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_작가의 아들 ]
“일본어로 되어 있어도 기분은 별로 다르지 않네요, 아버지...”
세현에게 하나의 의식이 되어버린 이 행동.
일본에서 늘 해오던 이 의식이 이제는 끝나간다는 생각에서 였을까.
그는 평소보다도 오랜 시간동안, 베스트셀러 진열대 위의 소설 [ 그들만의 세상 ]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그렇게 혼자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 생각이었으면, 나는 왜 낳은 거예요?!
엄마한테도 똑같이 그랬겠지??”
문학계의 거장들뿐 아니라 책의 팬들까지 참석해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한 작가의 장례식장에서,
고등학생이었던 세현은 영정을 노려보며 혼잣말로 외쳐댔다.
옆에서 같이 자리를 지키던 할머니는 손자의 기분을 다 이해한다는 듯, 아무 말 없이 그의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전달된 차가운 메세지 하나.
[ 고인이 유언에 따라 재산과 인세, 저작권 등은 모두 고인의 어머님과 아들인 세현 군에게 귀속됩니다. 세현 군이 아직 미성년자인 고로 당분간은 고인의 어머님의 아래에서 보호를 받게 됩니다. ]
세현의 아버지는 전 세계적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소설, [ 그들만의 세상 ] 의 작가이다.
책이 세상에 알려질 무렵, 아버지의 나이는 40대로, 이른 나이부터 어마어마한 작가로 추앙 받기 시작했다.
아직 학생 신분이었던 세현에게 상속이나 재산 등의 문제가 그리 크게 다가오지는 않았으나,
분명한 것은 아버지처럼은 살지 않겠다는 다짐뿐이었다.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다는 아버지의 소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음은 물론이었다.
“할머니, 할머니는 알잖아요, 아빠한테 난 그냥 짐이었다고요!! 어릴 때 프랑스에 있던 기억 말곤 아무 기억도 없어요.
심지어 그거 아세요? 프랑스도 그냥 자기 소설 쓰러 갔던 거였다고요! 아들이라고 한국에 어디 놔둘 데가 없으니 어쩔 수 없어 데려갔던 거겠지!!”
아들의 영정 앞에서 손자의 투정을 듣는 할머니는 슬픔에 아무 말도 이어가지 못했다.
손자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할 정도로, 너무나도 무정한 모습이었던 아들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
일본 신주쿠의 [키노쿠니야] 서점 입구에서 다른 때보다도 더 긴 시간동안 우두커니 일본어로 된 아버지의 소설 표지를 응시하던 세현.
평소처럼 서점 안으로 들어가려던 그는 새삼, 얼마 남지 않는 일본에서의 시간을 더 즐겨야 한다는 압박이라도 느낀 건 지, 방향을 틀어 일본의 밤거리로 나아갔다.
늘어진 티 쪼가리에 찢어진 청바지, 슬리퍼를 끌며 동네 마실을 나온 듯한 복장을 한 그였지만,
그가 일하는 레스토랑에서도 그러했듯, 어딜 가도
그 빼어난 외모를 숨길 수는 없었다.
큰 키에 약간은 긴 듯한 찰랑이는 생머리, 밤에도 도드라져 보이는 하얀 피부.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멋스러움은 지나가는 일본인들마저도 곁눈질을 해댈 정도였다.
늘 아르바이트하랴, 독서하랴, 집에서 작업하랴... 정신없이 살았던 세현.
간만에 맞이하게 된 여유가 어색하기라도 한 듯, 세현은 그저 정처 없이 걸으며 눈에 보이는 풍경만을 담아보고 있었다.
실제로 이 지역의 만남의 장소로 많이 알려져 있는 신주쿠역의 동쪽 문 출입구 부근에 서 있을라 치면,
무수히도 많은 캐릭터들이 등장해,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재미난 풍경을 연출해주곤 했다.
물론 이들의 모습이 세현의 작업에 많은 영감을 주기도 했다.
한참을 시간가는 줄 모르고 역에서 나오는 이들을 지켜보던 세현은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기태니? 오래간만이다.”
“세현이? 너 웬일이냐? 그렇게 바쁘신 분이 전화를 다 주고...”
“훗, 간만에 전화했는데 까칠하시구만. 잘 사냐?”
