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92화 _ 익숙한 설레임, 이제부터 시작 ]
“이것 하나는... 명확한 것 같아요, 아저씨...!”
자신의 과거에 대해 한창 이야기를 하던 아저씨에게, 뭔가 확신 가득한 표정으로 말을 꺼낸 세현.
“임씨... 뭐가... 명확하다는 거야??”
옆에 있던 해인도 호기심이 생긴 듯, 세현의 대답을 기다렸다.
“해인이 보면서 느낀 것도 있는데, 그림 그리는 사람들은 그런 게 있는 것 같아요, 아저씨. 어느 정도 표현력이 있는 사람이, 뭔가 자극을 받는 다른 그림을 보면 자신도 구현해보고 싶은 욕심 같은 거...”
“욕심? 정확하게... 뭐라 말하긴 그렇지만 그런 게 있기는 하지...”
“제 소설에 해인이 그림 같이 출품할 때 아저씨 먼저 보여드렸잖아요? 그때 그림 딱 보시고서는 그러셨어요. 그림이 너무 글에 딱 맞는 느낌이라 좋다고. 그리고 그 이후로 아저씨 해인이 그림 얘기 엄청 많이 하신 거 기억나세요?”
“어? 내가... 그랬나...”
“그림취향이 있으시다거나, 처음엔 그런 말씀도 그저 장난처럼 하시는 건 줄 알았어요. 근데... 그 사실 알고나서, 이제까지 하셨던 말씀까지 쭉 떠올려보니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뭐...뭐가?”
들키지 말아야 할 내용을 들켜버리기라도 한 듯 아저씨는 당황하며 세현에게 되물었다.
“아저씨... 그림 다시 그리고 싶으신 거죠?"
해인 역시 세현의 말에 눈이 동그래지며 아저씨를 빤히 쳐다보았다.
해인과 세현 양쪽을 번갈아 바라보며 뭔가를 생각하는 듯 마른 침을 삼키고는, 입술을 꼭 다문 표정을 하는 아저씨.
“에...에이!! 무...무슨 소리야!! 그림이란 건 한 달만 손 놔도 감각이 확 떨어지는 거야!! 난 지금 놓은 지 20년이 넘었는데, 무슨...”
“그럼, 반대로 감각이 뛰어났던 사람이라면, 한 달 정도로 감각을 다시 찾을 수 있다는 말 아닌가요?”
“무슨...!!”
아저씨는 몰래한 잘못을 들켜버린 어린 아이마냥 얼굴을 붉히며, 이제껏 한번도 보여 준 적 없는 당황한 표정을 드러냈다.
기대에 찬 눈빛을 마구 뿜어대며 아저씨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해인.
세현은 그런 해인의 눈빛을 슬쩍 확인하고는, 순간적으로 뭔가를 생각해 내어 아저씨에게 말했다.
“다시 바로 그림 그리시는 게 좀 어색하시다면...!! 제가 다른 쪽으로 부탁하나 해도 될까요? 아저씨...?”
“엥? 한국 다녀오더니 거기서 무슨...무당이라도 만나고 왔어? 왜 이렇게 갑자기 쭉쭉 치고 들어와? 또 무슨 부탁인데...!?"
세현은 옆에 얌전히 서있던 해인의 양 어깨를 잡고는, 아저씨 앞으로 들이밀며 이야기 했다.
“이 아가씨 말이에요!! 정식으로 그림 가르쳐 주실 수 있겠어요!?"
“꺅!!”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괴성을 내뱉은 해인.
꿈에 그리던 대상이 지금 눈앞에 있다는 것조차도 놀라운 마당에, 무려 그림 지도 의뢰라니...!
"아, 이...임씨 아무리 그래도 그건..."
이미 외마디의 괴성에서 본심이 드러났건만,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 세현에게 억지로 부정의 제스처를 취해보는 해인.
그러면서도 아직 대답이 없는 아저씨의 눈치를 계속해서 살폈다.
아저씨 역시 세현의 말에 뭔가 깊은 고민에 빠진 듯 말없이 해인을 바라보았다.
"음..."
사실, 아저씨의 배려로 사무실 안쪽 작업실을 사용할 수 있게 된 해인은 세현보다 먼저 이 사실을 접했었다.
청소 중 발견한 일러스트의 출처를 확인하려 그림을 들고 왔다가 아저씨에게 들어버리고 만 충격적인 진실.
"아... 사실 사장님이 나 쓰라고 사무실 안쪽에 있는 작업실도 빌려주셨어...! 그래서 나도 고마운 마음에 여기서 일 시작 한거고...근데 여기서 다른 부탁을 또 드리면..."
세현의 부탁과 아저씨의 고민... 꿈에도 그려왔던 일의 성사여부를 앞두고, 해인은 그저 뻔한 사실관계만을 웅얼거릴 뿐이었다.
