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3화 누군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 ]
"제 작품을 보셨다고요? 음... 어떻게.. 보신 거죠?"
처음 작가를 지망하던 순간부터 현재까지도 무수한 출판사에 작품을 보여주며 기고의뢰를 해왔던 기태.
등단을 시켜준다는 조건을 내세우며 오히려 대가성을 요구하는 듯한 희망고문을 내세우던 영세 악덕 업체들을 많이 상대해 왔었다.
작품이 좋다고 먼저 연락을 해오는 출판사는 그리 많지 않았는데, 무려 기태가 그토록 바라던 출판사 톱3 안에 드는 노을 출판사에서 오히려 자신을 찾아주는 상황이라니...
기태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어디서 보다니요? 한기태씨 출판 시장에 나와 계신 작가님 아니세요? 작가님 책은 출간되어 있으니 서점 어디에 가도 볼 수 있잖습니까! 작가님 글은 어디 일부러 가야지만 볼 수 있는 겁니까?!"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라 예상하긴 했지만, 의심을 잔뜩 품고 질문 해오는 기태에게, 오히려 강경한 자세로 대응한 아영.
야마다에게 전문 사기꾼이라고 핀잔을 주던 아영은 실은 본인이야말로 뻔뻔한 연기파 사기 달인임에 분명했다.
"아니... 보통 이런 경우가 잘 없어서요... 그럼 제 작품... 중에 어떤 게 마음에 드셨다는 건지 여쭤 봐도 될까요?"
속고만 살았나...라며 기태에게 불만을 가질 법도 한 아영이었지만, 자신 역시도 지금 기태를 속이고 있는 중이었기에, 이번 한번은 더 속고 살게 해야 했다.
'후우... 이거 쉽지 않은데...? 이 사람 책 두 권을 다 봐두길 잘했다. 가만있자, 책 제목이...'
"뭐, 업계에 그런 악덕업체들 꽤 있는 거 알고 있으니 의심하시는 것 정도는 이해합니다. 기태 작가님의 책 중 저희가 확인한 건 장편소설 [얼굴]과 [날개] 입니다. 문체는 대체적으로 비교적 어두운 분위기로 사회 풍자적인 얘기가 많았죠... 묘사가 좀 많은 편에 인물들은 적은 편이고... 맞습니까? 이제 믿으시겠어요?"
마침 아영에겐 바로 얼마 전에 읽은 책이라 기억이 생생했다.
자신이 집필한 소설 소개를 상대편에게 직접 들으니 안심이 되어서 였는 지, 비로소 경계가 풀린 듯한 기태.
조금 전과는 사뭇 달라 진 목소리 톤과 자세로 아영에게 답했다.
"기분 상하게 해드렸다면 죄...죄송합니다!!! 이전에 출판을 같이 하자고 사칭하면서 속은 적이 많아서요... 이번은 정말 직접 제 작품을 보시고 저를 찾아 주시는 것 같네요. 그런데... 무슨 일로 이렇게 연락을 주셨는지...”
다행이다, 안 들켰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지만 기지를 발휘해 무사히 원래 목적대로 진행할 수 있게 된 아영.
성공을 확신하며 기세를 몰아 자신의 말을 완전히 믿기 시작한 기태와 덜컥 미팅 약속까지도 잡아버렸다.
"한번 뵙고 싶습니다. 결정되었다고 하기엔 뭐 하지만, 저희 쪽에서도 작가님과 같이 일을 했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드디어...! 한기태 인생이 피기 시작하는 건가...! 그것도 단숨에, 그토록 바랐던 노을 출판사에서 출판 계약 이야기가 나오다니...!
왜 아니었을까,
친구 세현의 억측을 기자에게 쏟아낸 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파만파로 커져 본인이 손 쓸 수 없는 지경까지 다다라 감당 못하는 두려움을 숨기고 있던 기태.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의혹이었건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일축하며 자신을 속이며 사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의 기회라니, 기태는 오래간만에 찾아온 환희에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아영... 아니, ‘노을 출판사’의 관계자라고 밝힌 이와 연락을 마친 기태.
마침 지속적으로 연재를 하던 '책속의 사람' 출판사의 원고 작업 중이었다.
집필 중이던 컴퓨터 모니터 속 원고를 가느다란 눈으로 쏘아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흥, 마감이네, 어쩌네 맨날 괴롭혔었지? 나 이제 노을하고 계약만 하면 네놈들 하곤 끝인 줄 알아라...!"
기태는 지금 이 두근거림을 넘어서 떨리기 까지 하는 감정을 가만히 앉아 감당하기가 버거웠는지, 작성하던 노트북을 거칠게 닫아버리고는 겉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기자에게 소식을 흘린 후로는 거의 밖으로 나오지 않았기에 정말 오래간만의 바깥 외출.
온 나라가 들썩일 정도의 이슈가 되어 그동안 뉴스, 신문 등의 매체에서 줄기차게 다루어졌건만, 일부러 접하기를 피해왔었다.
