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화_또라영 & 어리바리 ]
“무슨 일인데?”
거대한 신주쿠 역 안의 한 까페로 들어와 자리에 앉자마자 공항 출입국 직원마냥 방문 목적부터 물어보는 아영.
냉정하다 여길 만도 했지만, 해인 역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고픈 마음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얘기... 해 줬으면 좋겠어.
너처럼 살고 싶어.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 지...
사실, 한국 떠나 좀 멀리 나가서... 하고 싶은 게 있기도 하고...”
“훗, 내 인생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 오랜만이네. 뭔가 재미난 뒷얘기가 있어 보이는데...?
암튼 뭐, 어려울 거 없지. 덕분에 알바까지 뺐는데.”
아영 역시도 오래간만에 진지하게 이야기 들어주는 상대가 생긴 것이 즐거운 듯, 미소를 머금으며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
해인이 여전히 느지막한 가출문제로 고민하고 있던 3개월여 전.
자신 또래의 누군가에게 라면 어떤 힌트라도 얻을 수 있을 거란 막연한 기대에 고교동창모임에 참석했다.
“어머! 얘, 오래간만이다. 어떻게 살았어?
잘 있었어?”
“그러게, 기집애, 뭐하고 살 길래,
결혼하면 이렇게 연락 뚝 끊겨도 되는 거니?”
“정신없지, 뭐 너는 그때 사귀던 남자친구하고는 계속 만나?”
“아니, 헤어진 지 얼마 안됐어.”
“어머? 왜? 당장이라도 결혼 할 것처럼 붙어 다니더니!!”
“결혼이 뭐 감정만 가지고 되니? 벌어놓은 게 하나도 없더라고. 진짜...”
“진짜? 세상에... 잘했어, 정 때문에 헤어지는 거 질질 끌어봤자 결국 상처만 깊어져."
"맞아, 한발 떨어져 보면 만날 남잔 많더라.
어디 모임 같은 데 나가봐. 의외로 잘나가는 애들 많이 나오더라."
만나자 마자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친구들의 근황토크.
너나 할 것 없이 풀메이크업에 브랜드 백을 옆에 끼고 나타나 학창시절 때와는 다른,
[완성된 여성]으로서의 모습을 서로 경쟁하고 있는 듯 했다.
“너 어렵게 대기업 들어갔었잖아?
회사는, 많이 바쁘지 않아?”
“아, 거기...! 결혼하고 관뒀어. 너무 힘들잖아.
5, 6년 가까이 일했으면 많이 한 거지, 뭐..."
"아, 그러고 보니 희영이 남편이 의사랬었나?
좋겠다. 어디가면 의사 와이프 소리 듣겠네.”
“그렇지도 않아, 의사 벌이가 예전 같지 않다더라고. 겨우 먹고 살 정도지 뭐.”
“그래도 남편 집에서 나중에 강남에 병원하나 해 준댔지? 걱정 없겠네, 기집애. 행복한 줄 알아야지...!”
“아이는 좀 나중에 낳을 걸 그랬어, 이래저래 너무 힘드네. 오늘도 겨우 시댁에 맡기고 나온 거야...”
이제 만나서 떠들기 시작한 지 겨우 10분여...
해인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깊은 이야기를 기대하고 나온 것이 잘못이었는지. 방향을 잘못 잡은 건지.
말 한마디 내뱉기도 껄끄러운 기분이었지만, 표정관리는 더더욱 힘들었다.
어떤 표정을 해야 이 지루함을 감출 수 있을까,
앞으로 몇 시간은 더 버텨야 할 텐데...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지금 이들 중 해인이 가진 고민을 상담해 줄 수 있는 상대는 없다는 점이었다.
자신의 옅은 인간관계를 탓하기엔 너무 늦어버린 현재의 불편한 자리.
직장, 남자친구, 남편, 아이, 집안...
