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그곳에서...<5화>

[ 5화_ in the sky ]

by youtoo


"뭐야...이거...!?"

비행기 좌석 아래 발치에서 뭔가 걸리는 느낌에 떨어져 있는 책을 주워 올린 세현.

허리를 펴고 다시 등을 기대어 앉아 확인해 본 그 책은 다름아닌 아버지의 소설,
[ 그들만의 세상 ] 이었다.

지금 자신이 읽고 있던 책 역시도 같은 소설.

세현은 새삼, 무릎 한쪽에 놓아 둔 자신의 책과, 주워 올린 책을 비교해 보았다.

신기하게도 낡아있는 책의 상태까지도 자신의 것과 비슷한 정도.

좌석의 앞뒤 양옆을 통틀어 동양 사람이라고는 자신과 뒷자리의 해인 둘 뿐이었기에, 세현은 한국어판인 그 책이 누구의 것인지 금새 알아 차렸다.

“쳇, 하고 많은 책들 중에 어째 하필 또 이 책이야... 근데 이 여자...왜 떨어뜨리고...”

세현은 혼잣말을 궁시렁대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뒷좌석을 바라보았다.

좌석에 기대어 잠이 든 채, 보던 책을 손에서 놓치고 말았던 듯한 해인.

세현은 조금 전까지도 씩씩대며 나쁜 말을 해대던 [이해인]이라는 여자의 잠든 모습을 자기도 모르게 지그시 바라보았다.

‘훗, 저러고 조용히 자고 있으니까 그래도 봐줄 만은... 아니, 나 뭔 생각하는 거야...!

그나저나 완전... 곯아 떨어졌네...
입벌리고 자는 꼬라지가 완전 딥 슬립...

잠깐, 이거... 또 깨고 나면 자기 거 가지고 갔다고 도둑으로 몰릴 거 아냐? 에잇, 이거 그냥 바닥에 놔둬야지.’

자신도 늘 봐오던 책이었으니, 별반 다를 건 없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괜한 호기심에 주워 올려든 책을 펼쳐 재빠르게 훑어보았던 세현.

해인이 흘린 책에는 세현이 그다지 눈 여겨 보지 않았었던 삽화 옆으로 빼곡한 메모들이 가득 기록되어 있었다.

자세히 보아야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급하게 써갈긴 듯한 글씨체로.

'글씨 참 못쓴다... 근데 뭐야... 혹시, 글이 아니라 일러스트...? 쪽에 관심이 있는 사람인가...?'


“어?? 어디 갔지??”

순간, 뒷 자리에서 뭔가 초조한 듯 중얼대며 분주하게 이곳저곳을 뒤적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에잇, 저 여자, 깼네...!! 바로 뒤로 차버릴 걸, 또 의심을...'

해인이 떨어뜨린 책을 찾으려 손가방이며, 자신의 주변을 허둥지둥 뒤지고 있는 찰나,

세현은 좌석의 틈새로 뒤쪽 상황을 몰래 지켜보다, 해인의 책을 다시 바닥에 놓고 뒤쪽으로 가볍게 차 보냈다.

“아!! 여기 떨어져 있었구나!! 큰일 날 뻔했네!!”

책을 주워 먼지를 털더니 소중한 물건 다루듯 손가방에 다시 집어넣은 해인.

이후의 상황이 어떻게 굴러 가는 지 궁금해 계속해서 뒷자리를 훔쳐보고 있던 세현은 그만 해인과 눈이 살짝 마주쳐 버렸다.

“어?! 아니, 아니지...잠이 덜 깼나보다...
그 놈이 여기 타있을 리 없잖아...!"


‘그 놈 여기 타있다. 이것아! 아씨...
비행시간도 긴데 돌아다니다 마주치면 어떻게 하지...?’

눈을 마주한 순간 잽싸게 고개를 돌려 아무렇지도 않게 정면을 주시하던 세현은 문득 생각했다.

‘가만, 내가 왜 저 여자 눈치를 보고 있는 거야?
헷갈리게 하네. 거 참....!! 사람 억울하게 만드는 재주 있네. 저 여자...'

