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utoo Jan 19. 2018

우연히, 그곳에서...<89화>

[제89화 _ 터프한 천사의 손길 ]


‘임씨는 지금... 여기에 없잖아...’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해인의 멱살을 끌어당겨 점점 가까워오는 카와모토의 얼굴.

“너...너...!! 한국 여자들은 왜 다 이런 거야...!! 너네들이 그렇게 대단해!? 가까운 사람이 어렵다고 하면 좀 돕고 기다려 줄 수도 있는 거 아냐!?"

카와모토는 해인의 얼굴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얼음장 같이 차가운 손.

그 냉기에 해인은 겁을 먹어 이제는 비명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떨고 있었다.

술기운에 달아오른 얼굴과 충혈된 눈동자... 
이제 악마와도 같은 형상으로 보이기 시작한 카와모토.

자그마한 체구의 해인으로서는 이 이성을 상실한 듯한 남자의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

“왜...왜 이러세요...이러지 마세요...카와모토...씨...”

“그래...!! 이... 이렇게 된 거 될 데로 되라...!!”

카와모토는 분노를 넘어서 눈앞의 해인에게 본능에서 끓어오르는 행동을 해대기 시작했다. 

해인의 하얀 목덜미를 강하게 움켜쥐며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려는 순간.

[ 쿠콰콰쾅!! ]

요란한 폭발음과도 같은 소리를 내며 작업실의 출입문이 열어 젖혀졌다.

평소 출입 할 때마다 요란한 소리를 내던 시끄러운 문 소리가 이렇게까지 반가울 수 없었다.

누구... 다른 화가들인가?
카와모토랑 같이 술을 먹었다더니 혹시 같이 와서 행패를 부리겠다는 건가...?

이런 상황, 초반부터 늘 불안했다. 처음 이 작업실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모두 남자에, 자신 혼자가 여자인 환경, 모두 처음 보는 이들에 낯설기 그지 없었지만, 오로지 그림의 열정만으로 버텼건만...

혹시나 이들의 이성이 탈출해버리는 상황이 생겨버리기라도 한다면...




“야!! 너 지금 무슨 짓거리를 하는 거야!!”

[ 쿵!! ]

바로 앞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렸지만, 눈을 질끈 감고 있던 해인은 눈앞의 카와모토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잠시 후 힘겹게 눈을 떠보니 옆의 벽 쪽으로 내동댕이 쳐져있는 카와모토. 

쓰러진 카와모토는 다시 술 기운이 온몸에 퍼지기라도 한 듯, 혼자 중얼대고 바닥에서 뒹굴어 대며 일어나지 못했다.

그나마 이성이 남아있는 다른 화가들이 자신을 도와주러 온 것이 아닌가 하는...

희망어린 추측을 하며 해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어디서 본 듯한... 중년...남성...






“해인양? 괜찮아?! 다친 데 없어??”



살짝 흐려졌던 초점이 정상으로 돌아오자 해인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은 세현이 일하는 레스토랑의 사장 아저씨였다.

“세현씨 레스토랑...사...사장님 아니세요...?”

해인은 그제서야 마치 천군만마라도 얻은 듯 안심하며 온 몸에 힘이 쭉 빠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니긴 왜 아니야! 맞지... 당신 남자친구 고용주지...!! 자, 해인양...! 거기 계속 앉아 있을거야?! 그럴 거 아니면 얼른 일어나, 여기 나가자...!!”

옆으로 고꾸라져 있던 카와모토는 아직도 사경을 헤매는 듯, 정신을 못 가누며 가늘게 눈을 뜨고 해인을 향해 기어왔다.

“가...가긴 어딜 가....!! 해인....”

가게 사장 아저씨는 해인을 향해 기어오는 카와모토의 머리를 한 대 찰싹 때리며 옆에 있던 이젤들을 들어 내리치려 하였다.

“사...사장님...그러지 마세요...!! 참으세요...!!”

정신이 반쯤 나가있었던 해인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려, 카와모토에 제대로 본 때를 보여주려는 사장 아저씨를 말렸다.

