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93화 _ 네 환상 속 행복은 여기까지야. ]
“어이! 카와모토!!”
아저씨의 말을 따라 가만히 옆에서 해인과 카와모토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고가는 지 지켜보던 세현.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되어 이제는 나서도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서서히 일어나 해인에게 간청 중인 카와모토의 곁으로 다가갔다.
주변을 신경쓸 겨를이 없던 카와모토는 예상치 못한 세현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
“너...너... 한...국에 갔다고 들었는데...”
카와모토의 정면으로 다가와 가깝게 얼굴을 마주한 세현은 분노 가득한 얼굴로 카와모토를 노려보며 말했다.
“한국에 갔으면? 내가 한국에 가 있는 동안 해인이 한테 어떻게 할 생각이었는데? 이거 아주 상습범이군...지난 번 일, 기억안나냐...?!"
세현은 카와모토 앞에 서 있던 해인의 손을 잡아 자신의 옆으로 끌어 당겼다. 아무 말 없이 세현을 따르는 해인.
“분명히 말해둔다...! 내가 너 그런 놈인 거 알고도 해인이를 거기에 계속 있게 했던 건, 다 해인이를 위한 거였어...! 그래도 배울 게 있는 공간이라고 판단했는데, 그게 아니란 걸 지금 네놈 입으로 증명시켜 준 거다."
조금 전 해인의 대화로, 모든 상황을 스스로 밝혀버리고 만 직 후인지라 카와모토는 세현에게 다른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다.
“그... 그래도 이제까지 우리 작업실에 와서 해인씨 손해 보는 일은 없었잖아!! 그림도 더 늘었고...아...앞으로도 더 나아질 수 있단 말이다!!”
“작업실 잔류를 부탁하는 멘트 치곤 너무 진부한데, 아닌 말로 너, 이필립씨보다 더 해인이 잘 지도할 자신 있냐?!”
“이...필립...? 이...일러스트레이터 이필립 말이냐? 갑자기 무슨... 그 양반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
몇 십년이나 자취를 감춘 사람이 갑자기 왜 지금 비교대상이 되는데?! 어디있는 지도 모르는데 다..당연히 바로 옆에서 지도할 수 있는 내가 더 낫지!!”
일부러 아저씨의 이름을 거론하며 도발한 세현은 조금 전까지 자신과 같은 자리에 앉아있던 아저씨 쪽으로 고개를 돌려 아저씨의 반응을 살폈다.
뭔가 화가 잔뜩 난듯한 아저씨는 씩씩대며 일어나 카와모토 쪽으로 다가왔다.
“와, 나...진짜!! 가만있는 사람 왜 끌어들여?!
열라 자존심 상하네... 그림 그린답시고 양아치 짓거리나 하고 다니는 자식하고 비교당하는 것도 짜증나는데...!!?”
아저씨는 카와모토에게 호통쳤다.
“야! 나 이제 너한테 술 안 팔아!! 얼른 꺼져!! 뭐? 몇 십 년동안 자취를 감춘 양반? 피 끓는다...!! 이 자식 정말...”
“사...사장님, 무슨...”
해인, 세현, 그리고 전혀 짐작도 하지 못했던 레스토랑 사장에게까지 호통을 들어 당황한 카와모토.
무슨 상황인지 전혀 영문을 알지 못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황당할 따름이었다.
기세를 타고 이 기회에 카와모토와의 모든 연을 끊고자 해인은 세현의 뒤에다 대고 자그마하게 속삭였다.
[ 임씨, 그 홈페이지도 폐쇄해 달라고 해줘. 아니면 나라도 빼달라고 좀... ]
[ 응, 잠깐만...]
아직도 분을 삭이지 못해 카와모토에게 호통을 치고 있는 아저씨를 힘겹게 말리며 세현은 카와모토에게 말했다.
“자, 분명히 해두겠는데, 이제 해인이는 너희 작업실과는 무관한 사람이야...괜히 용쓰지 말고 어서 돌아가...!!”
해인만 잘 설득하면 다시 작업실로 복귀시킬 수 있을 거라 예상하고 레스토랑까지 직접 찾아왔던 카와모토.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같이 있던 남자친구인 세현과, 왜 그러는 지 모를 사장 아저씨의 공격에 일단 후퇴를 결정해야만 했다.
예상치 못한 이곳의 팀플레이에 무방비하게 당하기만 한 것이 자존심 상했던 건지, 괜히 레스토랑 문을 격하게 닫으며 카와모토는 작업실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레스토랑에 남은 세 사람.
갑작스레 벌어진 격한 사건이 마무리되어 피로가 쌓인 탓인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만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임씨, 홈페이지 얘기는 왜 안했어?? 직접 뭐라고 쏴주지 않으면 계속 그대로 둘 것 같은데... "
“음, 그럴 지도... 근데 내가 뭐 하나 아쉬운 게 있어서 말야...!"