세현은 애써 태연한 척, 항공기 좌석 내 잡지나 TV등, 다른 컨텐츠들을 괜스레 이것저것 만져보거나,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해보기도 했다.

그렇게 출발 직전보다도 가시방석이 된 상황으로, 비행 5시간여가 지나던 시점.

승객들 대부분에게 하늘 위의 상황이 조금은 익숙해진 시점이었는지,

기내 전체는 소등되어 사람들 대부분은 잠을 청하거나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조금은 풀어진 긴장에 세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기내 전체가 옅은 어둠이 깔려 이동하면서도 뒷좌석의 해인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자리에서 꽤나 멀리 떨어져 있는 화장실 위치.
좁은 통로로의 이동 역시 편치 않았다.

‘12시간도 넘는데 비즈니스석 끊을 걸 그랬나...
진짜...나 완전 짠돌이 됐나봐...옛날 같았으면...

아니, 아니지... 돈이 어디 있어...!! 이제부터도 아껴서 써야하는데...! 갈 수 있는 게 어디냐...!'

[철컥, 철컥]

누군가가 사용 중인지 화장실 문은 잠기어 있어 세현은 문밖에 잠시 서서 대기하였다.

다행히 자신의 뒤로는 대기자가 보이지 않아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던 찰나, 문이 열리며 밝은 조명이 켜져 있는 화장실 내부가 드러났다.

기내의 어둠 속에서 무심결에 밝음을 쫓아 눈길이 간 사람, 화장실에서 나온 이는 다름 아닌 해인이었다.

해인은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흡사 귀신이라도 본 듯, 어마어마하게 커져버린 눈동자로 세현을 쳐다보았다.

"꺄아...읍"

너무 놀라 반사적으로 입에선 비명이 질러지기... 일보직전에 손으로 해인의 입을 막아 화장실 안으로 밀쳐 문을 닫는 세현.

"미쳤어요? 여기서 소리 지르면 난 뭐가 됩니까?"

일단 화장실 안으로 피신해 작게 속삭이는 세현.

두 사람이 들어가기엔 좁디좁은 공간이라 밀착 되어져 단 몇 센치의 간격을 두고 마주하고 있었다.

"읍 퉤 퉤... 이거 놔 봐요...! 뭐예요? 다신 보지 말자고 뻗대더니 왜 여기 들어와 있는 거예요??! 이거 너무 밀착해 있잖아!! 당신 진짜 스토커 아니야??!!"

"장소가 좁은 걸 어떻게 해!!
우아...!! 진짜 억울하네. 이것 봐요, 난 일본에서 1년을 넘게 있다가 유럽으로 넘어 갈 준비를 몇 년 전부터 하고 있었다고요!”

"그거야 내가 알 바 아니잖아요!! 뜬금없이 왠 스케쥴 브리핑이야...?! 이건 누가 봐도 의심이 가는 상황이지 않아요? 벌써 몇 번째예요?

이 비행기 탄 거면 결국 목적지도 같다는 소린데.
아...뭐, 물론 여권 찾아준 건 고맙긴 했지만...”

“이 여성분, 진짜 답 없네...!! 이것 봐요.
그거 똑같이 한번 얘기해 봐요? 그렇게 치면 당신하고 나는 결국 같은 날에, 가는 목적지가 같다는 우연 밖에 없는 거예요...!!

해외여행 생전 안해본 모양이지만 외국에선 만난 한국사람 도와주는 거 자주 있는 일이고,

목적지가 같은데 그 시간 항공편 이거 밖에 없으니까 당연히 만날 수밖에 없는 거였단 말이라고요!!”

“응? 그런 가...”

“신주쿠 벌판에다 여권 떨구고 간 거 내가 공항에라도 안 가져 왔으면 당신은 국제미아 될 뻔 했던 거 알기나 알아요? 보니까 일본 말 하나도 못하더만!!”

“너무 가슴 속에 있는 말 그대로 뱉는 거 같은데,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일단 소리 안 지르면 되는 거죠?”

“그게... 그렇죠... 오케이, 난 수상한 사람 아닌 겁니다. 자, 이제... 조용히 흩어집시다."