“나야 뭐 늘 그렇지... 넌 어디 해외 나갔다더니...?"
겉으로는 전혀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투정할 데가 필요했던 세현은 오래간 만에 연락한 친구 기태에게 탄식을 시작했다.
“하... 그나저나 이거 힘드네... 작업이 만만치 않아. 너 참 대단하다. 이걸 계속 해왔다니...”
“그러게, 임마! 아무나 할 수 없는 거라고 했잖아.
그 좋은 회사 때려 친다 할 때부터 내가 그렇게 뜯어 말렸건만...”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니냐? 그래서 늦게나마 이러고 나와서 개고생 중이지 않냐.”
“쳇, 고생이래... 너도 참 너희 아버지... 아니다, 아무튼 열심히 해봐라. 바빠서 이만 끊는다.”
“아 그래... 또 연락할게. 잘 살아라.”
[ 툭 ]
매정한 녀석...
뒤늦게 비슷한 길로 들어와 공부를 시작한 같은 분야의 동료에게, 응원 메세지 한마디 없이 끊어버린 저 바다건너 한국의 친구.
그나마 지금 자신의 고민을 이해해 줄 수 있는 것은 비슷한 고민으로 살았을 기태 뿐이라 여겼기에,
늘 이런 식으로 구박을 듣게 되더라도 세현은 가끔 기태에게 연락을 했었다.
“어디 백날을 해봐라. 네가 네 아버지처럼 될 수 있나...”
전화를 끊은 후 무심히 혼잣말을 내뱉는 기태.
사실, 기태는 지금 세현의 이런 투정을 정답게 받아 줄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다.
학창시절부터 작가를 지망해오며 늘 세현의 아버지를 동경해 왔던 기태.
그렇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자신 역시 현직 [ 전업 작가 ] 의 신분이지만 그다지 화려하지 못한 위치.
늘 글을 쓰며 세현의 아버지의 모습에서 성공의 완전체를 꿈꾸어 왔다.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나름 끊임없이 노력해온 기태에게, 작가가 되겠다며
[ 할 것 다하다 늦은 나이에 철 모르고 달려든 ]
인상의 세현은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던 것.
'지 아버지 후광으로 뭐라도 되리라 생각했나본데... 작가라는 게 그렇게 쉽게 인정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현재, 몇 편의 소설과 잡지에 연재를 하고 있는 기태는 이 날도 집필에 여념이 없었다.
단호히도 끊겨버린 친구와의 대화에 어이가 없을 만도 했지만, 늘 이와 비슷한 식이었기에 세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다.
“하여튼 삐딱한 건 알아줘야 돼. 누가 정신 노동하는 작가 아니랄까봐, 히스테리는...”
세현은 별 생각 없이 역 앞 구조물에 걸터앉아 있다가 신주쿠 동쪽 출입문으로 진입해 혼잡한 역 안으로 들어갔다.
길게도 이어져 있는 계단 저 아래에는 자기 몸집만한 짐 캐리어를 들고 낑낑대며 계단을 올라오는 작은 체구의 여성이 보였다.
‘한국 사람인가? 일본사람 같지 않은데?’
매정하게도 도와주는 이 없이 모두 각자 갈 길가는 주변인들. 힐끔 주변의 눈치를 보던 세현은 그녀를 도와주러 계단을 내려갔다.
“ 日本人ですか?手伝いましょうか?"
"???"
무심결에 일본말로 말을 걸어본 세현은 어리둥절 해 하는 모습의 여자와 큰 보라색 캐리어에 붙은,
미처 떼지 못한 항공 탭을 보고 한국인임을 확신했다.
“아, 한국 분이시구나. 제가 도와드릴께요.”
“아, 한국 분...!! 고맙습니다. 감사해요.”
무거운 짐으로 낑낑매던 한국 여성은 낯선 일본 땅에서 도움을 주는 한국인을 만나 무엇보다 반가웠지만,
한 눈에 보아도 연예인 같은 곱상한 외모의 남자가 미소와 함께 말을 걸어온 것에 더욱 감격한 모양이었다.
“웃차, 여행 치곤 짐이 좀 크네요? 오래 계시러 왔나보다."
아르바이트 하면서 생긴 서비스 정신이 몸에 배어있어서 일까, 세현은 부드러운 미소와 상반된 팔 힘으로 계단 위로 짐을 올려놓으며 여성에게 자연스레 말을 걸었다.
