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1화 _ 너 아니면 안된다고...!! ]
"뭡니까? 무슨 얘기가 더 남은 거죠?"
의혹을 풀기 위해 이 방법이 최선이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막상 한참을 기자들에게 시달리며 대책 회의까지 마친 세현은 몹시 피곤했다.
이 와중에 출판사 여직원은 또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는 건지...
"임세현 작가님, 작가님 작품에 일러스트레이터를 하셨던 분 말인데, 혹시 뭐 작가님하고 계약 같은 게 되어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죠?"
"예? 갑자기 일러스트레이터는 왜...?"
"아... 저번에 보니까 두 분이 엄청 친하신 거 같아 얘기가 벌써 오갔을 줄 알았는데, 아직 못 들으셨나 보네요..."
일러스트레이터라니, 해인을 말하는 것 같긴 한데, 당췌 무슨 얘기를 하는 건 지 알 수 없었던 세현은 다소 언성을 높여 여직원에게 따져 물었다.
"무슨 말입니까?! 해인이랑 무슨 얘기를 했다는 거예요? 저 아무것도 모르니까 얘기를 해 주세요!!"
그제서야 여직원은 조금 전 통화에서 해인이 대답을 망설였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어쩌면 그 망설임의 이유가 눈앞의 세현일 수도 있을 거라 예상했다.
그렇지만 여기까지 세현에게 말해버린 이상 무어라 얼버무리기도 애매한 상황.
"음... 사실은... 이번에 수상작 공개했을 때, 한 작가 분께서 이해인 화백의 그림을 보시고는 너무 마음에 든다고 연락을 해 와서요..."
"네?! 해인이 그림...을 보고요? 어떤...작가가요? 아, 알 만한 사람인가요?"
"음...말씀드리기가 좀 그렇긴 한데...유명한 분...이시죠...까뫼드골 이라고..."
"까뫼드골?!! 그 [천상의 달빛] 작가 까뫼드골 말이예요??"
"어, 어떻게 아시네요... 프랑스 내에서나 유명하신 분일 텐데... 그 분이 이번 공모전 프랑스 작가들 중에서 심사위원을 하셨었거든요. 다른 작품들도 많이 보셨을 텐데 꼭 찝어 해인 화백 그림이 마음에 든다고..."
프랑스 국내에서 제법 유명하다는 까뫼드골이라는 작가.
타국에까지 그렇게 인지도가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 현직 프로 작가가 해인에게 삽화를 요청했을 줄이야...
애초부터 출판사에서 기획했던 다중매체 공모전의 이유는 이렇게 작가들과 일러스트레이터를 발굴해 서로 연결고리를 만들어 주는 데에 있기도 했었을 것.
"그...그래서, 해인이 연락처를 그 작가 분한테 알려 줬나요?"
걱정했던 기자 회견을 무사히 마쳐 한시름 놓기 시작한 시점에 다시 닥치고 만 세현의 고민.
연인인 자신이 먼저 일지,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자신의 성공이 먼저 일지, 단지 그렇게 말을 하기에도 애매해져 버린 상황이었다.
물론 해인에게 있어서는 무한한 영광이 아닐 수 없는 일이겠지만, 이 상황에서 은근히라도 욕심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아뇨, 무슨 이유 때문인지 좀 고민하시는 것 같아 보여 아직 연락처 전달은 안했어요."
순간, 해인의 캐릭터를 이미 잘 알고 있는 세현으로선 해인이 이 상황에서 어떤 고민을 안고 연락처 공개를 미루었는지 알 수 있었다.
'후우... 정말로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자신에게 닥친 사건들보다도 더한 걱정거리를 떠 안은 채, 정신이 어디에 가 있는 지도 모르게 다시 아를로 돌아온 세현.
당장에 해인을 만나 결론이 무엇이 됐건 이야기해 보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정리되지 않은 기분으로 만나기는 더욱 두려웠다.
"세현아, 잘 했다...! 수고 많았어! 기자들 참 더럽게도 물어뜯으려 들던데 잘 대처했다, 아주..."
아를에 도착해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아저씨가 세현에게 다가와 가볍게 끌어 안아주었다.
"아...감사합니다, 다 아저씨 덕 이예요... 기자들 세게 나올 테니 대비하라고 말씀해 주셨잖아요...후우... 제가 회견 중에 뭐라고 얘기 했었는진 기억이 잘 안 나지만...!!"
"흠, 세월이 지나도 그 놈의 인정사정 볼 것 없는 기자들 대응은 별로 달라질 게 없겠지...!! 마음고생도 많았을 텐데 오늘은 들어가서 쉬어라. 세현아..."