“뭔데...?”
세현은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해인에게 말없이 싱긋 미소 지었다.
조금 전 카와모토와의 설전 중, 자신을 위한 항변을 펼치던 해인이 대견했는지, 세현은 다른 대답없이 해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런 게 있어요!! 이해인씨..!!"
“여기, 주문이요!!”
“아, 예...! 갑니다!!”
카와모토와의 해프닝 후 해인은 레스토랑 손님의 호출에 자연스레 다시 레스토랑의 서빙업무로 복귀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세현과 아저씨는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얘기를 나누었다.
“그나저나 저 정말 놀랐어요... 아저씨... 그냥 아버지 친구인 줄만 알고 있었는데, '그들만의 세상' 작업을 같이 하신 팀이셨단 거잖아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전혀 다른 일 안하셨다는 것도 놀랍고...”
“흠, 할머님이 말씀하신 모양이구나... 참내...”
“아무튼... 앞으로 우리 해인이 잘 좀 부탁드릴게요...!”
“에효... 이게 뭔 일이래... 너무 부담주지 마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되겠니... 요놈 아주, 지 애비 닮아 사람은 참 잘 낚아요...”
"헤헤..!"
세현이 아를을 떠나 있은 지 단 이틀.
표면적으로 달라진 건 없지만, 이제서야 알게 된 진실들에 이곳 구성원들의 호칭과 관계는 큰 변화를 맞이했다.
***
'그래, 여기서 인정 받고 그 다음은 차차 올라가면 되는거지...!'
아영과 야마다의 복식 사기조에 홀딱 속아 넘어가 온 세상을 다 얻은 듯한 행복에 빠져있던 기태.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연락을 준다고 했으니, 이제부터는 오로지 행복한 기다림 뿐 이었다.
'기존 작품을 조금 손 보시면서 트렌드에 맞게 문체를 좀 바꾸어 주십시오.'
라는 미션을 받았던 기태는 오로지 기쁨 충만한 기운으로, 무려 노을 출판사에서 선택받은 소설을 오래간만에 손 보는 중이었다.
뿌듯함을 견디지 못해서 였는 지, 기태는 글을 고치는 중간 중간 몇번이고 노을 출판사 관계자라고 밝혔던 두 사람의 명함을 확인하였다.
싱글벙글...자기도 모르게 만면에 번져가는 미소도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부르르르르]
"어?? 뭐지? 벌써...?"
오매불망 노을 출판사 관계자라던 여자의 전화만을 기다리고 있던 기태는 어디선가 걸려온 전화를 신호음이 채 한번이 울리기도 전에 집어들어 확인하였다.
기대와는 달리 처음보는 번호.
'뭐야... 아, 혹시 출판사 사무실...전화인가...?'
"여보세요?"
"예, 한기태씨 되십니까?"
"예, 접니다만, 누구시죠?"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것은, 어디서 들어본 듯도 하면서도 낯선, 여성의 목소리였다.
전화를 걸어온 여성은 정체를 묻는 기태의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기태에게 되물었다.
"왜 그랬습니까?"
"에??"
"있지도 않은 사실 허위유포하는 죄가 얼마나 큰 지 모르는 모양인데..."
"다...당신 뭐야!? 누구냐고!!"
"나...당신이 물먹이려던 사람 측근인데..."
"뭐, 뭐!? 츠...측근 누구...!?"
순간, 기태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지금 본인이 물먹이려던 사람이면... 명백히 세현 뿐인데, 세현의 측근 중에 자신과 세현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사람이 있던가,
그리고 있다해도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이렇게 확인 전화를...
"무슨...헛소립니까? 당신 진짜 누구야!? 내가 누굴 물먹이려고 했다고 이래! 다짜고짜 뭐야, 지금...당신 신고할거야! 내가 누군지 알고나 전화한거야?! 지금??!"
어떻게 알게 됐는 지는 몰라도, 기태는 이 정체 모를 여자가 어딘가에서 주워들은 힌트만으로 자신을 낚고 있는 중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기태. 경복 고등학교 출신, 영광대 문예 창작과 자퇴. 소규모 출판사 등단으로 현재 소설가.
장편소설 [날개], [얼굴], 그리고 현재 '책속의 사람' 출판사에서 소설 연재 중이죠...! 단행본으로도 두권이 나와있고..."
망설임 없이 여자의 입에서 읊어지는 기태의 프로필.
기태는 순간, 섬뜩한 생각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틀린 거 있습니까? 한기태씨?"
"...!!"
자신의 기본 프로필 외에, 남들이 알아선 안되는 내용까지 혹여나 이 여자의 입에서 나올 것이 두려워 기태는 점점 몸이 떨려왔다.