“왜? 해인양? 해인양도 할래? 몽둥이 잘못 쓰려는 놈은 몽둥이로 맞아야지? 안 그래? 

자, 해인양은 이쪽 때려...! 하나 둘 셋 하면 공격 개시다...하나, 둘..."

“아, 아니요... 아니요!! 그냥... 같이 나가요...”

“그래?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얼른 나가자.”

뭔가 아쉬웠는지 누워서 꼼지락 대고 있는 카와모토를 가볍게 발로 걷어 차버리고 아저씨는 휘청대는 해인의 어깨를 부축해 작업실에서 나서려 했다.

“아, 해인양, 이제부턴 당연하겠지만... 여기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  그림 도구 같은 거, 개인 거 남아있으면 지금 다 챙겨가지고 나와...!”

“예? 아....예...”

정신없는 상황에 신경도 쓰지 못했던 부분까지 챙겨주는 아저씨의 말대로 남은 소지품을 주섬주섬 챙겨서 나온 해인. 

카와모토는 그 때까지도 바닥에서 뒹굴어대고 있었다. 쓰러진 이젤과 엎어진 물통에 뒤범벅이 되어 있는 채로.

해인은 동정조차 남아있지 않은 카와모토의 마지막 모습을 힐끔 바라보고는 고개를 돌려 외면한 채, 아저씨를 따라 나왔다.

불과 몇 분 안에 일어났던 사건. 

그렇지만 어마어마한 신변의 변화를 암시하는 사건을 겪어서 일까, 어떻게 알고 왔던 건지, 아저씨가 구해주기는 했지만 형체를 알 수 없는 공포는 온 몸을 휘감았다.

집 떠난 후, 느껴본 가장 큰 공포.
해인은 그야말로 사시나무 떨듯 온몸이 떨려왔다.

아저씨는 겉으로도 드러나 보이는 해인의 떨림을 확인 해 겉옷을 벗어 해인에게 입혀주며, 가볍게 등을 토닥여 주었다.

“에이고... 해인양... 많이 무서웠나 보다... 자 얼른 우리 레스토랑 가서 따뜻한 거라도 마시면서 진정 좀 하자...!! 

“예, 예... 고맙습니다... 사장님...”

“하핫, 세현이 놈도 나한테 사장님 소린 안하는데 사장님 소리 들으니까 우쭐해지기는 하는 구만... 허헛...!! 이맛에 사장 할려고 하는거지...!"

긴장을 풀어주려는 아저씨의 농담에 살며시 미소를 지어보이는 해인. 

아저씨와 해인은 금새 레스토랑에 도착해 안 쪽의 사무실로 향했다.

“헤이, 유! 여기 따뜻한 차 한 잔 만들어서 사무실로 좀 가지고 와줘.”

아저씨는 근무 중인 다른 직원에게 지시한 뒤 해인을 사무실의 소파에 앉혔다. 

잠시 후 직원이 가져다 준 따뜻한 차를 양손 가득한 컵에 받아들고 해인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근무 중이실텐데... 저 때문에...”

“음? 아냐, 아냐...!! 내가 사장인데 어때!? 나는 농땡이 좀 피워도 돼!! 유럽인들은 여유를 먹고 사는 거 알잖아? 이쯤 되면 해인양도 알 때가 됐는데 그런다...? 하핫!!”

따뜻한 곳에서 따뜻한 차가 몸속으로 들어가니 조금 진정이 된 모양인지, 해인은 아저씨에게 자초지종을 묻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사장님... 사장님 아니었으면 정말 큰 일 날 뻔 했어요... 근데 어떻게 아시고 작업실에 오신 거예요?”

“흠... 어떻게 필이 딱 와서 방문했지...!! ...라고 얘기하면 좀 멋있어 보이겠지만... 하핫, 사실은 세현이가 신신당부를 하고 갔어. 자기 없는 새에 해인이 좀 잘 봐달라고... 이런 저런 상황 설명해가면서... 

참나, 이런 좋은 사장이 어딨니...! 직원이 명령을 하는데 알겠습니다! 하면서 복종하는..."

