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4화 _ 그 놈을 만나는 곳 100m 전 ]
"임세현씨 사건 말이야, 오빠가 나서서 뭐라고 한 거 아니냐고."
"너... 다짜고짜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하긴 뭘 해...!?"
오래간만에 만나 지난 오해가 좀 풀리는가 싶더니 전혀 예상치도 못한 방향으로 던져진 희진의 추궁에 기태는 당황함을 감출 수 없었다.
"왜...갑자기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거야...?! 너...그것보다 그런 소린 어디서 들은거야!?"
눈앞의 희진은 되려 별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허둥대는 기태를 빤히 올려다 보았다.
"놀라는 게 더 수상하네... 기억이 잘 안나나본데, 오빠 나 만날 때 거의 매번 그 오빠 친구라던 임세현이란 사람 험담했었어...!"
"내...내가?"
"그래! '준비하나 안되어 있는 주제에 자기 아버지 빽 믿고 작가 하겠다고 뛰쳐나온 천둥 벌거숭이' 라고... 얼마나 많이 들었으면 내가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을까..."
여자친구와의 데이트 중에도 늘 필요이상으로 직업 작가로서의 의무와 자세를 강조했었던 기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습관처럼 세현을 적으로 말하는 뉘앙스를 흘렸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근데 이번에 터졌다는 그 사람 사건 내용이 오빠가 늘 얘기하던 그 사실 그냥 그대로 잖아...! 이제 정말 여기저기 퍼져서 국민적인 관심사가 되어버렸지만... 너무 세세한 부분까지 오빠가 하던 얘기랑 다 맞아 떨어지던 걸... 난 그 사건 터지자 마자 오빠가 나서서 뭐 한거 아닌가 생각했는데, 아니야?"
"무...무슨 소리야!! 나도 모르는 일이야!! 그, 그게 사실이니까 똑같은 내용으로 지금 밝혀진거지!!"
연인으로 만날 때마다 늘 다른 불만 없이, 고분고분 남자 친구의 말을 잘 들어준다는 생각에서 였을까, 마치 거울에 대고 말하는 것과도 같이 여자친구 앞에서 자신의 민낯을 다 까발리고 말았었던 기태.
늘 잘해주지 못했던 남자친구의 모습으로 비추어 졌던 자신에게, 그 처지를 대변함에 있어 세현은 늘 단골 안주거리였다.
친구이기에 알 수 있었던 세현의 자세한 내막, 자신을 조금이라도 더 치켜 세우려 그것들조차
모두 여자친구 앞에서 떠들어댔던 자신의 모습이 새삼 떠올랐다.
"아니야? 하긴...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뒷담화 해댔어도 한 때 친구였다던 사람을 그렇게 공개적으로 추락시키려 하진 않았겠지..."
조금의 희망도 남기지 않은 듯한 경멸의 마지막 멘트를 끝으로, 찝찝한 여운을 남기며 희진은 가게 안으로 다시 들어가 버렸다.
당황스러운 이 얘기가 그저 희진 혼자만의 추측에 불과했다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리긴 했지만,
돌이켜 보니 이는 자신에 대한 비아냥이 분명했다. 백번 순화해, 정제된 표현으로 내뱉긴 했어도 필시
'해도 해도 네놈이 그 정도 쓰레기는 아니겠지'
라고.. 얘기하고 싶었음이 분명했다.
'그래, 나 쓰레기다...! 친구였던 자식까지도 팔아먹는... 내 상황에 처해보지 않았으면 다들 비난할 자격 없다고!'
희진이 남기고 간, 지워지지 않는 묘한 잔상을 머금은 채, 기태는 한참을 정적 속에 서성였다.
*
[ 뭐? 연락 한 번에 약속까지 잡았다고? 역시, 아영씨 추진력 하나는 믿을만 해! ]
[ 흥, 추진력 하나가 아니라 추진력'도'라도 정정해라, 까짓거 안될 게 뭐야...! ]
막연하게 기태와 미팅약속을 잡는 단계까지는 성공했지만 그 이후의 계획은 딱히 떠오르지 않던 아영.
이럴 때 주저없이 바로 떠오르는 건 살아있는 검색엔진, 야마다였다.
"출판사인 것처럼 얘기하다 언제부터 본론으로 들어갈 생각이야? 근데, 그래도 그 쪽은 남자인데 혼자 만나는 건 좀 위험하지 않겠어? 시비가 붙을 수도 있고..."