아저씨는 세현의 제안에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해, 입가 쪽을 손으로 만지작대며 고민 중이었다.
세현 역시도 아무렇지도 않게 긍정의 답이 나오기만을 기대하며 아저씨만을 지그시 응시했다.
“지도라... 누구를 가르쳐보거나 그런 적은 없는데..."
혼잣말로 중얼대던 아저씨는 꽤나 오랜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나도 감이 완전 옛날 같진 않으니, 당장... 그림 지도까지는 그렇더라도... 해인양 그림 그리면 옆에서 조언 정도는 해줄 수 있을 지도...”
'그들만의 세상' 의 일러스트를 동경했고, 세현과 비슷하게, 그림을 시작하게 된다면 그 배경이 되었던 공간에서 시작해보려는 욕심에 무작정 이곳을 찾아왔다던 해인.
당연히 '그들만의 세상' 이후 자취를 감춘 일러스트 원작자를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고, 더군다나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것을 아직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그런데 무려 당사자에게 그림 지도라니... 상상에서 조차 그려본 적 없던 장면이었다.
세현은 가만히 해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눈을 마주쳐 찡긋 윙크를 하며 미소 지었다.
말없이 지어보이는 세현의 온화한 미소. 해인은 그 미소를 접하고 나서야 이 꿈같은 상황이 바로 자신의 앞에 펼쳐진 현실임을 깨달았다
멍했던 해인의 표정은 서서히 미소로 바뀌어 갔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자신의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음 인지, 손으로 얼굴을 가린 해인.
"아저씨도 해인이 그림 마음에 들어 하셨으니까 해인이, 제자로 받아들여질 자격은 충분한 거 맞죠??"
세현은 언제부터 이 기획을 짜기 시작한 것일지, 예정대로 진행되는 상황을 확인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서...선생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 선생님 너무 너무 팬이에요...!!! 한 수 배울 수 있다면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제서야 용기가 난 건 지, 비로소 진심을 드러내는 해인. 절실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아저씨에게 예를 표했다.
"아...나 이거 팔자에도 없는...!! 그런데 해인양, 내가...저번에도 말했지만..."
해인은 아저씨의 입에서 혹여나 부정의 표현이 들려올까 노심초사하며 절실함을 담은 눈빛을 보냈다.
아저씨는 다소 거만한 표정으로 바뀌어 옆 구조물에 걸터앉으며 이야기 했다.
"선생님 말고, 사장님이라고 불러! 난 그 소리가 더 듣기 좋아...!!"
"예? 아!! 예!! 사장님!!! 그럼 저 제자로 받아주시는 거예요...!!!?"
"에이, 멋있게 환상 속 위인으로 남는 게 나았을 텐데...선생이랍시고 그림 한번 그렸다가 개무시를 당할 지도 모르는데 지금이면... 나, 분명히 말했다, 그림 놓은 지 20년 됐다고...! 놀리기만 해봐, 바로 관둘 테니...!"
“놀리긴 어떻게 제가 감히 이필립 화... 아니, 사장님을 놀려요...! 자...잘 부탁드릴게요...!!”
해인은 고마운 마음에 아저씨가 안 보이는 사각에서 세현의 손을 꽉 붙잡았다.
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초롱초롱대는 눈망울에서 감정은 고스란히 전달되어졌다.
이곳에 돌아오자마자 사실 확인을 위해 이래저래 정신이 없던 세현은 그제야 가장 궁금하던 부분이 잘 마무리되었음을 확인하고 카페 테이블에 앉았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어느덧 레스토랑 직원처럼 이쪽저쪽으로 음식을 나르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해인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밝은 표정이었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그 얘기를 꺼내, 말아...?’
며칠 새에 발생했던 많은 일들로 어떤 것이 우선 일지 몰라 한바탕 떠들고 난 후였지만, 세현은 오는 비행기 안에서 보았던 해인 작업실 관련 사이트가 영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아저씨가 허락했다고는 하지만, 늘 작업실에서 그림만 그리던 해인이 왜 지금은 레스토랑에서 자신과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건지...
마침 자신의 테이블 앞으로 지나가는 해인을 붙잡아 세현이 물었다.
“해인아, 근데... 너 왜 여기서 일하고 있는 거야? 작업실은? 카와모토는??”
“아? 맞다 사장님 얘기하느라고 그 얘길 까맣게 잊고 있었네...!! 내가 참 기도 안 차서...!!”
근무 중 세현이 앉은 테이블 앞에 멈추어 서서 자신의 억울함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으려는 해인. 아저씨는 그런 해인을 알아보고 다가왔다.
“해인양? 저기, 저 4번 테이블에 주문 받아야지?”
“예? 아, 예...예!!”
