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5화 _ 이렇게 예쁜 사기꾼 봤어? ]
"임씨 지금 제정신이야?!"
힘들게 사정을 설명했건만 되려 역정을 내는 해인.
세현은 어리둥절했다.
"왜...뭐가...??"
"아니, 부모님 다 안계시고, 형제도 없이 이제 남은 가족 할머니 뿐인데 편찮으시다면 당연히 가봐야지, 이 판국에 어디 다른 걱정이야!?"
"아...아니 그게 아니라..."
"이래서 어른들이 아들자식 키워봐야 다 헛 거라 그러나 보다...! 나중에 내 아들 놈 시키가 이러기만 해봐... 아주 그냥... 콱!"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는 건 지, 되려 장난스럽게 말해주는 해인.
"알았어, 미안, 미안..."
세현은 말없이 해인을 꼭 끌어안았다.
"내가 뭐 어린 애냐?! 잠깐 누구 옆에 없다고 찡찡대고 길 잃는 그럴 나이 아니니까 걱정 말고 잘 갔다 오기나 해!!"
그래도 멀리 떨어지는 것에 어딘지 아쉬움이 묻어나는 음성으로 세현의 품에서 나지막하게 조근대는 해인.
두 사람은 꼭 붙은 채 하염없이 걸었다.
언제나 처럼 드문드문 늘어선 가로등만이 붉으스름한 조명을 쏘아주고 있는, 인적 드문 아를의 밤거리.
해인과 세현은 손을 꼭 맞잡은 채, 처음 세현이 해인에게 고백했던 레푀블리크 광장 앞 원형 경기장에까지 다다랐다.
"하...여기 진짜 오래간만이다...! 걸어오면 코앞인데 이렇게 잘 안오게 되네..."
"응? 지금은 문 닫아서 안에도 못 들어갈 텐데 이 시간에 여긴 왜 온 거야?"
"여긴 우리한테 뭔가 상징 같은 장소잖아, 그러니까 그냥... 기도하러...? '우리 만나고 나서 처음으로 멀리 떨어지게 되는 셈인데, 그동안 별일 없게 해주세요...!' 하고..."
"쳇, 고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있냐...!?"
해인은 세현의 말에 싱겁다는 듯 입을 비죽거리면서도, 비치는 조명때문인지, 무언가 음산한 모습까지도 연출하고 있는 눈앞의 경기장을 올려다 보았다.
분명 전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거늘, 이곳에서의 무수한 일들로 이곳은 여러 이미지들이 중첩되어 보여졌다.
해인은 옆에서 눈을 감고 혼자 조용히 중얼거리며 기도하는 세현을 힐끗 살펴보며, 잠시 망설이다 자신도 따라 눈을 감았다.
늘 고요한 적막에 잠기는 이 시간대의 아를.
그 안에서 눈까지 감아 완전한 어둠을 맞이하니 더 깊은 고독 속으로 빠져 드는 듯 했다.
세현처럼 소리를 내며 중얼대지는 않았으나, 해인은 나름의 다짐을 가슴 속으로 읊어댔다.
먼저 눈을 떠 해인이 자신을 따라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을 지켜본 세현.
가만히 해인의 뒤쪽으로 이동해 살며시 해인을 끌어안았다.
세현은 놀라서 눈을 뜬 해인의 귀 옆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는 나지막하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 생각보다 더 쓸쓸할 수도 있으니까 잘 참고 기다리고 있어. 금방 다녀올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세현의 안긴 팔을 부여잡는 해인.
아무도 보이지 않는 시간, 이제는 익숙해 진 아를의 주민이 된 두 사람은 부드럽게 서로의 입술을 포개며 여전히 아쉬움을 달래었다.
해인과 잠시 동안의 떨어짐을 대비하면서도 아저씨에게 할머니 얘기를 전해들은 후부터 급한 마음에 출국준비를 마쳐놓았던 세현은 바로 다음 날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
“혹시... 한기태 작가님 되십니까?”
한국.
드디어 작가 한기태와 ‘노을’ 출판사의 [관계자] 역으로 분한 아영과의 만남이 이루어진 한 카페.
아영은 한참이나 먼저 와 오매불망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을 기태에게 말을 걸었다.
잔뜩 긴장한 듯한 표정으로, 그렇지만 자신을 찾는 소리에 누구보다 빠르게 고개를 돌린 기태.
기태는 자신을 향해 가볍게 웃어주며 인사하는 아영과 마주했다.
‘예...예쁘다... 저 출판사는...직원 얼굴보고 뽑나...’
언제나 넘치는 자신감으로 옷은 그저 걸치는 것만이 목적이었던 듯 했던 아영, 그러나 야마다의 조언에 다른 때와는 달리, 조금은 짙은 화장에, 복장까지도 신경 쓴 미모의 커리어 우먼으로 변신한 모습에 기태는 잠시 넋이 나갈 정도로 감탄했다.
“안녕하세요. 연락... 드렸었죠? 노을 출판사의 송아연 입니다.”
