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_ 자기 소개 ]
“ 일행은 무슨 얼어 죽을...!!”
세현과 해인의 오고가는 정담(?)에 오해가 생기기라도 한 듯, 별 의미 없이 내뱉은 일본 남성의 말에 대뜸 질색하는 두 사람.
불 붙었던 흥분을 조금 가라앉힌 후, 해인은 가만히 상황을 정리해 세현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니까... 제 지갑 다시 찾는데, 댁도 옆에서 같이 도왔다는 거죠? 알겠어요, 암튼 고마워요.
아, 그나저나 일본 분...! 계속해서 도둑 쫓아주시고...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어떻게 사례라도 해야 할 텐데...”
“아, 진짜, 답답하네, 정말...!! 이 일본 사람은 그냥 뒤에서 달리기만 했다니까! 도둑 물건 다시 훔쳐오는 게 보통 기술 가지고 될 것 같아?”
“아, 그 도둑보다 기술이 좋으신 분이예요?
그럼 당연히 그쪽 일 하시는 분이신가 봐요.”
일행은 아니라 잡아떼면서도 계속되는 두 사람의 티격태격 대화 앞에 그만 웃음이 새어나온 일본 남자.
가벼운 미소와 함께 차분히 입을 열었다.
“저... 카와모토... 라고 합니다.
두 분 모두 여기 온 지 얼마 안 되신 것 같은데, 또 뵐 수도 있겠네요. 여긴 동네가 작거든요. 그럼 나중에 또 뵈요. 저는 볼 일이 있어서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 예, 예... 정말 감사해요. 또 뵈요...”
갑작스러운 소개와 바로 이어진 작별인사에 당황하던 해인은 제대로 된 사례도 하지 못한 채, 이 사람을 그냥 보내고 말았다.
'카와모토'라고 하는 이 일본 남자.
삐쩍 마른 듯한 체형에 큰 키, 히피스러운 복장과 수염, 삐딱하게 눌러 쓴 모자...
외관상으로는 다분히 예술가와도 같은 느낌이었다.
머리에 살짝 걸쳐 쓴 모자, 까끌까끌 해 보일 정도의 수염과 부리부리 한 눈매, 오똑한 큰 코를 가진 그에게는 카리스마 이상의 어떤 아우라가 느껴졌다.
“이해인 씨? 였던 가? 아무튼, 여기까지 온 마당에 앞으로 서로 더 놀랄 일 없게 행선지 정도는 공유합시다.
그런 큰 짐 가지고 왔다는 건, 아마 여기서 하루 이틀 있을 게 아닌 것 같으니까...
난 여기서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 타요.
XX번지 X번 스트리트에 있는 숙소에 있을 예정이고요.
또 일본에서처럼 수상한 사람 취급하면서 주소 숨기지 말고, 알려줘 봐요.”
세현은 도둑에게 되찾은 해인의 분실물을 돌려주면서 말했다.
‘헉, x번 스트리트?! 뭐야, 같은 숙소잖아, 이 남자도 최저가 검색해서 나온 숙소 찾아보고 왔나... 어떻게 하지... 숙소까지 같단 말을 해, 말아...’
“음, 확인은 해봐야 되는데요, 아마 그 근처는 아닐 거예요."
잠깐의 망설임 끝에 뻔뻔하게 아닌 척을 하는 해인.
"흠, 아니면 이제 됐고...!! 그나저나, 질질 끌고 다니던 보라색 트렁크는 어디 있어요? 또 어디 내팽개친 건..."
"아!!! 맞다!!!”
넌지시 물어본 세현의 질문에 해인은 급하게 내팽개치고 온 트렁크가 생각나, 뒤도 안돌아보고 정류장으로 뛰어 돌아갔다.
"쟤 뭐야... 저 쯤 되면 진짜로 띨띨한 거라고 봐도..."
황급히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온 해인.
도둑맞은 지갑을 찾아오려, 급한 마음에 거칠게 내팽개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기는 했지만 가방은 다행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휴우우....!!!"
안도의 한숨과 함께, 허겁지겁 다가가 트렁크를 일으켜 세우며 꼭 끌어안은 해인.