예상치 못한 친절에 당황했음인지, 미남자 세현의 미소에 반해서 인지, 더듬거리며 겨우 대답을 하는 한국 여성.
“아, 예, 예...! 잠깐 친구 좀 만나러 왔어요.
유... 유학생이신가 봐요?”
“학생...이라... 고맙네요, 그렇게 봐주시니, 훗...!
뭐 배우러 오긴 한 셈이죠...! 숙소 정해놓은 데는 있으신 거죠? 어디 쯤이예요? 제가 이 동네 잘 알아요.”
“예? 숙소요? 잠깐만요...”
살짝은 어리바리하게 온 몸을 뒤적이며 숙소 주소를 적은 메모지를 찾는 듯한 여성.
“아, 네... 저...여기가...”
예상치 못한 미남자의 도움에 안심이 되었지만 순간, 외국까지 와서 낯선 남자에게 숙소까지 알려주면 위험하지 않을까 하는, 경계심이 움트기 시작했다.
“아, 저... 감사합니다. 여기서 부턴 제가 알아서 찾아갈게요.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예? 아, 알려주시면 어딘 지라도 알려 드릴게요. 진짜 이 동네 잘 알아서 그러는 건데...”
“아닙니다, 괜찮아요. 짐 들어 주신 걸로 감사합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순간, 다소 새침한 표정을 하며 호의를 거절하려는 여성의 의도를 알아차린 건지, 세현 역시도 약간은 기분이 상해 길게 붙잡고 싶지 않았다.
“예, 즐거운 여행되세요. 그럼.”
‘저 순진하고 잘생긴 얼굴 뒤에 어떤 모습을 감추고 있을지 몰라. 오면서 보니까 일본엔 늘씬하니 핸섬한 애들 투성이던데,
맞아, 저번에 TV에서 이런 데 혹해서 넘어갔다가 돈 다 털렸다는 얘기 들어 본 적 있어. 조심해야지, 조심...’
여성은 혹시 뒤에서 세현이 수상하게 생각할 새랴 당당한 척 허리를 꼿꼿이 펴 메모를 꺼내들고 숙소를 찾아가는 척 했다.
‘뭐야, 이 여자. 날 뭘로 보는 거야, 오래 간만에 기분 더럽네. 도와주고도 의심을 받다니...
요 몇 년 간, 아주 서비스 정신만 늘었나... 아... 모양 빠져...’
누가 봐도
‘불안해 죽겠는데 당당한 척 하는 것처럼 보이는’
행색으로 걸어가는 저 앞의 한국여성.
그녀가 지나가고 난 자리에는 어둠 속에 묻혀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작은 메모장 같은 것이 떨어져 있었다.
아마도 주소 메모를 찾아 옷을 뒤적이다 실수로 떨어뜨린 건지...
더는 관여하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기분이 상한 세현. 그저 심심한 마음에 떨어져 있는 메모장을 주워보았다.
"후우... 여권...이네..."
확인하자마자 세현은 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당당한 척하며 인파 속으로 사라져 버린 이 여성은 보이지 않았다.
“아, 나... 이 아가씨, 큰일났구만...
처음부터 어째 어리바리 하더라니만...”
그래도 큰 캐리어를 끌고 다니니 멀리는 못 갔겠지 생각에 이리저리 찾아다녀 보았지만,
관광대국답게 비슷한 모양과 색상의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솔로 여성 여행객은 무수했다.
"아 씨... 귀찮아, 그냥 경찰서에 맡겨?
거리도 먼데...아니지, 일본말도 못하는 거 같던데 저 여자가 무슨 수로 찾을 거야?"
솔직히 그렇게 까지 하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의 호의마저 의심하는 여자에게 무슨 일방적인 친절이란 말인가.
무엇보다 귀찮았다.
오랜 시간 걸리는 일이 아니라 해도 얼마 남지도 않은 황금 같은 시간을, 알지도 못하는 저 여자를 위해 써야 할 이유는 없었다.
세현은 그냥 개인적으로 보관했다가 어차피 며칠 후 떠날 여정이니 공항 분실물 보관소에나 맡겨 두기로 했다.