치밀한 실물검증을 마치고 ‘따로 만들어 진’ 명함을 기태에게 건낸 아영.
이미 그 미모와 자신감 가득한 당찬 목소리에 홀려버린 기태로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전화로 자신의 작품을 거론하며 제의해 온 노을 출판사의 제의를 믿게 되었다고 얘기 했지만,
실제로 만나보기 전까지는 그저 반신반의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순간. 아영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그것은 단숨에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저 일 관련 미팅을 진행한다는 핑계로 눈앞의 미녀를 상대하고 있다는 사실이 황송할 따름이었다.
“예...아...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작가 한기태라고 합니다.”
“예, 반갑습니다. 책 잘 읽었습니다. 한 작가님.”
아영은 철저한 서비스 정신을 발휘해 흔들림 없는 연기로 자연스럽게 일 얘기를 꺼내며 ‘한기태’라는 사람을 관찰하였다.
평소에도 비슷한 모습인지는 모르지만, 이날만큼은 나름 신경을 쓰고 나온 모양인지, 깔끔한 옷차림새에 헤어스타일도 잘 정돈된 평범한 30대 남성의 모습.
“오늘 이렇게 뵙자고 한 건, 일 전에 말씀은 드렸습니다시피 작가님 글 이야기입니다.”
“아...예...!! 제 책을 읽으셨다고 하셨죠...!! 감사합니다...!!”
“예, 그나저나 장편 두 권을 내신 후에 꽤 시간이 지난 걸로 알고 있는데, 후의 다른 출간 계획은 없으신지요?”
선천적인 외모와 당당한 태도 외에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무수하게 대사를 연습했던 아영이었다.
“아, 예... 사실 지금 연재 중인 출판사가 하나 있어서 그것 연재하다보니 조금 늦어지고 있습니다. 연재 중인 소설이 단행본으로 계속 나올 예정이긴 합니다.”
“아, 그러시죠... 연재하고 계신 출판사가 있다고 알고는 있습니다만, 저희랑 같이 일을 하게 되시면 그쪽과는 다른 문제가 없으시겠는지...”
“아, 예! 물론이죠... 무려 노을 출판사랑 같이 한다는데, 지금 출판사 따...아니... 괘...괜 찮습니다. 문제없습니다.”
우회적인 질문으로 조금씩 기태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습득해 가는 아영.
기태가 연재하고 있다는 출판사 직원 측에서도 기태를 그다지 좋은 이미지로 여기고 있는 것 같지 않더니, 기태 역시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연재 중이신 소설은 어떤 내용인지 저희가 확인하지는 못했고요... 말씀드렸다 시피 장편으로 내셨던 [날개]와 [얼굴]...은 보았습니다. 혹시 소설 전반에 대해 좀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예, 물론이죠...!”
소설의 내용을 짚어가며 야마다와 같이 준비했던 질문들.
이는 모두 기태가 세현 사건의 거짓 제보자임을 확인하는 절차였다. 이 전문화 되다 못해 너무도 자연스러운 사기그룹...
“음... 두 소설이 소재나 내용은 다른데, 저희가 확인한 바로는 뭔가 주인공의 열등감과 그걸 극복해 가는 성공 스토리...같아 보이는데요. 혹시 어떤 영향을 받은 작품이나 사건 같은 게 있었습니까?”
“영향...받았던 작품이요? 음...딱히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기 보다... 굳이 말하면 사회...풍자 같은 그런 개념이라고 하는 편이 맞겠네요.”
대형 출판사에서 치러지는 면접과도 같다고 여긴 기태는 성심 성의껏 아영의 질문에 답했다.
거의 합격이 확정된 듯한 표정으로 신이 나서 묻지도 않은 작품 속 내용을 떠들어 대는 기태를 보며, 아영은 조금 더 시간을 끌기위해 문장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추가 질문을 해댔다.
출간한 지 오래되었고, 당시에 그다지 화제를 끌지 못했던 자신의 소설이건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오롯이 자신의 작품에 대해 누군가에게 상세한 설명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였을 까. 기태는 더욱 들뜬 모양새로 설명을 이어갔다.
그리고 끝으로 던져진 아영의 회심의 질문공격 하나.
“한기태 작가님의 작가 인생에서 가장 영향력을 끼친 작품이라면 어떤 게 있을 까요?”
“영향을 끼친 작품 말입니까? 당연히 ‘그들만의 세상’ 이죠!! 작가 임형우씨는 제가 작가의 길을 걷게 한 저의 스승과도 같은 분입니다!! 언젠가 그런 소설을 쓰고 말겁니다...!!”
사실, 일본에서 세현과 같이 일을 할 당시 숱하게 들어왔던 기태의 이야기.
그 중에 단골 멘트였기에 아영은 질문과 동시에 어떤 대답이 나올지 이미 알고 있었다.
‘오케이, 걸려들었어...!’
“그럼... 요즘 세간에 화제가 되고 있는... 임형우씨의 아드님 사건에 대한 견해는 어떠신지요?”