30이 다 된 여성들의 동창회에서 이야기의 물꼬를 트는 키워드는 이 5가지 정도뿐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끝에는 그 키워드로
돌아오고야 마는...
이래저래 관심이 없었던 해인은 자연스럽게 이들의 대화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들의 이야기는 아슬아슬한 가벼움을 안고 이어져 갔지만, 해인은 끼고 싶은 마음조차 상실한 상태였다.
여길 어떻게 빠져나가지?
[ 덜컥 ]
돌연, 카페 문을 열고 한 여성이 들어와 그녀들이 모인 테이블로 다가오자, 북적대던 모임은 잠시 알 수 없는 정적을 맞이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자유분방해 보이는 복장을 한 여성.
"어, 아영이 왔니? 반가워... 하하."
"어 미안, 볼 일이 좀 늦게 끝나서, 다들 오랜만이야!"
10명의 친구들은 아영에게 조금 전, 자신들의 수다에 해인이 지었던 표정과 비슷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 야, 또라영 쟤 누가 불렀어? ]
[ 난 아니야... ]
[ 왜 왔데... ]
고교시절 늘 평범하지 않은 생각과 행동을 앞장 서 실천해 왔던 아영.
서로 말투가 거침없던 그 시절, 친구들은 아영을 또라영이라 불렀다.
“오랜만이다 아영아, 뭐하고 사니, 요새?”
친구 중 한 명이 진행을 자처하며 새 게스트에게 통속적인 질문을 꺼내 들었다.
“나? 지금 일본에서 알바하면서 돈 벌고 있지.
아, 언제쯤 가게 하나 차리려나...”
“아, 아르바이트 하면서 사는 구나.
그럼 다시 일본 돌아가야 하는 거야?”
“응, 한 두 시간 뒤 비행기로 바로 들어가.
볼 일 있어서 잠깐 귀국했는데, 마침 고 사이에 모임이 있다고 들어서.
훗, 이것들, 예뻐졌는데? 뭐 이렇게 차려입고 나왔어들? 동창 친구들 만나는 자리에...! 선보니?”
“하..하하 그래도 다들 이제 사회인들인데...
갖춰 입고 다녀야지.”
여전히 변함없는 또라영 앞에서, 서로 말을 사려가며 조심조심하는 가운데.
무언가 속박 없이 자유분방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해인은 호기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영아, 너 지금 일본에서... 일 한다고?”
내내 침묵을 지켜오던 해인이 아영에게 말을 걸었다.
“응, 옷...!! 어리바리 해인이네...! 오래간 만이야.
이 놈의 땅덩어리에선 뭐 나이 차면 결혼을 해야 되네, 남편은 뭐하네, 어디에 살아야 잘 사는 거네... 다 귀찮아서 그냥 나가 살아.”
“아...! 그...그래? 그럼... 혼자 아르바이트 하면서 생활하는 거야?”
“그럼...! 이 나이 먹고 부모한테 용돈 받아 쓸 일 있어? 알아서 해야지. 나 참, 요즘 기집애들...!
부모한테 그렇게 빌붙어 있다가 나중엔 남편한테 빌붙어서 아주 팔자 고치려는 애들 많아 꼴 보기가 싫어요. 아주... 인생 혼자 가는 건데.”
이리저리 돌아가는 눈동자의 친구들,
누가 그러냐는 듯, 어색한 미소만을 담고 있었다.
분위기는 누가 봐도 아영의 등장 전후로 달라져 있음이 분명했다.
친구들은 ‘비행기 시간 다 되어 금방 일어나야 한다’ 는 아영의 말만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 아영아... 있잖아...”
여인들의 따가운 눈길을 뒤로하고 (눈치없이) 조심스럽게 아영에게 더 말을 걸어보려는 해인.
“뭐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내가 지금...”
“아, 해인아 잠깐만.”
울리는 진동 소리에 어딘가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는 아영. 유창한 일본말로 뭐라 뭐라 떠들어 대더니,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애들아 미안, 어디 또 들러야 될 데가 생겨버렸네, 먼저 일어날게.”