"위험하면, 네가 오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필요하면 가지, 뭐..."
"쳇, 뒤에 숨어서 경찰이나 부르는 주제에 남자 시늉은..."
"그 때는 그게 최선이었어!! 이번은 사정 잘 알고 있고, 상황이 다르잖아!!"
늘 아영이 하는 일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던 야마다. 이 후의 상황들 역시 진두 지휘하며 구체적인 자료들까지도 제공해 주었다.
"한국에서는 어떤 식인 지 모르지만, 보통 일본에서는 이런 식으로 출판 계약을 할 때 그 사람의 작품을 기준으로 해서 좋은 점을 우리 쪽에서 취하고 싶다는 식을 기본으로 해서..."
어디서 주워 들은 내용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럴 듯한 절차 설명을 줄줄이 늘어놓는 야마다.
아영도 바로 앞에 닥친 일이니 만큼 열심히 경청하며 메모했다.
나름 철저하게 대책을 준비한 야마다와 아영.
그리고 드디어 바로 며칠 뒤인 약속날, 아영은 기태와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아영씨는 너무 자유분방해서 약간 히피스럽게 하고 다니는 경향이 있는데, 그 사람 만나러 갈 때는 좀 직장인 처럼 갖추고 나가!'
...라며 코디네이터 까지도 자처한 야마다의 조언을 듣고 신경을 쓰긴 했지만,
약속 장소로 항하는 아영은 딱히 깔맞춤 정장도 아닌, 캐주얼에 가까운 차림새.
"그 놈 같은 오타쿠한테 패션 지적당한거야?
아... 자존심 상해...!"
혹여나 사기행각이 드러날 새랴 기태가 잘 알고 있을 노을 출판사와는 일부러 좀 떨어진 장소의 한 카페에서 만나기로 한 아영.
기대에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사진으로 확인했던 기태라는 남자는 벌써부터 저 앞에 와 있었던 듯 했다.
얼마나 일찍부터 와서 귀인을 기다리고 있던 건 지, 느긋하게 앉아 벌써 차를 한잔 비운 상태.
아영은 헛기침을 하며 기태의 뒤로 다가갔다.
"흠, 흠... 저 혹시 한기태씨 되시는지요?"
***
"다행입니다. 임 작가님...! 그 인터뷰 해주신 덕에 논란이 많이 줄어든 것 같습니다!!"
전세계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인터뷰 며칠 후 세현에게 걸려온 출판사 측의 전화.
"예?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죠?"
"다행히 언론사들에서도 진정성이 있다고 여긴 건지 대부분 우호적으로 기사들 써 주고 있는 것 같고요. 무엇보다 명백한 건 작가님 글의 조회수 입니다."
"조회수...요?"
아직까지는 무료로 열람할 수 있게 열어둔 출판사 홈페이지의 수상작 게시 페이지.
노이즈 마케팅이든 뭐든 확인 결과, 세현의 작품 조회수는 2억뷰에 가까운 수치로 지속적으로 카운팅 중이었다.
"2... 2억....?! 요 몇 주만에...!?"
"전 세계인 대상이니까요... 하지만 다른 작품과 비교해봐도 어마어마한 수치예요."
"그렇다고 해도... 이게 논란이 줄었다는 증거라고 말하기는... 그저 호기심이 생겨서 아닐까요?"
"호기심을 끌었다는 게 포인트죠. 실제로 평들도 나쁘지 않아요. 같이 작업하신 일러스트에 관련한 문의도 빗발치고 있는 거 모르시죠?"
"예? 아... 그래요..."
의혹 종식을 떠나 과연 이만큼의 기대치를 올려 놓게 된 것이 잘 된 일일까...
끝이 보인다 보인다 하면서도 아직까지도 미완인 자신의 다음 작품이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관심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지 모를 일.
해인이 역시도 이런 고민을...
[ 와우~ 벌써 2억뷰!!! 출세하셨어...! 임쒸...! ]
...심각하게 하고 있지는 않구나...
세현은 다만 그나마 당장이라도 큰 일이 날 것 같았던 사태가 조금은 수습이 되어가고 있는 듯 해 다행이었다.
걸려온 전화를 받으려 잠시 밖에 나와있던 세현은 가게로 들어와 카페 구석에서 전화를 받는, 평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의 아저씨를 목격했다.