순간, 감추려 했지만 뭔가 차갑게 굳어버린 기태의 얼굴. 크게 뜬 눈으로 아영을 바라보고 있던 동공은 지진이라도 난 듯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아영은 이 미묘한 변화조차 세심하게 관찰했다.
“죄송하지만... 그 질문은... 같이 하자고 하셨던 일과는 무관한 질문 같은데요...? 왜 그런 걸 물어보시는지...”
이미 아영의 낚시에 걸려든 기태.
이 역시도 아영이 예상해 두었던 몇 가지의 반응 중 하나였기에 막힘없는 대답이 이어졌다.
“아, 워낙에 큰 이슈이다 보니까... 작가 분들의 견해를 듣고자 하는 것뿐입니다. 말씀하셨다시피, 20세기, 21세기 한국 문학계에서 ‘그들만의 세상’이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크다보니, 작가 분들이 다양한 의견들을 가지고 계신데, 저희 출판사 측에서도 의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밝아질 수는 없는 기태의 표정.
그렇지만 출판사 측의 입장이 그렇다는 설명에는 납득을 할 수밖에 없던 모양인지, 방황하던 시선을 고정시키며 서서히 입을 떼었다.
“저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건이라고 봅니다. 노을 출판사가 거기와 경쟁사...맞지요?
뭐라 해도 그들만의 세상 출판사가 그 소설 덕분에 지금의 위치까지 왔다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겠죠? 본인들도 밝혔다시피...“
“가능성이 높다라면... 보도되었던 이야기가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하신다는 겁니까?”
“예, 물론 임형우 작가님 돌아가신 지는 20년이 가까워 오지만 인기는 여전하니, 출판사의 수익에는 여전히 보탬이 되고 있죠.
그렇다면 남은 가족들과 연계가 되어있을 가능성은 당연히 높은 거고, 그 아들이 작가로 데뷔를 한다면 당연히 밀어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처음에 아영에게 홀딱 반해 지었던 미소는 사라지고 마치 항변이라도 하듯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기태.
누가 이야기 만드는 작가 아니랄까봐 이렇게까지 논리적인 인과관계를 통해 지어낸 이야기라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에겐 충분히 구미가 당길 법 했다.
“그런데... 이런 큰 공모전을 열어 작가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처럼 일을 벌여놓고,
결국은 가족을 챙겨주는 꼴이니 작가로 살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화가 안 나는 게 이상한 거 아닐까요?”
너무도 논리 정연한 확실한 입장표명.
아영은 가만히 기태의 이야기를 듣다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했다.
“작가님은...특히 입장이 확고하신 모양이네요. 저희 출판사도 조금은 동조를 하고 있습니다만... 그런데 혹시... 그 당사자인 분하고 어떤 연관이 있으신가요?”
기태는 더 무거운 표정으로 아영을 올려보며 이야기했다.
“노을 출판사에서도 동조하시는 입장이라니 제 견해는 충분히 밝힌 것 같은데... 원래 목적으로 좀 넘어가도 될까요?”
확실히 뭔가 불편한 기색.
처음과는 다르게 과한 질문을 하는 듯한 아영을 의심하는 눈초리가 보이기도 했다.
“아, 죄송합니다. 작가님. 너무 말씀을 잘 하셔서 그만 넋 놓고 듣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사실 작가님의 소설 성향이 저희가 지금부터 진행하려는 프로젝트와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아 오늘 이렇게 뵙고자 한 겁니다.”
이제야 본격적인 일 이야기로 넘어 가는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에 기태는 민감하게 굳어졌던 표정을 미소로 전환하려 안면근육을 컨트롤했다.
“어떤 프로젝트...인가요?”
혹시나 하는 의심받는 상황을 대비해 야마다와 아영이 준비해 놓은 다음 작전 개시...!
“저희 출판사가 이번에 일본으로 진출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기존 작가 분들이 쓰신 기존 작품을 그들만의 세상 공모전 때 했던 것처럼 번역해서 말하자면 수출을 해볼까 하는 거죠.”
“아, 그런...!!”
“뭐 저희 출판사에 기존의 작품들도 좋겠지만, 기왕이면 다른 작가 분들께도 기회를 드리면 어떨까 하는 취지에서 알아보다가 기태 작가님을 발견하게 된 겁니다.”
잠깐의 의심을 가졌던 기태는 생각해보아도 제법 그럴 싸한 출판사의 해외진출 프로젝트라는 말에 조금씩 다시 신뢰를 되찾아 갔다.
표정으로 그런 변화를 인지한 아영은 그 신뢰의 쐐기를 박아버리기 위해 작전을 수행했다.
“자, 그래서 그 일본 프로젝트를 담당하실 일본 담당자분이 지금 함께 와 계십니다. 자, 이쪽으로 오세요...!"
http://m.novel.naver.com/challenge/list.nhn?novelId=628943&page=1#volume1
http://m.me.co.kr/?mode=cdetail&itemNo=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