안고 있는 그 자세 그대로, 무언가 가만히 생각하던 그녀는, 뒤를 흘깃 한번 살피고는 짐을 끌고 다시 역 안으로 들어갔다.
'숙소가... 같다는 건, 여기서 타는 버스까지 같다는 거 겠지? 에이...!!! 기다렸다가 저 사람 다음 버스 타고 가야지.'
역 출입구 안쪽의 바로 옆 벤치에 앉아 창밖의 상황을 예의주시하는 해인.
마침 해프닝이 있었던 저 멀리에서는 세현이 짐을 끌고 버스 정류장 쪽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거기 숨어 있는 거 다 보인다! 이 여자야!!'
이 구역에서도 같이 이동하게 될 것이 어색해 숨어서 세현을 먼저 보내버리려던 작전.
해인의 작전은 본의 아니게 출입구로 살짝 삐져나와있던,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 버린 보라색 캐리어의 노출로 인해 단박에 탄로나 버리고 말았다.
억지로 찾으려던 것도 아니건만, 세현이 그저 버스 정류장에 서서 역 쪽을 바라보자 한 눈에 들어와 버리고 만... 이 어설픈 숨바꼭질.
세현은 코웃음을 쳤다.
'후우, 저 여자, 숙소도 같은 방향 인가 보다...
어설프게 거짓말하는 꼬라지하고는...'
반면, 역 안쪽에서 완벽하게 이 남자를 속였다고 생각한 해인.
들키지 않으려 안쪽에서 멍하니 대기하고 앉았다가, 밖에 차 소리라도 나면, 창문 모서리 부근으로 빠꼼 얼굴을 내밀어 바깥 상황을 체크했다.
창문으로 훔쳐보니,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 세현은 다른 것에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버스가 오는 방향과 주변의 풍경들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10분 정도가 지났을까.
버스가 도착하고 출입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해인은 다시 창 너머를 몰래 지켜보았다.
사람들이 많이 들어 차 있는 버스의 내부, 그 버스가 지나친 정류장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갔지? 휴우... 나 참, 왜 내가 눈치를 봐야 되는 거야, 초장부터...”
그제 서야 큰 트렁크를 끌고 버스 정류장으로 다시 나온 해인. 나오면서도 혹시나 하며 이쪽저쪽을 살피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비행기가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는 밝은 대낮이었지만,
고속열차 이동시간과 이곳에 오자마자 생겼던 갖가지 해프닝들 때문인지, 시간이 많이 흘러 벌써 날은 어둑어둑 해져가고 있었다.
왜 인지 스산한 기운.
텅 빈 정류장 벤치에 혼자 앉아 괜히 꺼내 든 지도만 의미 없이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배차 간격이 꽤 긴 구간인 건 지, 기다리는 다음 버스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까 왔던 거 타고 갔었으면 딱 지금 쯤 숙소 도착해 있을 건데, 이게 무슨 사서 고생이래...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그러게...!”
“응!!??”
해인의 혼잣말에 대꾸해주는 누군가의 목소리.
엉겁결에 그냥 넘어갈 뻔 하다 섬뜩함이 온 몸에 스며들기 시작한 해인은 서서히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았다.
고개를 멈춘 장소에는 아이스커피를 쭉쭉 빨며 다리를 꼬고 앉은 세현이 있었다.
“어? 아.... 왜... 아직... 여기...??!!”
당황한 해인은 심하게 말을 더듬으며 세현에게 말했다.
“이거나 좀 마셔요. 아까부터 땀 삘삘 흘리고 완전 상태 메롱이더만...”
세현은 자신의 왼쪽 편에 두었던 새 아이스커피를 해인에게 건냈다.
그러고 보니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목이 타들어갈 정도로 갈증이 나있던 상황.
해인은 머뭇거리다 일단 목부터 축이기로 하고 냉큼 커피를 받아들었다.
“고... 고마워요!!”
유럽 본토에 와서 처음으로 마시는 커피 맛은 어떨 까.
그윽한 향과 은은한 뒷맛...을 느끼기는 커녕,
타는 목마름에 그냥 냉수마냥 들이 부었다.
