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91화 _ 당신과 떨어지면 난 아무 것도... ]
"해인이가...이런 거 만드는 데 동참을 했을 것 같지는..."
잠깐의 의혹을 떠올리며 순식간에 머릿속에 스쳐간 자신이 알던 해인의 이미지.
"당연히 아니겠지...!!"
세현은 자연스레 이 불순한 운동을 주도했을 법한 이를 떠올릴 수 있었다.
스스로 발품을 팔며 자신의 손으로 직접 밝혀냈던 아영의 원수 카와모토.
제 버릇 개 못준다더니, 카와모토는 해인에게도 이런 심한 짓거리를 벌이고 있음이 분명했다.
한국 여자들을 얼마나 만만하게 봤으면 이렇게 연속으로 먹일 생각을 할 수 있는 건 지, 아니면 인성 자체가 그렇게 생겨먹은 종자인지...
언제부터인 지는 몰라도, 공모전 수상을 거론하며 메인으로 내세운 홈페이지를 개설했다는 건 아마도 얼마 지나지 않은 최근일 것.
세현은 전 날부터 해인과 연락이 되지 않았던 것과 자연스레 연관지어 초조함이 앞섰다.
파리 국제공항.
처음 이 곳에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공항에 내려 열차를 갈아타도 아를까지는 몇 시간이나 더 걸리는 거리였다.
이제 거리상으로는 한국보다 훨씬 가까워 져 연락을 받는 데에는 오히려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을, 해인은 아직까지도 메세지를 확인하지 않고 있었다.
'음...뭐야, 진짜 걱정되게 시리...'
내내 발을 동동 굴리며 도착한 아를 역.
시내까지는 역 앞의 정류장에서 다시 셔틀 버스를 기다려야 했다.
처음, 일본에서 시작해, 비행기 안을 거쳐 해인과 재회했었던 이곳. 따지고 보니 지갑 해프닝으로 카와모토를 처음 만난 곳도 이 장소였다.
그 놈과는 처음부터 엮이지 말았으면 좋았을 것을...
오래간만에 희비가 엇갈리는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역앞 버스 정류장. 세현은 당시 커피 한잔과 함께 시작되었던 이곳 아를 생활을 반추하며 벤치에 앉아 천금만금 같은 시간을 버텨갔다.
"해인아!! 해인아!!"
드디어 살던 지역까지 도착한 버스.
세현은 일단 집으로 내달려 창 너머 해인의 집 쪽에 대고 소리쳤다.
여전히 연락이 닿질 않으니 세현으로선 해인이 있을 만한 장소를 일일이 뒤져볼 수밖에.
당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했지만 낮 시간에 집에 있지는 않던 해인.
이제 남은 곳은 작업실뿐이다.
짐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쳐 버린 후, 세현은 해인의 작업실 쪽으로 무작정 내달렸다.
레스토랑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해인의 작업실...!
"응?? 임씨?!"
"엑??"
세현은 익숙한 목소리에 지나치던 레스토랑 쪽을 바라보았다.
"뭐야?! 임씨 왜 이렇게 금방 왔어?? 연락할 때 폰에 한국이라고 뜨기는 했었는데... 아예 안간 거 아니지?!"
"아...니...!! 해인이 너야말로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되는 거야!!?? 뭐야, 뭐 핸드폰 고장이라도 났어??"
"아? 아..."
해인은 급하게 레스토랑 사무실 안쪽, 새롭게 청소를 끝내놓은 작업실에 둔 자신의 핸드폰을 들고 나왔다.
"후...!! 전화며 메세지를 엄청 했네...!! 무슨..."
핸드폰에 쌓인 수십 건의 부재 중 통화, 메세지를 확인하며 중얼거리는 해인에게 달려들어 강하게 포옹하는 세현.
"너 !!! 뭐하느라고 핸드폰도 안보고 있었어!? 내가 얼마나 너 걱정한 줄 알아?!"
해인을 끌어안은 세현의 온몸에는 더욱 힘이 들어갔다.
"아야...왜? 무슨 일 있었어?"
와락 끌어안은 채 좀처럼 놓아 줄 생각을 하지 않는 세현의 팔을 잡으며 해인이 물었다.
막 도착해 정신이 없기도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무언가 의아한 생각이 들어 세현은 해인이 묻는 말에 대답도 않은 채 안고 있던 팔을 내리고는 해인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어?? 가만... 근데...너... 지금 여기서 뭐하는 거야??"
다시 보니 해인의 바지 위로 둘러져 있는 레스토랑의 앞치마.