“아, 아쉽다! 좀 더 있었으면 좋았을 걸.
조심해서 잘 가고 다음에 또 보자.”
누가 봐도 [ 옳거니. 잘 가라! 또라영! ]의 상황은 이렇듯 순화되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아영이 급하게 카페를 나가자, 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휴... 쟤는 철들려면 멀었다. 멀었어...”
“그러게, 어떻게 저렇게 하나도 안 변할 수가 있지? 아직까지도 무슨 꿈 찾아 헤매는 거야? 한심하긴...”
“우리 나이에 아직 알바 인생이라니 말이 되니?”
까페 문을 박차고 나가 어딘가로 급하게 뛰어가는 아영의 모습과 그런 아영을 비난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잠시 주춤하던 해인.
“아,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께!!”
해인은 급하게 변명을 하고 카페를 나와 아영을 쫓았다. 이미 멀리 떨어졌지만 전력으로 따라붙어 겨우 눈앞에 보이는 거리까지 좁힐 수 있었다.
“아..아영아!! 잠깐만!!”
아영은 뒤를 돌아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자신과 조근 조근 이야기를 시도하던 해인은 땀을 뻘뻘 흘린 채, 머리모양이며, 옷매무새며...심하게 헝클어진 상태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헥,헥...!! 음... 꼭 너한테 물어볼 거 하나 있어!!
나... 지금부터 멀리 나가 뭘 좀 시작하고 싶은데... 해도... 될까?”
숨이 찼던 건지, 따라오느라 정신이 없던 건지, 맥락도 없이 툭 던져버린 엉뚱한 질문.
질문을 내뱉은 자신조차 정리가 안 된 느낌이었다.
아영은 순간,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하하, 하고 싶은 거면 해야지! 그걸 왜 나한테 묻니? 뭘 시작하고 싶은 건데?!”
“지금은... 바쁘지? 혹시 언제 시간되면 얘기 좀 더 할 수 있을까?”
아영은 아무 말 없이 쪽지에 무언가를 적어 해인에게 전달했다.
“훗, 고민이 깊은 걸 보니 바다 건너 어딘 가 까지 가야되는 일인 것 같은데..?
그럼 나중에 잠깐 일본 들러 이 번호로 연락해.
지금은 내가 너무 바빠서 가봐야 할 것 같아. 가까운 일본 잠깐 못 들를 만큼 바쁜 일정 아니라면 말야.”
이 말을 마지막으로 쿨하게 돌아선 아영.
해인은 그 뒷모습을 보며 벌써부터 아군이 생긴 듯한 확신을 갖기 시작했다.
반드시 만나러 가리라...!
해인은 아영에게 받은 쪽지를 확인하고 품 안에 고이 간직해 두었다.
***
그렇게... 몇개월이나 지나 바리바리 큰 짐을 싸들고 정말로 일본에 찾아 온 해인.
자리를 잡은 한 카페 안에서 절실한 질문에 답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독립할 때 기억이라, 까마득하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독립을 생각한다면 세 가지 정돈 꼭 필요한 것 같아.”
“세 가지? 어떤 건데?”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해인에게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하려는 듯, 상체를 당기고 눈을 맞추어 주며 아영이 말했다.
“깡? 뻔뻔함? 시간?”
“??”
“호기심이 생겨서 해보고 싶은 게 생겼다 쳐.
근데 안 해봤던 거니까 시도하기가 두려운 거야.
거기서 [ 까짓 거 해보지 뭐 ] 하는 걸 [ 깡 ]이라고 하지.”
해인은 침을 꿀꺽 삼키며 계속해서 아영의 연설을 경청했다.
“그러면, 안하던 걸 하는 사람들한테 쏟아지는 주변의 시선이란 게 있게 마련이거든.
특히 우리나라 같이 남 눈치 많이 보는 나라에선...
