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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too Jan 16. 2018

우연히, 그곳에서...<88화>

[ 제88화 _ 무서워... 도와줘... ]



“이건 처음...보는 사이트인데...?”

작업실의 전속 화가로 활동을 시작하고부터 사무를 볼 때 사용하던 사무실 컴퓨터는 켜보지 않았던 해인.

오래간 만에 점검을 위해 인터넷 방문기록을 열어봤던 해인은, 최근 누군가가 자주 들어갔던 것으로 보이는 낯선 사이트를 하나 발견했다.

그림들이 나열된 블로그 형식의, 포트폴리오와도 같아 보이는 사이트.

새로 추가한 그림 참고 사이트인가 싶어 해인은 빠르게 눈동자를 굴려가며 페이지를 훑어보았다. 

“어...? 이거... 카와모토씨 그림이잖아... 이건 안톤씨 그림... 혹시 지난번에 카와모토씨가 말했었던... 그건가...?"

계약된 갤러리에 출품하는 것에만 그치지 말고 새롭게 인터넷으로 판매 창구를 마련하자며 해인에게 합류를 요구하던 카와모토.

얘기가 나왔던 당시 공모전 수상자의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었으니 홍보가 될 수 있다는 해인을 중심으로 편성하겠다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었고 

그로 인해 다툼도 있었던 만큼, 없던 일이 되어 있는 줄 알았다.

“응!!??”

영어로 표기되어 있었기에 바로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페이지의 최상단에 버젓이 위치해 그림과 함께 게시된 큼지막한 폰트의 문구.

[ 그들만의 세상 공모전 본상 수상작 일러스트레이터 이해인의 그림 그룹 ]

자그마하게 표시된 홍보 문구 정도가 아니었다.

“이... 이게 지금...”

황당함에 말을 잃은 해인은 홈페이지를 샅샅이 뒤져보았다.

공모전 그림은 물론, 갤러리에 출품했던 그림들,
언제 몰래 찍어두기라도 한 듯, 자신의 연습장의 스케치들마저 버젓이 게시되어 있는 이 사이트.

해인은 온 몸에 살갗을 타고 올라올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소름은 곧 엄청난 크기의 분노로 변해 갔다.

카와모토 혼자만의 생각이었고, 당시에는 다른 화가들조차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의, 그저 아이디어 수준의 제안이었다.

‘ 이...자식이 지금... 그냥 내 의견 같은 건 무시하고 일 진행시켰다 이거지? 이렇게 대문짝 만하게  
내 이름을 전면에 올려놓았단 말이야...?'

다짜고짜 카와모토에게 사실관계를 확인하려 핸드폰을 연 해인.

확인하고 말 것도 없이 명명백백하게 벌어진 일. 사실 확인이라기 보단 추궁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아, 아니지...! 보나마나 나한테 들키지 않게 진행한 일 일 텐데, 무작정 따지려 들면 또 무슨 다른 짓거리를 생각해 뒀을 지 모르잖아...!'

해인은 카와모토가 일단 작업실에 제 발로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 직접 대면하기로 했다.

끓어오는 화를 진정시키려, 몇 번이고 숨을 크게 쉬어대며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 해인.

만나서 어떻게 할 지를 계속 떠올려 가며 꽤나 오랜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해인에게 발각된 것을 눈치 채기라도 한듯,
이날 따라 카와모토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솟아오르는 화를 잠시나마 눌러보려 그리던 그림 작업을 진행해 보기도 했지만, 전혀 집중이 되지 않는...

오히려 그리던 그림을 망치기만 하는 기분이라 해인은 그림에 손을 댈 수 없었다.

음악을 듣거나, 연습장에 다른 스케치를 해보며 시간을 때우는 수밖에.

혹시 언제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작업실에서 한 발자국도 떠나가지 못했다. 

천근만근 같은 시간... 
무언가 진행하지 않은 채 이 작업실을 혼자 지키고 앉아 있는 일은 곤욕이었다. 

다행히 힘들게 견디고 견디어 내어 시간은 이제 저녁 8시에 가까워 오고 있었다.

카와모토도 그렇지만 왜 다른 화가들마저도 이 시간까지 보이지 않는 건지, 분노를 넘어서 해인은 조금씩 공포감이 일기 시작했다.

늘 새벽 넘어서까지도 작업을 하던 화실이건만, 

유난히 어둡고 더러워 보이는 벽의 얼룩과 
교체 할 때가 다 되었는지 깜빡이다 이내 꺼져버린 형광등 탓에 어두침침해져 버린 분위기가 영 신경 쓰였다.

밤에 혼자 남겨진 것이 처음도 아닌데 왜인지, 세현이 없는 고독이 겹쳐졌기 때문일까.

"아이...저건 또 왜 하필 이럴 때 나가가지고..."

자기 암시를 걸고 괜한 혼잣말을 하며 형광등을 갈아보려 창고를 뒤진 해인.