샛길로 새려는 해인을 다시 근무에 투입시킨 후 세현의 옆자리에 앉은 아저씨.
“자...! 내가 얘기해 주마. 해인 양한테 이제까지 들은 것도 있고...!! 내가 관여된 부분도 있고 하니까...!!”
“네? 아저씨가요?”
아저씨는 홈페이지를 계기로 생긴 해인 작업실의 트러블과 조금 전 카와모토와의 실랑이 건까지 세현에게 모두 말해 주었다.
“뭐...뭐라구요!? 카와모토 그 자식이 우리 해인이를 어떻게 하려고 했다고요!!?? 더군다나 결국 그 홈페이지도 자기 멋대로 만들었단 거잖아요?! 내가 이 자식을 그냥...!!!”
“쉿, 진정하고... 이제 해인양은 그 작업실 못가니까, 일단 그쪽하고 이제 다시는 연관되지 않게끔 해. 그 때 그 자식 완전 꽐라가 되어있었다니까...! 아무튼 어떻게든 그쪽하고는 일단락을 지어야 해...!”
“그거야!! 당연하죠!! 이 자식 내가 가만두나 보...”
그 때.
“실례합니다.”
카와모토였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나타난다더니... 아저씨에게 이야기를 들은 직후, 바로 보이는 카와모토의 얼굴에 세현은 분노에 이글대는 눈빛으로 성큼 성큼 다가가려 했다.
“너...”
“세현아, 잠깐만...!”
아저씨는 세현을 막아섰다.
“왜...?! 왜 그러세요. 아저씨... 저런 놈은 아주 죽여 버려야 해요!!”
카와모토는 사건이 있은 다음 날이나 되어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려 해인을 찾아다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이 레스토랑에서 일하기 시작한 해인을 찾아 온 모양이었다.
“오히려 잘 된 거야. 세현아, 지금은 저 자식 맨 정신인 모양이니까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해인양하고 완전하게 일단락을 지을 수 있게끔 옆에서 서포트 해.”
성큼 성큼 해인의 앞으로 와 눈을 마주치고야 만 카와모토. 해인은 움찔 놀라며, 전 날의 악몽이 되살아나 조금은 위축된 모습이었다.
“뭐...뭐예요? 카와모토씨... 전 이제 당신들하고 작업 같이 할 수 없어요. 돌아가 주세요.”
카와모토는 절실한 눈빛으로 90도 각도로 머리를 숙이며 해인에게 사과를 하기 시작했다.
“해인씨. 정말 미안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그 날 술을 너무 먹어서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돌아와 주세요!!!”
의외로 꼬리를 내리깔고 접근하는 카와모토.
얼마나 절실하면 이럴까 싶다가도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카와모토에게 남아있는 감정은 오직 증오 뿐이었다.
해인은 가만히 카와모토를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요, 백번 양보해서그 날은 술 때문에 그랬다고 치고요, 그럼, 홈페이지는 어떻게 설명하실 거예요? 제가 예전에 분명, 남자친구도 지금 어려운 상황이라고, 그 남자친구랑 같이 했던 수상을 홍보로 사용하기는 어렵다고 말씀드렸었잖아요? 그런데 버젓이 그 내용이 메인으로 들어가 있는 사이트는 어떻게 설명할 거냐고요!!?”
카와모토는 해인과 눈을 마주하지 못한 채 숙이고 있는 고개로 땅만을 쳐다보며 변명을 해댔다.
“홈페이지... 메인 역시 허락도 받지 않고 사용해서 미안합니다. 해인씨가 그렇게 말을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가장 화제가 되어있는 지금 시기가 홍보에 적기라고... 혼자 판단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물론 양심상 해인씨가 남자친구한테 미안해 한다는 건 이해합니다만...”
“그런데 맘대로 만들어 공개해 버린다는 건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니죠!! 남자친구가 지금 얼마나 힘든데, 여자 친구라고 하는 사람이 힘은 못되어줄망정, 남친 팔아 자기 그림이나 팔아먹는다고 생각 안 들겠어요? 저는 그럴 생각 추어도 없다고요!!”
“해인씨...그러면 조금 메인 문구를 바꿔보면...”
“이것 봐요!! 전혀 반성한 게 아니잖아요...! 다 됐으니까 당장 홈페이지 내려 주세요!! 그리고, 말했지만 저 이제 거기서 작업할 수 없어요...!!”
단호한 모습의 해인.
잠깐의 의심이었지만, 세현은 여자 친구인 해인이 자신을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바로 앞에서 확인하고 옆에서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아저씨의 말대로 가만히 대기하며 상황을 지켜보던 세현은 슬슬 자신이 나설 때라는 판단에 몸을 일으켜 카와모토 쪽으로 이동했다.
“어이, 카와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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