절하게 그림을 가르쳐주곤 했던 평소의 모습보다 이기적인 모습으로 자신을 이용하려 하는 지금의 카와모토의 모습이 먼저 떠올려졌다.

자연스레 그 이미지는 이야기가 나올 때 마다 이글이글 타오르던 아영의 분노의 대상과 겹쳐졌다.

“갤러리에서 해인이 그림 구매하다가 몇 가지 알아봤는데, 아영이가 얘기해 줬던 거랑 많은 게 맞아 떨어져. 그러니까...카와모토는 처음부터 자기 작가 명 [크리스]로 아영이 한테 접근했던 거야. 의도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아, 그래...[크리스]...!! 그걸 신경 못쓰고 있었다... 맞아...! 카와모토씨... 화가명이 크리스 였어...!”

계속해서 같이 있었으면서 그걸 파악하지 못했던 자신이 원망스럽기나 한 듯, 머리를 쥐어잡고 원통해 하는 해인. 

그런 해인의 손을 살며시 잡아주며 세현이 말했다.

“아영이한테 그런 심한 짓을 한 자식과 같이 있는 거라면 해인이 너도 안전하지 않아. 처음부터 의심이 가는 녀석이기도 했는데 이제 명확해 진거지."

아직까지도 해인은 알고 있지 못하는, 
카와모토가 과거에 해인에게도 벌이려던 몹쓸 짓.

이런 상황에서 그것마저 알게 된다면 더한 충격에 휩싸일 거란 예상에 세현은 일단 해인의 의견을 들어보고자 했다.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어?’

최근 들어 실망스런 행보를 보여와, 의심 갔던 카와모토의 과거를 알게 된 해인 역시 그에게 점점 좋지 않은 이미지가 덧대어져 갔다.

“이제, 해인이를 위해라도 거기 계속 있으라고 할 수가 없어. 아영이한테 이 사실을 얘기하면 아영이가 어떻게 나올지도 모를 일이고... 
어떻게 생각해? 해인이는...?”

사정을 듣고 난 후, 더욱 혼란에 빠진 해인. 인상까지 찌푸리며 심각하게 고민을 했다.

"임씨 기자회견... 언제라고 했지?"

"기자회견? 음...아마 며칠 뒤 정도 일 것 같은데.."

"그럼 일단 그 날까지 생각 좀 해 볼께..."

"그래, 그렇게 해...!"

세현은 잠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해인아, 그리고...이건 꼭 부탁을 해야 할 것 같다."

"응? 뭔데?"

"아영이에 관한 거 네가 직접 얘기해 줄 수 있을까?
충격을 받을 수도 있는 얘기인데 옛 친구끼리 얘기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그럼, 그래야지...! 안그래도 내가 말하겠다고 말 할려고 했었는데..."


얘기가 길어져 늘 만나던 깊은 밤 시간이 되어서야 시작된 두 사람의 데이트, 

각자 털어놓을 수 없던 고민이 있었기 때문인지 평소보다 말수는 줄어든 산책길이었다.

같이 걷기 시작한 순간부터 집에 도착하는 순간 까지 세현의 손에 미세하게 전달되어 온 해인의 떨림.

세현은 손을 잡은 채 해인의 어깨를 강하게 자신 쪽으로 끌어 당겨 두팔 가득 해인을 안아주었다.

"해인아, 괜찮아... 우리, 잘하고 있어...! 떨긴...!"
 
더 가깝게 안은 해인은 자신도 모르게 온몸이 떨고 있는 듯 했다.

세현은 해인의 집에 같이 들어가 갑작스럽게 벌어진 여러 일들로 떨림이 그칠 줄 모르던 해인이 잠들 때까지 지켜보기로 했다.

따스하게 꼭 끌어안아, 때로는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마치 아이를 재우듯 편안한 저음으로 허밍을 읊조려 주는 세현.

의지하듯 세현의 손을 꼭 맞잡은 채 눈을 감고 떠오르는 좋지 않은 이미지와 씨름하던 해인의 떨림은 차차 잦아들었다.


새벽 무렵이 되어서야 해인은 완전히 떨림을 멈추고 새근새근 잠이 든 모양이었다.

누운 침대 위 이불 밖으로 나온 해인의 팔을 살짝 이불 속으로 넣어주고 잠이 든 해인의 얼굴을
바로 앞에서 빤히 쳐다보는 세현. 

세현은 잠이 들자 잠버릇인지 뭐라 칭얼대는 해인의 흘러내려온 머리칼을 살포시 다시 어루만져 주며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휴...복잡하겠지...좋은 일에 마가 낀다더니..."

혹여나 깰 세랴 발걸음도 조심해서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세현. 

여러가지 일들로 본인 역시 생각이 정리가 되어가지 않던 세현은 쓰던 글을 더 정리하다 많이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잠 들었다.


*


몇 시간이 지났을까.
쓸데없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무수한
이미지들이 단잠을 방해 한 탓인지, 

깊은 잠에는 빠질 수 없던 해인이 눈을 떴다.

"아...임씨는..."

밤새 옆에서 자신을 돌봐주던 세현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한 해인이 이리저리 세현을 찾았다.

여기 없으면 앞집에 갔겠지 하며 창가로 이동하는 중 마주한 식탁 테이블 위 쪽지.

[ 해인이 잘 잤어? 신경쓸 일 많아서 많이 힘들지? 일어나면 이거 뎁혀 먹고..! 몇 시간 뒤에 봅시다!]


"또...3분 시리즈냐...! 도대체 저 양반은 여기서는 구하기도 힘든 이런 걸 어디서 맨날 가져 오는거야...?"

몇 개월을 거슬러 올라 세현이 해인에게 처음으로 대접(?)했던 그 메뉴 그대로 식탁에 차려진,
 
데워먹는 인스턴트 밥, 국, 김치...
투덜 대면서도 해인은 얼굴 가득 미소가 번졌다.

일찍 눈이 떠 비교적 이른 아침이었지만, 생각해보니 허기졌던 해인은 바로 그것들을 먹기 시작했다.

"변함없는 맛이구나 역시 이건..."

식사를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하던 중, 해인은 다시 자신 앞에 닥쳐있던 여러 문제를 다시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 생활 초기,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할 정도의 친절을 베풀어 자신의 지금을 있게 해주었다고 생각하는 몇 개월 전의 카와모토.

계속 의심쩍은 모습을 보이다 급기야 돈벌이 목적으로 해인을 홍보모델로 사용하려는 지금의 카와모토.

그리고... 친구인 아영에게 사기를 치고 돈을 떼어 달아났다는 아영의 전 남자친구 [크리스] 본인이라는 카와모토.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이 잡다한 이미지의 남자를  앞으로 어떻게 쳐다봐야 할 지.


해인은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5시 반이 조금 지나는 시각, 
지금 일본은...밤 10시가 가까이 되었을 것.

아무리 강한 아영이라도 감상적으로 가장 센치해질 시간에 이 사실을 감당해 낼 수 있을까.

그렇지만 몇 년을 쫓아 왔다는 아영에게 더 늦어지면 안될 일, 해인은 아영에게 연락했다.

"여보세요? 오, 해인아! 이 시간에 웬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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