그러고 보니 같이 들어와 있는 이 좁디 좁은 화장실. 혹시라도 대기자가 있다면 이상한 오해를 사버리기에 충분한 상황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그제서야 두 사람은 조그마한 소리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이거 봐요, 이해인씨? 이거... 상황이 좀 이상하게 돌아가는 거 같으니까, 먼저 나가서 눈치 보지 말고 자리로 바로 이동해요. 알았죠?”

아무 말 없이 끄덕이는 해인.
두 사람 모두 밖의 상황이 궁금했던 건지 문 밖으로 머리만 삐죽 내밀어 보았다.

문 밖에는 승객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호기심에 직접 귀를 대고 듣고 있는 사람까지 있었다.

“손님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무수히 화장실의 상황을 엿들으려는 승객들을 가르며 다가온 일본인 스튜어디스가 약간은 흥분한 낯빛으로 화장실에서 먼저 나온 해인에게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은 해인은 그저 멋쩍음에 미소만 지을 뿐.

화장실 안에서 몰래 기다리다 나오려 했던 세현이 스튜어디스의 말을 알아듣고 그만 흥분해서 뛰쳐나와 해명을 해댔다.

“그... 그게 아니라요!! 사실은 저... 저 여자 내 일행인데 거동이 좀 불편해서 잠깐 화장실에서 일보는 거 도와준 거예요... 다른 일 전혀 없습니다. 네..”

“저 손님 거동이 불편하시다고요? 정말입니까? 상당히 큰 소리가 오고 갔는데요?”

“아, 약간 성격적으로도 장애가 있습니다.
욱하는 스타일이랄까요, 저 여자...”

스튜어디스와 세현은 동시에 해인 쪽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자리에 가 앉은 채 창밖을 바라보며 딴 짓을 하는 척하던 해인.

두 사람과 눈이 마주치자 아무것도 모르고 싱긋 웃어 보인다.

‘이 멍청한 여자야! 아픈 척을 해야지 아픈 척을!!!’

“... 그러시다니 일단 신고는 접어두겠습니다.
앞으로 주의해 주세요. 다른 승객들께 불편을 끼치는 일 없도록 협조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예 죄송합니다.”

세현은 주의를 끌었던 승객들에게 일본어와 프랑스어로 미안하다는 말을 연신 해대며 자신의 자리로 가 앉았다.

뒷자리의 해인은 주변의 눈치를 살피다 슬그머니 앞좌석으로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이봐요, 아까 스튜어디스랑 나 쳐다보던데, 뭔 일 있었어요?”

“휴우... 별 일 없어요!!”

어이없는 해프닝을 겪었지만 그제서야 무언가 마음이 놓인 세현. 창밖을 응시하며 갑자기 풋 웃음이 지어졌다.

그리고 자신의 에피소드 노트를 꺼내어 지금의 해프닝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 파리 샤를 드 골 국제공항 도착까지 앞으로 10분입니다. 안전벨트를 매 주세요.]


서로의 의혹을 떨쳐내고, 프랑스 공항으로 향하던 비행기는 점차 목적지에 가까워 져 갔다.




***




“오빠, 요즘 왜 이래? 별 거 아닌 것 가지고 날카롭게 굴고...”

“내가 뭘...”

과거, 아버지처럼은 살지 않겠다며 일반 직장인이 되기를 택했던 세현.

기발한 창작력의 좋은 머리를 물려받았음 일까, 좌절하지 않는 끈기를 이어받았음일까.

세현은 보통의 구직자들이 모두 희망할 만한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데에 성공했다.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가 남기고 간 재산과 저작권 덕에, 평생을 편하게 보낼 수 있을 법도 했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응어리에, 그것은 반항기로 발전했다.

“야, 너 자꾸 귀찮게 할래? 내가 뭘 어쨌다고 사사건건 잔소리야? 싫어? 그럼 가, 가라고!!”

“아, 미안해 오빠, 알았어, 내가 예민했나봐.”

그리고 그 동안 무수히도 바뀌어 갔던 그의 연애 상대.

세현이 누구에게라도 마음을 주기로 했을 때,
현실적으로 완벽한 조건이라 할 만한 세현의 매력을 거부할 만한 그 또래 여성이란 그리 흔치 않았다.