"내...내가... 계속 묻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은 도대체 누구 길래 남의 정보를 그렇게 다 아는 것처럼 얘기하는 거냐고요!?”
"말했잖아요. 당신이 물 먹이려던 대상하고 잘 아는 측근이라고..."
"그러니까, 누구의 측근 이라겁니까?! 그리고 내가 누굴 물 먹였다고 그래?!”
전화를 걸어온 상대 여성은 전혀 아무런 미동 없이 마치 준비된 멘트를 뱉어내듯 계속해서 대사를 쏟아내었다.
“경복 고등학교 76회 졸업생이시죠? 제가 알고 있기론 아주 유명한 분의 아들과 동기라고 하는데, 게다가 친구였다고 하더군요.”
심층 면접과도 같이 차츰 차츰 압박해 들어오는 여성.
기태는 다 알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일부러 자신을 약 올리려는 듯한 태도의 상대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누가요? 누가 그래요!? 어디서 헛소릴 듣고 와서는, 당신 이거 협박이야? 알아?! 당신 진짜 각오해...!! 내 번호는 또 어떻게 알아가지고...”
“작가 임형우씨 아들, 임세현씨랑 동기 동창이죠? 주변에서 절친으로 보일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고...”
상대 여성은 근거 없다며 호통을 쳐대는 기태에게 서서히 진실을 밝히며 더 높은 강도로 팩트 공격을 시작했다.
“내 뒷조사하고 다닌 겁니까? 뭣 때문에 사람 뒷조사를 하는 거죠?”
“경우에 따라선...!!”
계속해서 핵심을 벗어나 정체 알아내기에만 급급한 기태에게 여성은 일침을 놓았다.
“공권력을 동원할 수도 있습니다. 임세현씨 공모전 당선 건 관련 허위유포하신 거 알고 있습니다.”
“무...무슨...!!!”
정곡을 찔렸다.
이 여자, 대체 누구 길래... 늘 숨기고 살고 싶었던 자신의 약점을 이렇게 줄줄 들추어내는 건지...
기태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자신의 주변과 세현의 주변에서 이렇듯 모든 정보를 알고 추궁할 수 있는 인물이 있었는지...
‘서...설마 소현이...?!’
우연히 출판사에서 마주친 대학시절 후배이자, 세현 관련 모든 정보의 원천.
분명, 소현이라면, 지금까지 들은 정보 정도까지는 알고 있을 법 했다.
그리고 만약 소현이 맞다고 한다면, 후배임을 이용해 정보를 빼돌린 기태자신도 그다지 떳떳한 상황은 아니었기에, 일방적으로 성질을 낼 입장이 못되기도 했다.
‘소현이 목소리는... 아닌 거 보니까... 누군가를 시켰을 수도 있어...’
“음... 뭣 때문에 그러신 지는 제가 잘 몰라도...자초지종부터 좀 말씀을 해주셔야...”
분명 소현과 관련된 사람임을 잠정 결론지은 후, 한결 부드러워진 기태의 목소리.
그렇지만 상대 여성은 기태의 그런 변화에 전혀 아랑곳없이 단호했다.
“이 정도까지 얘기했으면 다 파악하셨을 텐데, 왜 모른 척 하십니까? 친구였던 사람이 그렇게 먼저 잘되는 꼴이 그렇게 보기 싫었습니까?”
“아니, 그... 그런 게 아니라... 제가 알고 있던 세현이는 이 세계 입문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초짜인데, 그런 큰 공모전에서 상을 탔다는 게 수상하지 않습니까? 이건 제가 가까운 사이라서가 아니라 누구라도 가질 수 있는 의혹이라고 봅니다만...!!”
이 전에 소현에게 신나게 이야기했던 자신과 세현의 관계, 정보를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 이상 시간을 끄는 것이 무의미하다 판단한 기태.
그나마 납득이 갈 수 있을 만한 열과 성을 다한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 세계,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반평생을 작가만 꿈꾸며 살아온 저 역시도 아직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냥 도전 정도로만 생각하고 뛰어든 녀석이 갑자기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출판사에서 수상? 이건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거라고요!!”
“임세현씨는 임형우 씨의 아들이니만큼 어렸을 적부터 문학적인 공간에 둘러싸여 살았을 테고, 그러다보면 뭔가 남들과는 다른 재능이 살아났을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다 초짜라고 보는 건 한기태씨의 자격지심 아닙니까?”
자격지심, 열등감... 그것만으로 똘똘 뭉쳐있던 기태로서는 가장 들키기 싫은 부분에, 누군가가 들추어낸다면 가장 화가 치미는 일이기도 했다.
“이것 봐... 당신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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