세현은 할머니로부터 전해 들어 해인이 깜짝 놀랄만한 이야기를 해주려 급히 왔건만, 며칠 만에 생소한 풍경으로 바뀌어 버린 지금 상황에 오히려 더 의아함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너...그 앞치마...뭐야? 설마..."
"내가 사장이니까 내 마음이지!!"
마치 이산가족 상봉이나 한 듯이 부둥켜 안고 흔들어대는 두 사람의 모양새가 가소로웠는지 가게 아저씨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아...아저씨...!! 왜 저한테 말씀 안하셨어요!?"
"응? 뭘?? 해인양 여기 고용한 거?? 내가 명색이 사장인데, 직원 고용할 때 다른 부하 직원한테 허락 맡아야 되냐!?"
"아뇨...!! 그거 말고...아저씨가 저희 아버지 소설의 삽화가였다는 거 말이에요!!!"
해인에게 먼저 전해주고 싶었건만, 당사자가 모두 모인 기회에 자연스레 확인해 볼 수 있게 된 어마어마한 사실.
그런데...? 이상하게 해인이 별로 놀라지 않는다.
아저씨의 덤덤한 표정과 함께 더 궁금한, 무언가 멍해 보이기까지 한 해인의 모습.
세현은 아저씨의 대답을 기다리면서도 해인의 눈치를 살폈다.
못 들었나...
"할머니가... 아버지 소설 [그들만의 소설] 삽화를 그리신 분이 아저씨라고 하시던데요...!!"
세현은 해인이 들으라는 듯 다시 한 번 또박또박 강조하며 아저씨에게 외쳤다.
"음? 뭐 워낙에 오래된 얘기라서...굳이 얘길 해야 되나 싶은 것도 있었고..."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답변을 시작하는 아저씨.
"아, 아저씨 자... 잠깐만요...!"
세현은 이야기를 꺼내려는 아저씨를 가로막고 멍한 표정으로 서 있던 해인의 어깨를 잡으며 이야기 했다.
"해인이 너... 왜 안 놀라?? 아저씨가 너 그렇게 좋아하던 삽화 화가였다니까...!!"
해인은 자신의 어깨를 잡은 세현의 손을 잡고 살며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 그것 때문에...졸도할 정도로 놀랐어서 이제 겨우 진정하고 있는 상태거든...? 다시 강조하면 나 진짜 기절할 지도 몰라...!!"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어 이야기를 먼저 전해 들은 모양이구나... 해인은 그야말로 초능력을 발휘해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버티고 있는 중인 듯 했다.
세현은 다시 사건의 중심, 아저씨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저씨, 뭐 하나... 여쭤볼게요...! 그럼 아버지 돌아가시고부터 완전히 그림에서 손 놓으신 거예요?"
가게 아저씨는 새삼스럽다는 표정으로 세현을 바라보았다.
"흥, 뭐 너한테 할 말은 아니다만... 그 놈 때문이라고 하자니 좀 이상하다, 야...! 무슨 열렬히 사랑하던 연인을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뭐 이래저래 사정이 있기도 했고..."
“저는... 당시에 워낙에 아버지한테 무심했으니 소설이 유명해지고, 같이 작업했던 일러스트레이터분이 얼마나 유명해 졌었는지 잘 모르지만...”
“제가...내가 알아요!!”
잠시 멍을 잡고 있던 해인이 아저씨와 세현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독자입장에서 ‘그들만의 세상’ 소설 같은 경우... 나오자마자 터졌던 소설이 아니었잖아. 차츰차츰 입소문을 탔지. 그렇게 처음에는 서서히 퍼지기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무서운 속도로 뻗어갔어. 이 나라 저 나라...로 퍼져 나가면서... 그리고 그 때는 삽화가 한 몫을 했었어요. 저도 물론 소문의 일러스트레이터를 먼저 접하고 소설을 봤던 케이스니까요...!”
세현한테 이야기를 하는 건지, 아저씨한테 이야기를 확인 받고 싶은 건지,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가며 자신이 아는 정보를 쏟아내는 해인.
아저씨는 뭔가 뿌듯한 표정으로 세현과 해인이 자신의 과거 업적에 대해 이야기 하는 상황을 즐기는 듯 했다.
“제가 알기로는... 굉장히 많은 작가나 업체들로부터 협업 제의가 있었다고 들었어요. 이필립 화백님...”
해인은 늘 아저씨, 사장님으로 지칭하던 이 위대한 화가 옆에 있음이 새삼 영광스럽다는 표정으로 아저씨를 바라보며 이야기 했다.