무수하게 만들었던 소설 속 이야기로 이렇게 너나 할 것 없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으면 좋았을 것을...
[만식아, 뭐하냐? 오래간만에 술이나 한 잔 하자...! 내가 오늘 산다...!!]
이제는 기쁠 때고 슬플 때고 제일 먼저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상대, 만식. 그렇지만 다른 일이 있는지 만식은 기태가 보낸 문자를 한참동안 보지 못하는 듯 했다.
이런 적이 없건만 왜인지 초조해하다가 먼저 전화를 걸어본 기태.
“야, 왜 문자를 안 봐? 한잔하자니까!”
“쳇, 나는 일하잖아, 인마! 어디 아무 때나 막 연락하면 다 받을 수 있는 줄 알아?”
“음... 그래서... 일 언제 끝나는데?”
“오늘 야근이야. 근데... 너 뭐 좋은 일 있냐? 목소리가 너답지 않게 밝다?”
“음...뭐 그런 게 있다... 그럼 오늘 못 본다는 거냐?”
전업 작가인 기태와는 달리 생계를 위해 따로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던 만식은 기태의 기쁜 날을 함께 축하해 주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 마음에 연락처를 뒤져보던 기태는 휴대폰의 착신 이력 중에 소현을 발견했다.
“아... 소현이...”
공모전에 관련된 정보부터, 세현이 참가한다는 소식, 그리고 밝혀지지 않았을 시점에 먼저 알아 볼 수 있었던 수상자 정보...
사실 사건의 중심이 된 출판사의 책임자라던 소현에게는 이 상황이 미안한 일이었다.
먼저 아는 척도 해주며 여러 정보들도 제공해 주었는데, 결국은 은혜를 원수로 갚은 꼴이 되어 버린 셈이니...
'자신과는 관련 없는 일'이라 치부하며 세현의 수상만 취소된 후 조용히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이었지만,
나중이라도 소현에게만큼은 제보자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았으면 하는 조바심이 있었다.
결국 누구도 기쁨을 함께 할 이를 찾지 못해 혼자 덩그러니 길에 나와 자축이나 하기로 한 기태.
“쳇, 이 나라는 뭐 어디든 혼자 가려고만 하면 눈치들을 주고 난리지...”
평소 같았으면 그저 술이나 사들고 집에 들어가 홀짝 댔을 것을, 넘쳐 흐르는 자신감으로, 꽤나 있어 보이는 레스토랑에 홀로 들어갔다.
여전히 가게 안쪽은 온통 커플 천지. 애써 무심한 척하며 기태는 구석 창가 쪽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혼자만의 축하를 위해 이런 곳에 온 게 실수였던 건 지, 외면하려 고개를 어느 방향으로 돌려도 눈에 들어오는 커플들의 괴상야릇한 행각들에 기태는 창밖을 응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애석하게도 그 일대의 창밖 풍경도 예외는 아니었다.
‘요즘은 어딜 가나... 아주...’
눈앞에 보이는 게 그런 풍경이었기 때문일까, 도저히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을 인지하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으로 향했다.
'에휴... 가자, 가...! 이런 분위기에서 좋은 밥 먹는다고 소화나 잘 되겠냐... 이럴 때 축하해 줄 여자친구도 없고... 참, 나...!’
"어, 안녕하세요?"
문턱을 넘으려던 기태에게 말을 건 어떤 여성.
'누...구지? 누구더라...'
"아, 저 희진이 친구예요. 희진이 남자친구분 아니세요? 왜 예전에 같이 한번 뵌 적 있었는데..."
희진이...?
전 여자친구의... 이름. 낙방하긴 했지만 무려 공모전 출품작에 모티브가 되었던 그... ‘나쁜 기집애.’
기태조차도 너무도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이 여자가, 걔하고는 헤어진 지가 언제인데...친구라면서 그런 것도 모르고 있었...'
"희진이 보러 오신건가요? 저쪽에서 지금 친구들하고 수다 떨고 있어요...! 불러 드릴까요?"
엉겁결에 기태는 희진의 친구라는 여자가 가르키는 테이블 쪽을 바라보았다.
여자들 대여섯명이 모여 소란스럽게 수다를 떨고있는 모습, 그리고 그 가운데 익숙한 얼굴이 눈에 띄었다.
"희진아, 너 남자친구 분 오셨는데!!"
눈치라곤 눈곱만치도 없어 보이는 이 친구는 친절하게도 기태의 존재를 큰 소리로 ‘나쁜 기집애’가 있는 테이블 쪽에 외쳐주었다.
당황할 새도 없이 호명된 기태와 눈이 마주쳐 버린 ‘희진’.
옆 친구들에게 찡긋 눈신호를 보내고는 테이블에서 빠져나와 기태 쪽으로 다가왔다.
서서히 가까워지며 기태를 바라보는 눈빛은 몹시도 매서웠다.