“아... 그럼 좀 전에 작업실 오신 건...?”

“아? 그 카와모토란 자식 얘길 많이 들었거든, 세현이한테... 근데 좀 전에 우리 가게에서 술을 진탕 마시더라고, 그 양아치 놈들 다 모여서... 

아, 이 동네에선 그 화가 나부랭이들 양아치라고 불러...결국 그거 증명한 셈이지 뭐...!”

“아, 양아치... 화가 분들이 여기서 술을 마신 거군요...”

“그래, 하도 시끄러워서 요러고 엿들었더니, 여기서 마시고는 다른 놈들은 다 자기네 집에 간다는데, 그 놈만 유독 뭐 할 거 있다면서 작업실에 간다는 거야, 근데 다 모여 술 마시는데 해인양만 없는 게 이상해서 한번 따라가 본 거지 뭐...!”


잠깐 자리를 비우면서도 아군을 만들어 주고 간 건가...

해인은 새삼 세현이 듬직하게 느껴져 잔잔하게 미소지었다.

“그래, 얘기는 세현이한테 들어서 어느 정도 알고는 있는데...해인양 그림 그릴 데 어디 다른 데로 옮길 생각 하고 있었다면서... 정해진 데는 있어?”

본인 뿐 아니라 자신의 근황까지도 아저씨와 상담을 하는 듯한 세현 덕에 해인은 다른 설명도 필요 없이 거처 문제를 같이 이야기 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지역에서 오래 살았다던 레스토랑 사장 아저씨라면 뭔가 다른 정보를 제공해 줄지도 모를 일.

“음... 사실... 세현씨 기자회견 즈음해서 옮기자고... 얘기를 하긴 했었는데, 아직까지 정해진 게 전혀 없네요... 혹시... 아시는 그림 작업실 같은 데 없으세요?”

사장 아저씨는 차를 홀짝거리면서 가만히 해인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음... 해인양 아직 작업실 정해진 데가 없단 말이지?” 

뭔가, 중요한 정보나 다른 힌트가 나올 법한 아저씨의 말투에 해인은 기대감을 안고 아저씨의 다음 멘트를 기다렸다.

“흠... 이걸 말해야 될 지 잘 모르겠네... 사실...이 근처에... 작업실로 쓰던 공간이 하나 있긴 한데 말야...”

“이...근처요? 근처라면 어디 말인가요?? 작업실 사용하시는 분하고 잘 아시는 사이세요??”

뭔가 깊이 생각에 빠진 듯, 아저씨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깊이 한숨을 크게 내쉬어 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책상 쪽으로 다가가는 아저씨의 동선을 따라 시선이 같이 이동하는 해인.

아저씨는 사무실 책상 위에 놓인 자그마한 열쇠를 들어 잠기어 있던 그 책상의 가장 아래쪽 서랍을 열었다. 

해인이 앉은 위치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뭔가 달그락대며 서랍 깊이 파묻힌 무언가를 찾는 듯.

그 서랍을 열심히 뒤져 아저씨가 찾아낸 것은 또 다른 열쇠였다. 

큼지막하게, 뭔가 무척이나 오래되어 보이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열쇠. 얼마나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건지, 녹이 슬고 먼지가 덮여있었다. 
 
"후욱...! 아우... 완전 썩었네, 썩었어...!"

아저씨는 말없이 그 열쇠를 들고 사무실의 한쪽 벽에, 한 눈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하얀 공간 속에서 손바닥만 한 크기의 벽지를 뜯어내었다. 

뜯어낸 공간 속에서 드러난 열쇠구멍.
아저씨는 서랍에서 찾은 열쇠를 구멍 안에 넣고 돌렸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던 벽지에는 작은 해인도 겨우 들어갈 수 있을 만큼의 문이 드러났다. 

“후우...이 먼지 봐라...”

얼핏 보기에도 안에서 흩날리는 무수한 먼지.

아저씨는 손 부채질을 해대며 안쪽으로 열리는 그 문을 열고 성큼성큼 그 공간으로 들어갔다.  