'저 미련한 여자가 그 전에 돌아 간다하면 어쩔 수 없는 거지, 뭐. 내 동선 꼬이게 하면 안 되는 거잖아! 호의도 무시했던 주제에.’
그래도 누군지 보고 싶은 호기심이 발동해서였을까. 몇 발자국 못가 세현은 여권을 열어보았다.
[ 29세, 이해인 ]
사진을 보니 조금 전에 그 여성이 분명...
“조금 전에 그 여자 맞는 거야? 사진이 영 딴판인데. 신의 손 뽀샵인가... 누가 보면 위조한 줄 알겠네. 나라를 상대로 사기 치려하다니...”
*
국가를 상대로 사기 치는 이 아가씨.
해인은 신주쿠 역 안의 카페에서 아영과 대화, 아니, 아영 선생님의 강의를 들은 후에 숙소로 이동하던 차였다.
어찌되었건 처음 나와 본 외국.
여행 목적은 아니었지만 아영의 조언대로 이 나라에서 할 수 있는 것, 체험할 수 있는 것들을 해보고자,
머무르는 동안, 미술관, 박람회, 박물관등 자신이 보고 싶은 곳을 속속들이 찾아 돌아 다녀 볼 계획이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더 먼 나라로의 출국에 앞서 짐을 챙겨들고 공항에 가는 버스에 오른 해인은 그제서야 여행객의 신분증, 여권이 없어졌음을 깨달았다.
“이거... 이거 없으면 큰일 나는 거잖아...
다시 하..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데...어쩌지...어쩌지...”
이미 출발한지 꽤 된 공항 직행 버스 안에서 울상을 지어보이는 해인. 하지만 숙소에 두고 왔다는 확신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초조함은 극에 달했다.
***
“갈게. 그동안 고마웠어. 덕분에 많이 배우고 갑니다. 아영 선배님!!”
“휴우... 시간도 참 빠르다...!
결국 바쁘다고 밥 한번 같이 못 먹었네, 그나마 가는 거라도 볼 수 있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어쩔 수 없지. 뭐, 각자 열심히 사는 거 눈으로 확인해 왔는걸 뭐...! 같이 있기 싫어서 필사적으로 피한 건 아니란 거 잘 알고 있습니다요.”
“훗, 그래...!! 사서 고생, 사서 고생 노래를 부르긴 했지만 넌 진짜 뭐라도 될 놈이다.
덕분에 힘 좀 됐어, 나도... 많이 외로웠었는데.”
예정대로 유럽으로 향하는 날.
세현은 아영과 아쉬운 작별 인사 중이다.
늘 센 척하며 남자 못지않은 강단을 보였던 아영도 이별 앞에선 여자일 수밖에 없던 건지,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있다.
“어? 어? 우는 거야? 이거 왜 이러세요?
이 열도를 집어 삼켜버리겠다던 대장부 기세의 씩씩한 아영씨가...!"
“모...몰라 이 병신아!! 울긴 누가 우냐...!!
얼른... 꺼져버려!!”
늘 강한 모습이던 아영의 눈물 맺힌 모습에 자신도 울컥하는 기운이 올라와서 였는지, 아영을 힘껏 안으며 고개를 돌려 자신의 눈물을 숨기는 세현.
아영 역시 세현의 등을 토닥이며 아쉬움을 전했다.
“에고...여자는 여자구만, 당신도... 찔찔 짤 줄도 알고... 아영이 너도 과거 잊고 이제 좋은 남자 좀 만났으면 좋겠어...
이 미모에 아까워 죽겠네...
언제까지 그렇게 남자보길 짐승 보듯 할래?”
“뭐야... 너나 잘해, 임마!! 유럽 가서 바람둥이 동양 남자소리 들리면 넌 줄 알 테니까, 처신이나 똑바로 하고 다녀...!”
세현은 아영을 끌어안은 채 자신의 오른쪽 가슴에 파묻혀있는 아영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진짜 간다. 몸조리 잘하고...! 도착해서 연락할게.”
바로 공항에 가는 버스에 몸을 실은 세현.
차창으로 연신 손을 흔들어댔다.
이윽고 버스는 출발했다.
버스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며 아영은 조용히 혼잣말을 하며 돌아섰다.
“...병신아, 짐승 떠나보내면서 우는 여자 봤냐...하여간... 멍청해요, 저래 갖고 무슨 작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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