예상치도 않게 전 여자친구를 만나게 되어 얼빠진 표정을 하며 멍하니 있는 기태의 팔을 붙잡아 끌고 희진은 일단 가게 밖으로 나왔다.
"뭐야, 오빠 여긴 또 왜 온 거야?!"
"너...따라온 거 아니니까 착각하지 마...! 그나저나 네 친구란 애들은 왜 날 아직도 네 남자친구라고 알고 있는 거야?"
"웃기지마! 지난번에도 혼자 나 따라오고 그러더니... 이런 데를 왜 혼자 오냐!? 그리고 친구들한텐 얘기 안했어. 괜히 쓸데없는 말 나올까봐..."
냉랭하게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
자신한테 처해진 상황 탓 일까. 기태의 앞에 있는 건 그렇게 밉다고 소설 소재로 까지 써 비판하며 잊고 싶었던 대상인데,
막상 다시 나타나 눈앞에서 떽떽 대는 걸 보니 반가운 마음까지 생기는 듯 했다.
"너...그때 만나는 다른 남자 있었잖아!! 클럽에서 봤던 덩치 좋은 남자... 그 남자랑 사귀는 거 아니었어?? 그럼 남자친구 바뀌었다고 친구들한테..."
"이제 와서 그걸 왜 알고 싶은데? 알려야 할 이유도 없긴 하지만... 그 사람하고 사귀는 거 아니었어!! 오빠가 그때 날 완전 나쁜 년으로 몰아세우는 바람에 나도 짜증나서 그냥 넘어갔지만..."
"뭐? 사...사귀는 사람 아니었다고?! 그놈이 너 여자친구라고 했었는데...?!"
"나 좋다고 따라다니던 사람이야!! 오빠랑 헤어진 거 알고는 조르고 졸라대는 통에 처음 그냥 데이트라고 했던 날이었고...!! 오빤 얘기를 만든다는 사람이 그렇게 상상력이 부족하냐?!"
희진과 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시점에,
젊은이들의 클럽라이프 취재를 위해 정말 아무 사심 없이 클럽에 들렀을 때 만났던 전 여자친구와 그 옆의 한 남자.
눈에 보이는 대로 믿었다. 오로지 그 뿐이었다. 헤어진 여자 친구가 뭘 하든 자신은 아무런 권한이 없었는데도.
억측으로 몰아세우고, 당시엔 분노에 눈이 멀어 사귀었을 당시의 여자 친구의 모습 같은 건 전혀 떠오르지도 않았었다.
생각해보면 자신은 오로지 힘들게만 했던 남자친구에, 희진은 그걸 묵묵히 참아내 준 착한 여자였는데...
기태는 늦게나마 알게 된 진실에 희진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지만 무어라 말을 꺼내야 할 지 몰랐다.
짧은 시간을 고민하던 기태는 이내 희진에게 외쳤다.
"희...희진아, 그 땐 내가 잘못했어...내가 그동안 잘못한 게 너무 많아서 네가 떠난다고 했던 걸 텐데, 너무 화만 나 있었어..."
영락없이 옛 연인에게 매달리고 있는 찌질한 남자가 되어버린 상황.
오해했던 상황이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변명의 여지는 없었기에 기태가 할 수 있는 것은 사과뿐이었다.
희진은 기태의 말을 듣고는 눈도 마주보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그래도...이제 와 달라질 건 없어, 오빠...! 오늘도, 여기 어떻게 오게 건진 모르지만, 앞으론 이러지 마."
"......"
지난 번 처럼 정말로 희진을 따라 이곳에 온 게 아니라고 변명을 하고 싶었지만,
기태는 단호한 태도의 희진 앞에서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친구들 기다리니까 들어가 볼께. 정말로 앞으론 다시 안 봤으면 좋겠어."
"희진아...그, 그래도..."
희진은 기태에게 등을 보이며 다시 가게로 돌아가려 했다.
무어라 잡을 말이 없었지만, 보내기에 너무 아쉬워 다급해진 기태는 희진을 따라가 팔을 잡았다.
"오빠...이거 놔줄래?"
더 싸늘하게 달라진 눈빛으로 기태를 쏘아보는 희진 앞에 기태는 별말 못하고 그저 희진의 팔만을 쥐고 놓지 못한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놔, 이거.... 아, 그리고... 혹시 만나게 되면 확인하고 싶은 거 한 가지 있었는데... 지금 온통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는 그들만의 세상 출판사 사건 말야... 그것도 오빠가 뭔가 한 거 맞지?”
전혀 예상치도 못한 타이밍에서 터져버린...영문을 알 수 없는 의심.
기태는 너무 놀라 희진의 팔을 잡고 있던 손을 뿌리치고는 가빠진 호흡,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져버린 동공으로 희진의 두 눈을 쳐다보았다.
"너...그게 무슨 말이야!? 그 얘기가 갑자기 왜 나오는 거야? 누... 누가 그래?
http://m.novel.naver.com/challenge/list.nhn?novelId=628943&page=1#volume1
http://m.me.co.kr/?mode=cdetail&itemNo=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