"아...그래도 될까요, 그러고 보니 조금 피곤하긴 하네요..."
"예끼, 어딜 악덕 사장을 만들고 있어, 아무렴 내가 너 이렇게 큰 일 치루고 온 날까지 일 하라고 뒤에서 쪼일까봐 그러냐!?"
가볍게 웃으며 피곤한 몸을 이끌고 주변을 대충 정리하고 가게 문을 나서려는 찰나, 세현은 해인과 관련한 일들이 떠올라 다시 가게 주인아저씨에게 돌아왔다.
"저...아저씨, 뭐 하나 여쭤 봐도 되나요?"
"어헛, 피곤하다고 직원 쉬게 해주는 좋은 사장으로 남고 싶구만, 조용히 딱 없어져 줘야 멋있는 거지, 자꾸 눈앞에서 알짱댈거야? 뭔데?"
"아버지...관련된 얘기인데요...혹시 아시나 해서..."
"엉? 뭐야, 출판사에서 네 아버지 관련해서 뭐라 그러디? 뭔데?"
"아뇨 그런 건 아니고...아버지 소설에... 삽화를 그리셨던 분 말인데요...그 분에 대한 거 혹시 아시나 해서..."
"네 아버지 소설 삽화가? 갑자기 그건 왜?"
"아버지는...본인 소설 내실 때 삽화가하고 어떤 식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했나 궁금해서요, 저는 그림은 전혀 모르지만, 해인이는 그 소설 속 삽화 때문에 감명 받아 여기 온 거랬어요."
"아, 그래? 그랬구나...해인양... 그런데, 어쩌지... 옆에서 도와준답시고 맨날 툭탁대기만 했지, 네 아버지가 삽화가하고 어땠는 지까진 난 모르겠는데...?”
"아... 하긴 아신다 해도 벌써 몇십년 전 일인데, 기억이 안 나실 수도 있겠네요.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버지의 소설이 집필되던 시기를 함께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명이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을 해보고 싶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자신이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하는 건지... 세현은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해 아쉬워 하며 가게를 나섰다.
가게 주인아저씨는 갑작스레 삽화가를 물어보는 세현이 의아하기는 했지만, 다른 이유를 물어보지 않았다.
나름 나쁘지 않은 기자회견을 마쳐 분명 뭔가 개운해 졌었을 법도 한데 의외로 시무룩한 세현의 뒷모습을 보며 아저씨는 뭔가 찜찜했다.
"저 녀석...저거 뭔가 또 있네...!"
[ 해인아, 나 지금 돌아왔어. 지금 가게 앞. 잠깐 얼굴 좀 볼 수 있을까? ]
[ 오늘도 근무해? 오늘은 좀 쉬지... ]
[ 안 그래도 아저씨가 쉬라고 해주셔서 지금 해인이네 작업실 쪽으로 가고 있는 중이야. 한 5분 정도 있다가 잠깐 나올 수 있어? ]
[ 쳇, 궁금해서 그림이 안 그려졌는데, 내가 그걸 거절할 거 같아?! 알았어...! ]
해인의 작업실 방향으로 서서히 걸어오며 주고받은 메시지.
이 기분으로 막상 해인을 마주하면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막막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해인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 하고도 남을 성격이었지만, 자신에게 일부러 말해주지 않은 사실을 따져 물어야 할지...
아니면 모른 척 하고 언제가 됐든 먼저 말을 꺼내주길 기다려야 할지...
세현은 문득 몇 년을 걸려 쓰였고, 지금은 필사적인 퇴고 작업 중인 자신의 장편 소설이 늦어진 것에 통탄했다.
차라리 스토리 라인 등을 미리 얘기해주어 같이 작업 중이었다면 또 할 말이 생겼을지 모르는데,
아직 시작도 되지 않은 마당에 해인의 앞길을 막아야 하는 건지...
공모전에 출품했었던 작품과 마찬가지로 완성에 가까워져 있는 작품을 처음으로 보여주고 싶은 게 욕심이었는지...
복잡해서 머리가 터질 지경으로 멍하니 한 구조물에 걸터 앉아있던 세현.
“왁!!”
“앗, 깜짝이야...!!!”
해인은 멍을 잡고 있던 이 남자의 뒤쪽으로 슬금슬금 다가와 등을 밀어제끼며 놀래키듯 등장했다.
세현의 우려와는 달리 아무것도 다를 것 없는 모습으로.