“나도 뭐...”
계속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까지 유명해 질 줄은 몰랐지...! 돈 방석에 앉나 싶더라고...! 사실 욕심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형우 그 놈도 이렇게까지 크게 성공할 줄은 몰라서 좀 당황했었어. 같이 하자고 해서 얼떨결에 매달려서 작업한 것도 있지만...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오기였거든. ‘기왕 시작한 거...’ 하면서...!!”
처음으로 듣는 아버지와 아저씨와의 해프닝들. 해인과 세현은 입을 꼭 다문 채 이야기를 경청했다.
“몇 년간은... 누리고 살아보자 그랬지... 서로 오랫동안 고생했는데 그 보상이 아니겠냐며... 나도 뭐 이래저래 일이 많이 들어와서 해보기도 했었고. 근데 형우 놈은 점점 뭐랄까... 먼저 간 아내... 그러니까 세현이 네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게 생긴다면서 침울해 하더라고...
나도 뭐 창작을 해봤던 사람이니까 그 마음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근데... 점점 더 어두워졌어... 뭐 원작자가 그러니 나한테도 영향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었지...”
세현이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소설은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지만, 고등학교로 이어지던 시점에 돌아가셨던 세현의 아버지.
그 전까지는 소설의 집필 때문이었는지, 늘 가족에 무심했던 아버지에게 증오에 가까운 감정까지도 가진 세현이었다.
아무도 이런 아버지의 뒷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기에 아저씨의 이야기는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들뿐이었다.
“사실...네 아버지가 어쩌다 저 세상 가게 됐는지는 나도 잘 몰라... 그냥 추측만 하는 거지... 하도 어두운 기운으로 있어서 좀 떨어져 있던 시기였거든. 세상 사람들은 이해를 못하지... 그렇게 큰 성공을 했는데 뭘 그렇게 혼자 어둠 속에 갇혀 사느냐고..."
“그럼...아저씨는 아버지와 떨어져 지내시면서 따로 일은 안하셨어요?”
“아까 말했지만... 소설이 뜨고 여기저기서 일이 들어왔다고 했었잖니, 그 때는 그 일들을 좀 하기도 했었어. 근데, 뭐 너네들도 이제 어디 나가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하고 일 해보면 알겠지만, 전혀 즐겁지 않았지. 그냥 돈 내고 결과물만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거든. 특히 삽화 작업 같은 경우,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해 내야하는 거니까 2차적인 해석이 중요한 거야. 작가와 교감이 되지 않으면 싸울 수밖에 없다고.”
“그럼 임형우 작가님하고는 죽이 잘 맞으셨었나 보네요?”
세현과 해인은 길게 설명을 시작한 아저씨에게 번갈아 질문을 하며 궁금함을 해소해 갔다.
“맞긴 뭘 맞니? 아주 죽으라고 싸우고 고치고 삐지고... 그랬지...!! 그래도... 친구에 원작자니까,
서로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고 싶은 욕심뿐이었어. 돈 같은 건 신경도 안 썼다고. 말하자면, 다른 사심이 없었다고 해야 하나...”
“그럼... 돌아가시고 난 후에 그림을 안 그리시게 된 건...”
세현은 이제야 조금 사정을 알게 되었다는 투로 아저씨에게 되물었다.
“까놓고, 그 소설 덕에 나도 돈 많이 벌기도 했어. 그래서... 지금 이런 레스토랑 같은 거 차릴 수 있었던 거고... 일을 더하면 더 많이 벌수도 있었겠지... 근데, 그 놈 그렇게 가버리니까... 더 이상 즐겁지가 않더라고, 작업이... 그 놈도 살아 있었으면 한창 글 쓸 나이인데...”
친구의 아들과, 자신을 존경한다는 그림 후배 앞에서 지금의 자신의 위치를 모두 설명하고나니 뭔가 쑥스러운 생각이라도 들었는지, 다 말해놓고는 시선을 떨구는 아저씨.
세현은 그런 아저씨를 보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저는... 글을 쓰려는 사람이고, 그러니까 아저씨나 해인이처럼 그림 그리는 것에 대한 만족도나 보람 이런 것에 대한 건 잘 몰라요.”
아저씨는 세현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짐작이 가지 않는 다는 듯 요상한 표정으로 세현을 쳐다보았다.
“근데... 이거 하나는 명확한 것 같아요.”
해인 역시도 세현이 지금 이 상황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지 전혀 짐작을 할 수 없었다.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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