왜, 봤잖아...! 동창회에서 다들 그 어이없어 하는 표정들...
그럼에도 그 시선을 무시하는 걸 [ 뻔뻔함 ]이라고 하는 거지. 좀 오래된 말로 얼굴에 철판을 깐다고도 하고...!”
뭔가 분명한 해석.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드러낸 아영의 확실한 자기 철학에, 해인은 필기라도 하고 싶을 정도였다.
“근데 그 시선이라는 게 말야, 여기저기서 오는 거 거든. 가족이 됐든, 지인이 됐든...
웃기는 건 또 그렇게 사는 걸 보여주다 보면 뭐라 그러다가도 인정을 해요.
이건, 말하자면, 관심을 끊는 다고 볼 수도 있고...!
그러니까, 그렇게 사는 걸 보여줘야 할 [ 시간 ]이 필요한 거지.”
새롭게 뭔가 시작하려 하는 이들이 지녀야 할 완벽한 해답처럼 들리는 논리.
독립의 아이콘처럼 보이는 아영 선생님의 강의를 듣는 애제자 해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빛이 나기 시작했다.
***
“에이, 가져가야 될 책이 너무 많네. 이거... 팔 수도 없고..."
혼잣말로 궁시렁궁시렁...
의외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던 일본 생활 속, 세현에게 생긴 버릇이었다.
세현은 1년여 간의 일본 생활을 정리하려 짐을 꾸리고 있었다.
잠시 머물다 갈 생각으로 평소에 짐을 최소화 해놓긴 했지만, 예상외로 챙길 것들이 많아 정리에 시간이 꽤나 걸린다.
“이 보물 상자는 꽁꽁 싸매 둬야지. 잃어버리면 큰일이니...”
세현의 보물 상자.
그 간의 경험과 감정들을 차곡차곡 적어둔 노트였다.
새로운 경험을 위해 필드로 뛰쳐나와 한국과 일본에서 만난 사람들과 겪은 여러 가지 에피소드와 그때그때 떠오르는 감정들을 차곡차곡 기록해 둔 노트.
세현의 유럽 출국예정은 며칠 뒤였지만, 정리 할 것은 미리 해두어 여유를 가지고 일본의 이곳저곳을 천천히 돌아다녀 볼 생각이었다.
“웃차! 이 정도면 됐겠지. 후우... 어지간한 것 다 싸 놓고 보니 집이 휑하네... ”
저녁이 다 된 시간.
세현은 밖으로 나와 새삼스레 자신이 살던 신주쿠의 밤거리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신주쿠 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유명하고도 오래된 대형 서점 [ 키노쿠니야 ].
세현은 일을 마치고 돌아오며 항상 습관적으로 이곳에 와 시간을 보냈다.
진열된 소설들을 꺼내어 읽어보느라 폐점 시간이 다되어 돌아가는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고, 읽다가 끊지 못해 사오게 된 책만도 수 십 권.
이곳 키노쿠니야에도 여느 서점들과 같이 들어오는 입구의 가장 눈에 띌 만한 위치에는 카테고리 별 베스트셀러 서적들이 따로 진열되어 있다.
그 중 책에 먼지가 앉을 만큼 오랜 기간 베스트셀러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소설 섹션의 한 서적.
이 날 역시도 세현은 진열대 앞에서 발을 멈추고 지그시 그 책 표지를 바라보았다.
월드와이드 스테디셀러 소설 [ 그들만의 세상 ].
세현은 무슨 의식과도 같이, 서점으로 들어가기 전 잠시 동안 이 서적을 응시하며 서 있곤 했다.
이 곳 뿐 아니라 일본의 어느 서점에도 항상 눈에 띄는 상석에 위치해 있는 이 책.
“...일본어로 되어 있어도... 기분은 별로 다르지 않네요, 아버지...”
http://novel.naver.com/challenge/list.nhn?novelId=628943
http://me.co.kr/sub/challenge_detail.php?itemNo=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