잠깐의 놀란 표정 후 세현은 해인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응? 뭐야? 뭘 그렇게 봐? 얼굴에 뭐 묻었어? 씻고 나왔는데 물감... 묻었나...”
“아, 아냐...!! 나 다녀왔어... 혹시 중계 봤어??”
“그럼...! 댁 일하는 가게 가서 아저씨랑 같이 봤어... 어차피 그럴 거면 같이 가는 건데, 하도 뭐라 그래서 따라가지는 못했지만... 그래서... 어떻게 됐어?”
“응? 뭐...뭘??”
어쩐지 정신을 못 차리는 듯한 세현. 해인은 한쪽 눈을 찡그리며 가까이와 세현을 이리저리 살폈다.
“뭐야, 무슨 일 있어? 이 남자, 왜 이렇게 정신을 못 차려?? 여기 어디야? 난 누구고?”
“아냐...! 그런 거... 내 인터뷰, 봤다니까 알겠지만 그 상태지 뭐...!!”
“그러니까, 끝나고 출판사에서 뭐라고 안했냐고요!? 뭐 달리 달라진 거라도?”
“응? 아... 뭐 고맙다고, 앞으로 여론 좀 가라앉을 테니 같이 기다려 보자고 하지, 뭐 별 말은 없었어.”
해인은 더 의아한 표정을 하고 세현을 노려보았다.
“뭐야, 근데 뭐야? 기자회견 장에서도 똘똘하게 할 말 다하면서 기자들한테 이겨 놓고선 지금 내 앞의 이 남자의 멍함은...? 누구 귀신이라도 만났어?”
세현은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대하는 해인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해인아...그...”
“??”
“출판사에서... 얼핏 들었어... 너하고 관련된...”
“나하고 관련된...? 아...!”
해인은 그제서야 왜 눈앞의 세현이 이렇게 정신 나간 사람마냥 멍을 잡고 있었는지 알아챘다.
“까뫼...드골... 이란 작가한테 캐스팅 될 수도 있게 됐다며... 왜 말 안했어, 나한텐...?”
해인은 한숨을 한번 깊게 내쉬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피식 웃으며 세현을 바라보았다.
“왜? 내가 그 작가한테 갔으면 좋겠는 거야, 아닌 거야...?”
이 순간 가장 두려워했던 질문을 듣게 된 세현. 순간, 꼭 다문 입으로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해인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근데, 난 그 작가 알지도 못하는데 유명한 사람이래?”
세현의 망설임에 순간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건지, 일부러 아무 관심이 없는 척 다른 곳을 응시하며 해인이 말했다.
세현은 그제서야 천천히 입을 떼었다.
“까뫼...드골... 프랑스에선 꽤 유명한 작가야. 이번에... 프랑스 측 심사위원으로 위촉됐었던 사람이래... 말하자면 프로 중에 프로라고...”
“그래? 그렇구나... 난 전혀 모르는데, 지난번에 임씨랑 같이 출판사 갔었을 때 들은 거야, 나도... 조금 전엔 독촉전화까지 받았었다니까...?”
“조...조금 전에?? 나 인터뷰 할 때...?”
세현은 짙게 침을 한번 꿀꺽 삼킨 뒤, 해인에게 물었다.
“그래서... 해인이 넌... 어떻게 하고 싶니?”
해인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가는 눈을 뜬 채 세현을 올려다보았다.
“뭘? 뭘 어떻게 해?”
“유명한 작가의 제안이잖아... 해인이 너로선 어마어마한 기회일 수도 있고...”
해인은 계속해서 추궁하듯이 세현에게 물어보았다.
“임씨는, 나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이렇게까지 공격적으로 쏘아붙인 적이 없었건만, 갑자기 이 여자 왜 이러나 싶으면서도 세현은 여전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해인에게 답했다.
“나는...해인이가 나랑 같이 해줬으면 하지... 그것 때문에 지금 더 열심히 오탈자 없이 구석구석 소설 다시 살피고 있는 것도 있고... 그런데...”
“그런데?”
“...내 욕심만 부리면 안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하지... 해인이 꿈에 관련된 일인데... 프로한테 인정받아 같이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거야 말로 꿈을 앞당기는 일이 될...”
“그런가?”
세현은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땅을 바라보며 조그맣게 속삭이는 해인을 보며 단전에서부터 불안감이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괜히 멋있는 척 했나...사실은 절대로, 나랑 같이 해 나가자고 얘기하고 싶었는데...’
해인은 쭉 다른 곳을 응시하다가 시선을 돌리며 세현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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