그러나 늘 비품을 정리해두던 자그마한 창고에는 대체 형광등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하... 참 가지가지 한다...아주...!!"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 
해인은 화를 누르며 기다리는 동안 조금 전 자신의 분노의 감정을 이끌었던 홈페이지를 냉정하게 다시 분석해 보고자 했다.

페이지의 주소 역시도 수상자 일러스트레이터인 자신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들의 조합.

작업실의 화가들의 보지 못했던 그림들과 과거의 수상 내역 등, 꽤나 디테일 한 부분까지 기재되어 있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해인은 홈페이지에 기재되어 있는 판매 희망 연락처를 따로 적어두었다.

이것 역시도 분명 카와모토와 관련된 연락망일 테지만, 해인으로선 처음 보는 메일 주소.

[우당탕...!!!]

갑작스레 작업실의 낡은 문 열리는 소리가 정적을 깨고 요란하게 들려왔다.

"헉....!!!"

죄를 지은 것도 아니건만, 그 소리에 깜짝 놀라며 후다닥 컴퓨터 모니터를 끈 해인.

"으....으응 ?!"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 온 것은 카와모토였지만, 뭔가 이상했다. 휘청거리며 쓰러질듯 걸어오는 모양하며 풀린 눈, 붉게 달아올라 있는 얼굴 색...

"카...카와모토씨 술...드셨어요?"

"우푸푸...응??"

분명히 만취상태로 보이는 카와모토. 
몇 시간을 기다려 이렇게 마주하게 되었건만 이렇게 정신이 나가 보이는 지금 상태론...

"어, 어...?? 해... 해인씨예요?? 자...작업 중이셨나... 헤헤..."

얼마나 마시면 사람이 이 모양이 될까 싶다가도 막상 기다리던 카와모토를 마주하자, 이제까지 누르고 있던 분노가 터져버리고야 말았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라 먹혀들지 않을 거란 생각은 뒷전이었다. 

"술을... 잔뜩 드셔서 제정신 아니신 거 같아 얘기하기는 뭐 한데요... 이거 하나는 꼭 짚고 넘어가야 겠네요!!"

"예? 예...! 술...좀 마셨습니다...다른 화가 놈들하고 그냥... 가볍게 한 잔 한다는 게...그만..."

역시 무리였던 걸까. 
만취한 카와모토는 해인의 분노 가득한 뉘앙스와 표정의 경고를 전혀 읽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을 참고 있던 얘기가 자신의 입에서 터져 나오자마자, 해인 역시도 분개하며 카와모토에게 쏟아 붓기 시작했다.

"카와모토씨!! 아무리 술에 취해 있어도 지금 전 한마디 드려야겠어요!!"

한 번도 본 적 없는 해인의 역정에 카와모토는 취중에 호기심이 생기기라도 했는지, 

술에서 깨어보려 눈을 꿈뻑이며, 해인에게 집중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음...어... 해, 해인씨 뭐라고요..? 뭐라고 하는 겁니까?"

"왜...!! 저는 분명히 싫다고 한 걸로 알고 있는데, 
왜 일을 마음대로 진행 시키신 거죠?!! 저, 저 사이트는 뭐예요!!? 언제 만든 거예요!?"

해인은 꺼둔 모니터를 다시 켜며 카와모토에게 따지고 물었다.

 '뭐야...이건...' 하며 비틀 대며 다가와 모니터 화면에 뜬 싸이트를 확인한 카와모토. 

전혀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해인을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이...이게 왜요? 지...지난번에 한다고 말했잖아요..."

조금 전 까지만 해도 자기 몸 하나 못 가눌 정도로 휘청대더니, 사리분별이 가능한 상태이기는 한 건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답변을 해대는 카와모토의 모습에 해인으로선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아...아니!! 카와모토씨가 한다고 말했으면 그냥 밀어 붙여도 된다는 거예요?! 전 분명 못하겠다고 말 했잖아요?! 근데 이렇..."

볼륨을 높여 자기 입장을 이야기하던 해인은 어느덧 싸늘하게 식은 카와모토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하던 말을 중단했다.

술의 영향인지, 이제까지 의견차이로 다투거나 그런 적은 있어도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카와모토의 무섭도록 냉정한 표정.

해인은 잠깐 위축되었지만 이내 다시 정신은 붙잡고 이야기를 계속 했다.

"저는 못하겠다고, 어렵다고 말했는데, 이렇게 메인으로 저를 세워놓으면 어떻게 해요!? 
제가 분명히 지금은 곤란할 것 같다고 말씀..."

"あ、うるさいな!! まったく!!"

해인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카와모토는 심기가 불편한 듯, 자기 나라 말로 소리 질렀다.

당연히 일본말을 모르는 해인으로선 알아들을 길이 없었지만, 톤과 분위기만으로 어떤 느낌인지는 파악할 수 있었다. 