무심하게 몇 발자국을 떼던 아저씨는 중간에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이고 다시 나와 

이 광경을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는 해인에게 손짓했다.

“뭐야? 해인양, 안 올 거야? 작업실 소개 해 달라며?!”

“예?? 아, 예, 예...!!!”


고개를 숙여야 겨우 진입할 수 있는 의문의 방.

마치 신비의 세계에 빠진 듯 전혀 예상치 못한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사무실의 안쪽이니 창고라도 비워주실 셈인가 싶어 해인은 말없이 따라 들어갔다.

문의 크기만큼이나 좁고 어두운 통로를 따라 들어갔다. 안쪽으로 들어갈 수록 퀴퀴한 냄새가 퍼지는 듯 했다. 

통로의 끝에 다다른 해인. 
놀랍게도 그곳에는 카와모토의 작업실의 절반 정도 크기의 작업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이젤과 붓, 각종 그림 도구 등이 정돈되어 있었다. 물론,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을 만큼의 먼지가 쌓인 채로. 

“와...여기는... 근처 정도가 아니라 이 건물 안에 붙어있는 거잖아요...!!”

해인은 동그란 눈으로 공간 안의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오래되어 물감은 굳어있고, 보이는 그림 도구들은 뭐 하나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변질되어 있기는 했지만, 뭔가 본격적인 그림 작업실로 사용했던 공간임에는 틀림이 없어보였다.

“보는 바와 같이... 여긴 한참동안 열어보지 않아서 사용 할 수 있을 지 없을 지도 모르겠는 공간이야...! 사정이 있어서 일부러 열지 않은 것도 있지만...”

가이드처럼 뭔가 이 공간에 대한 설명을 시작한 아저씨. 

해인은 이 작은 공간 속 그림쟁이의 정취에 흠뻑 빠져 아저씨의 말에 온전히 집중하지는 못했다.

“세현이 사정도 있고... 해인 양 그림에 솔직히 나도 좀 감명을 받은 바도 있고 해서 도와줄 수 있을까 생각이 들기도 했었는데, 마침 사정이 그렇다니... 어때? 이런 누추한 공간이라도 여기서 작업 할 수 있겠어?”

해인은 만면에 함박 미소를 지어보이며 아저씨를 붙잡고 매달렸다.

“정말요!!! 그럼요!!! 이런 공간이라면 얼마든지 좋은 그림 그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저 뭐든 시키시는 거 다 할게요...!! 여기 사용할 수 있게만 해주신다면...!!!”

“그래? 여기...사용하려면 청소 열심히 해야 할 텐데 괜찮겠어? 이거 몇 십년 묵은 먼지들이야, 청소하다가 막 마우스들이 공격하고 그럴 수도 있어...!! 스파이더들이 부락을 이루고 있을 수도 있다고...”

“입주할 사람 들어왔는데 강제 퇴출 시켜야죠!!! 그거라면 걱정 마세요...! 아저씨...!!”

“사장이라 부르더니 왜 또 아저씨가 됐어? 난 사장이 좋...”

“그럼, 저 여기 사용할 수 있는 거죠??!! 감사합니다...!!! 그럼...사용료 대신해서 여기서 일할 수 있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 

아저씨가 제공한다는 작업실 공개에 단번에 생기를 되찾은 해인. 

이곳 레스토랑에서의 급여를 이 공간의 사용료로 대신할 수 있게 해달라고 반짝이는 눈으로 아저씨에게 부탁했다.

“나, 참 우리 가게가 한국인 알바천국이니? 우리 가게 아주 채용기준 엄격해!! 뭐 할 줄 아는데?”

“서빙, 브런치, 레스토랑 신 메뉴 개발, 주방, 청소, 그리고...한국어?”

“...음...레스토랑에서 일하기엔...너무... 과한 스펙 아니니? ...합격...!"





http://m.novel.naver.com/challenge/list.nhn?novelId=628943&page=1#volume1


http://m.me.co.kr/?mode=cdetail&itemNo=206




매거진의 이전글 우연히, 그곳에서...<88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