출중한 외모 때문에 굳이 티를 내려하지 않아도 어디서고 튀어 보일 수밖에 없었던 세현.

거기에, 힘들게 취직을 하지 않아도 남부럽지 않은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그가 남들이 모두 가고 싶어 할 어려운 직장으로 굳이 향했던 이유는

[ 아버지 잘 만나 호의호식 하는 철부지 ]

소리가 듣기 싫어서였다.

그리고 대학 졸업도 전에 스스로 취업확정이란 어려운 일을 해낸 이상, 그의 조건에 있어 다른 결점을 찾아내기란 어려웠다.

적어도 외적인 조건이 인간성보다 먼저 평가되기 일쑤인 한국이라는 땅에서는.

“헤어지자, 더 이상 아무 감정이 없어, 너한테.”

“오빠, 왜 그러는데? 내가 뭐 잘못했어? 뭐 잘못했는지 말해줘야 알지!!”

“아니, 잘못한 거 없어. 그냥 싫어 진거지...
이런 감정으로 계속 만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 너한테도 잘못하고 있는 걸 거 아냐.”

“오빠! 좋다고 막 달려들 땐 언제고, 이제 와 감정 시들시들해졌다고 버리는 거야? 이 나쁜 새끼야!!”

“맘대로 해. 어쨌든 나는 이제 너 못 만나니까.
여기서 내려라.”

호기심에 접근했다가 싫증이 나면 매몰차게 떠나버리던, 꽤나 오랜 기간 반복되어 온 그의 연애 패턴.

그럼에도 헤어진 연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세현을 다시 찾곤 했다.

[ 뭐해 오빠? ]

“아, 진짜 구질구질 하게...”

현실 연애고 뭐고...
그는 자신의 생활 전반에 지루함을 느껴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인지 그에게는 어두운 기운만이 가득했다.

“세현아, 요새 좀 힘들어 보이는데 괜찮니?”

어느 날, 유일하게 그를 지지해 주었던 할머니가 걱정스러운 마음에 손자에게 말했다.

“할머니, 그런 거 아니에요, 힘들게 뭐 있어요? 하나도 안 힘든데!! 하하...”

“아직도... 니 애비가 밉지? 다 알아, 할미도...
인석아! 니 애비란 놈도 너 만한 때 똑같이 그랬어! 어째 그런 것도 똑같이 닮아가니...”

“아버지 얘긴... 안하면 안돼요? 좀...”

“이제 너도 클 만큼 컸는데 아비를 좀 용서해 주자... 그렇게 화만 가득해서 어디 네 살 길 제대로 찾아 가겠니?”

할머니는 손자의 속내를 꿰뚫어 보고 있던 건지.

이제까지 그의 인생 전반에 걸친 대부분의 행동은 분노와 화에서 근거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분노와 화의 대상 끝에는 늘 아버지가 있었다.

“내가 살아온 게 그런 걸 뭐...이제 와서 무슨 수로 아버질 용서해요...”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아버지의 책을 내밀었다.

온 세계로 퍼져나가 전혀 얼굴을 알지 못하는 외국인들조차도 명작이라 손꼽는, 베스트셀러
[ 그들만의 세상 ].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그러나 이 시점에서 할머니가 간절한 눈빛으로 건내 준 아버지의 책은 쉽게 거절할 수 없었다.

자신의 어두움에 원인을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때, 자신 역시도 변화가 필요하다 생각했기 때문일 지,

세현은 말없이 책을 받아, 서서히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단순히 책을 읽는 행위만이 아닌 아버지에의 이해는 점점 그를 창작자의 길로 인도하기 시작했다.





***





세현과 해인이 탄 비행기는 드디어 파리 샤를 드 골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선반위의 짐을 빼들고 웅성대며 내릴 준비를 하는 승객들.

이번에야말로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였는지 해인은 가방 속 자신의 여권을 한번 꺼내보고는 단단하게 다시 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다.

차례대로 줄을 서서 하차통로로 향하는 행렬이 공항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벗어날 때 즈음,

세현은 공항으로 이어진 통로의 투명한 유리로 비치는 파리의 바깥 풍경 보기에 바쁜 해인을 불렀다.

“저기요, 이해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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