여기서 굴할 수는 없었다. 
뭐라 해도, 저 쪽에서 어떻게 나와도 지금은 명백히 자신이 억울함을 호소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저... 저는 분명히 그 때 곤란하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런데 이렇게 제 정보를 마음대로 사용하시면 어떻게 해요?! 정 해야겠다고 생각하셨다면 저를 빼고 하셨어야죠!! 

제 스케치들도 들어가 있던데 제가 제공한 적은 없으니 그건 저 몰래 찍으셨단 거 아닙니까?!"

여전히 싸늘하게 해인을 내리 깔아보던 카와모토는 해인에게 윽박질렀다.

"내가 하겠다고 얘기 했잖아! 이제까지 우리한테 받은 게 얼만데 그 정도도 허락 못해주는 거야?! 엉? 한국여자들 왜 이렇게 자기밖에 모르는 거야!?"

"뭐, 뭐라고요? 한국..."

"그래!! 너네 한국 여자들 말야!! 어디 센 척이나 하고... 받을 건 고스란히 다 받고, 정작 이쪽에서 필요로 할 땐 싹 빠지고... 얌체 같은 속성 그거 너희나라 국민성이냐!?"

말은 짧아지고, 언성은 높아져만 갔다.
맨 정신은 아니었겠지만, 아직까지도 본심으로서 이야기 하는 건지, 심한 주사로서 막말을 내뱉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는 카와모토의 작태. 

‘한국여자들’이라 칭하는 순간, 해인은 카와모토에게 피해를 입어 쫓고 있다던 아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지만 전혀 물러 설 타이밍이 아니었다. 
해인은 국민성까지 운운하며 모욕적인 말을 해대는 카와모토에게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받을 걸 고스란히 다 받다뇨!! 처음에 정당하게 일하면서 급여로 받은 돈에, 사정 얘기하면서 점점 적어지는 액수에도 제가 뭐라고 한 적 있었어요?! 

그리고 정식화가로 하자고 하셨을 때도 카와모토씨가 제안했던 거에 그냥 따랐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여기 작업실의 수장은 나야!! 같이 이용하고 있으면 내가 하자는 데로 따라줘야지! 다른 화가놈들도 그렇고 무슨 말들이 그렇게 많아!! 

내가 여기서 작업할 수 있는 기회 얻으려고 얼마나 개고생을 하고 다녔는지 다들, 알기나 해!?”

“그...그거야 모르죠!! 그걸 알고 여기 들어온 건 아니니까...!! 처음 여기 오게끔 제안했던 것도 카와모토씨잖아요!! 그리고 제가 언제 고맙지 않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건 지금 제가 화난 부분하고는 별개잖아요!! 이 사이트 문제 말이에요!! 분명히 제 입장 말했는데, 그것도 메인으로 저를 이용하시는 거예요!!?”

“에이...씨!!!”

카와모토는 작업 중이던 화가들의 이젤을 걷어차며 해인에게 점점 다가왔다.

[우당탕...!!]

“꺄아악!!”

“이봐, 이해인씨...! 뭔가를 받았으면 좀 베풀 생각을 해! 까놓고, 여기서 그림 그려 실력 늘은 덕에 그런 상도 받을 수 있었던 거 아니야? 

그럼 이 작업실 사람들한테 뭐라도 해줘야 되겠다는 생각 안 들어? 앙?!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당신 도와줬어?!”

[ 쾅, 쾅...!! ]

나란히 서있던 화가들의 이젤을 하나하나 걷어차며, 카와모토는 점점 해인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위협했다. 

이제 술김이라고 보기엔 너무나도 본심이 담긴 듯한 접근에 해인은 덜컥 겁이 났다. 

뒷걸음질 치다가 더 갈 곳 없는 코너에 몰리게 된 해인. 

“왜...왜 이러세요... 소리...지를 거예요...!”

“그래? 그럼 어디...”

해인의 코앞까지 다가온 카와모토, 손으로 벽을 쾅 내리치며 해인에게 소리 질렀다.

“질러봐!!! 어디 실컷 질러보라고!! 내가 뭘 했다고 지금 또 이렇게 피해자 코스프레 하는 거야!? 정말로 소리 지를 일 만들어 줘?!!”

분명 제정신이 아닌 듯... 
해인은 아직까지도 알지 못했지만 초창기에 술에 취해 해인에게 나쁜 짓을 하려했던 카와모토는 다시금 술기운을 빌어 해인에게 접근해 멱살을 쥐어댔다. 

작업실이 있는 외진 장소, 거기에 조금 더 확장시켜도 조용하기 그지없는 동네 아를. 
이곳에서 소리를 지르면 과연 누가 도와줄 수나 있을까.

“꺄아아아악!!!”

제발 누군가 듣고 잠깐 들어오기라도 해달라고... 

고개를 있는 힘껏 옆으로 피하며 멱살 잡은 카와모토의 손을 떼어 보려 안간힘을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해인은 이 순간, 지금 아를에 없는 세현이 너무도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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