늘 에너지 넘치는 모습으로 레스토랑 직원들을 통솔하던 아저씨.
무슨 일인지 심각한 표정으로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전화 중 세현과 눈이 마주친 아저씨는 뭔가 씁쓸한 미소를 살짝 던지고는 이내 통화를 종료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아저씨의 생경한 모습에 세현이 먼저 물었다.
세현을 빤히 쳐다보던 아저씨는 한숨을 한번 푹 쉬고서 천천히 입을 떼었다.
"세현이, 너 마지막으로 집하고 통화했던 게 언제야?"
"예?? 집에?? 어...그래도 두달에 한번 정도씩은 연락 드렸는데..."
"그럼 언제가 마지막이었는데...?"
"아, 그러고 보니 요 몇달은 정신이 하나도 없어 연락 못 드렸네요...근데 왜 그러세요??"
아저씨는 더 묵직하게 목소리를 깔며 이야기 했다.
"형우 어머님... 그러니까 네 할머님이 말야..."
"네?? 할머니요? 계속 연락 했었는데, 할머니가 왜요?? 근데 저희 할머니 하고도 잘 아세요? 아저씨??"
"그럼... 잘 알지...네 아버지란 인간이 하도 무심해서 내가 좀 옆에서 챙겨드린다는게 지금에 까지...왔다고 해야 하나..."
"하...할머니하고도 잘 아시는 구나... 그런...데 뭐 다른 거 들으신 거라도 있나요? 전 별 다른 거 못 들었는데 갑자기 할머니 얘기는 왜..."
아들을 잃은 친구의 어머니에게 마치 아들 같은 역할까지 해왔다는 아저씨.
그 사실은 아를에 온지 일년 즈음이 된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아저씨의 이 근심 가득한 표정의 의미는...
"정신없이 바쁘고 신경쓰일 일 투성인 것 알지만, 너 한국에 한번 다녀와야 겠다..."
"???"
사색이 된 세현. 혹시 할머니가...?
"너희 할머니...많이 편찮으시댄다. 아마 너한테는 일부러 말을 안하신 모양이지만..."
"예?! 편찮으시다뇨? 저랑 연락할 때는 아무렇지도 않으셨었는데...요, 몇달 만에...?"
"사실 지병이 있으셔서 병원에 다니신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게 심하지는 않다고 본인이 주변에 알리는 걸 꺼리셨던 모양이긴 한데..."
"지병이라면...막 생명에도 지장이 있고 그런 건가요...!!?"
하나밖에 없는 손자인데, 그런 것 하나 알지 못했던 자신에게 질책이라도 하듯 격앙된 목소리로 아저씨에게 질문을 하는 세현.
"내가 알기론 그런 병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할머님 이제 연세가 있으시잖니... 게다가 이번 출판사 사태 때문에 충격을 좀 받으신 모양이더라..."
"그...그래서 지금 어디 가 계신데요?!"
세현은 당장이라도 찾아갈 기세로 아저씨를 재촉해댔다.
"병원에 입원해 계시다더구나... 너 여기오기 전에 일본에도 나가 있었다 했지? 그 전에도 어디 지방 쪽에 나와 있었고...그럼 한 4, 5년 간은 못 뵀단 소리 아니냐..."
세현의 할머니는 이른 나이에 부모님을 여읜 세현을 줄곧 돌보아 주었었다.
세현 아버지의 소설이 쌓아준 부 덕에 남 부럽지 않은 생활은 할 수 있었지만 늘 혼자였던 할머니.
세현이 자기 꿈 찾아 무모한 도전을 시도하려 할 때에도 옆에서 늘 손자를 응원해주던 입장이었다.
문득 세현은 이곳에서의 초반에 자신 역시도 '다 버리고 왔다'고 말하던 해인의 말이 떠올랐다.
'다 버리고 왔다고 해도... 이런 소식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
가보아야만 했다.
아버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얻게 되어버렸지만,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이 유명세 만큼이나 가족에겐 고스란히 걱정거리가 되었을 게 뻔하니까...
해인을 만나는 밤 시간, 세현은 해인에게 이 모든 상황을 설명했다.
"이래저래 아직 정리 안된 것도 있고, 뭣보다 너 작업실 이동 건 때문에 옆에 있어줘야 하는데 미안하다... 잠깐 다녀올께...!"
"에이 씨, 임세현씨! 제정신이야? 지금?!"
"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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