[ 벌컥 벌컥... ]
“어지간히 목마르긴 했나보네.
유럽 더블 샷 커피를 원 샷으로 때려버리려고...”
조근조근 얘기하는 세현의 말을 듣고 나서야 뒤늦게 전해져 오는 혀끝까지 저린 쓴 맛.
“풉!!, 콜록 콜록!! 아, 써..!!”
“그거 봐. 천천히 음미하면서 마셔야지, 촌스럽게 커피를 무슨 게토레이 마시듯 하네...”
"왜 이렇게 커피를 쓰게 마셔요!? 이건 보약이네 보약 아주...!!"
"아니 왜 남의 취향을 가지고 야단이야, 싫음 돌려줘요, 아이스니 망정이지 뜨거운 거 였음 죄다 쏟아낼 뻔 했네 아주..."
"아...니,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목마르니까 마십니다. 아, 암튼 잘...마실게요."
해인은 이상하게도 말장난을 자꾸 하게 되는 세현과의 대화에서 다시 화제를 바로 잡았다.
"아까... 버스 왜 안탔어요?"
세현은 무심하게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대답했다.
"댁도 xx스트리트 가는 거죠? 그러는 해인씬 왜 안 탔어요?"
"내... 내가 언제 거기랬어요? 난 다음 버스 타야 되요."
"그래요, 이제 오는 버스 타면 되겠네, 나도 거기니까."
"무슨 소리예요? 난 거기 아니라니까!"
"다음 버스가 거기 가는 버스라고요!! 조사 안하고 오셨구만!! 이 뻥쟁이 같으니. 이거 노선 하나거든? 의심도 많아요...!! 참 나...!"
당황함에 화들짝 놀라는 해인.
"그...근데 전 거 왜 안탔어요?"
"아이고, 질문 참 많기도 하네, 뭐야, 댁이 지금 마시고 있는 거 그거! 커피 사오느라 놓쳤어요! 됐어요?"
해인은 요리조리 피할 구멍을 찾아봤지만 세현은 좀처럼 틈을 내주지 않았다.
"반대로 좀 물어봅시다."
세현은 기다리기라도 한듯 해인에게 물었다.
어떤 질문이 나올지 뻔히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의 해인.
분명 왜 자꾸 자기 피하냐고 물어 볼...
"내 이름... 뭔지 알아요?"
"네??"
"내 이름 아냐고요!!?"
"내... 가 당신 이름 어떻게 알아요!?"
예상과는 다른 질문에 당황한 해인. 습관처럼 어버버 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해인씨 이름 아는데, 왜 해인씬 내 이름을 모르는 건데요?"
"그거야 내 여권을 봤으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신의 여권을 해인에게 던진 세현. 해인은 엉겁결에 여권을 받았다.
"이...이걸 왜..."
당황스러워 하면서도 슬쩍 여권을 열어본 해인.
여권에는 [ 32세, 임세현 ] 이라고 쓰여 있었다.
"봤죠? 됐죠? 우리 이제 확실하게 서로 소개 한 겁니다...! "
해인 앞으로 다가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미는 세현. 손에 든 여권을 채가며 세현이 말했다.
"자 그럼 패스...!! 노멀하게 지냅시다. 노멀하게...
뭘 하러 왔는 진 모르지만...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데..."
해인은 가까이 다가온 세현의 얼굴에 낯빛이 붉어지며 뭔가가 화끈 달아오르는 듯한 기운이 올라왔다.
다시 쌩하니 고개를 돌린 세현.
"옷, 버스 왔다!"
두 사람은 함께 버스에 올라탔다.
이 전 차에는 승객들이 가득 차 있었거늘, 밤이 가까워 온 시간대가 애매해서 인지 이 버스 안에는 오로지 둘 뿐.
두 사람은 뒷자리에 거리를 두고 어색하게 떨어져 앉아 서로 시선을 피했다.
차 창 밖에는 이미 짙은 어둠이 깔린 상황,
두 사람 모두 풍경 핑계를 대고 밖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그곳에는 그저 어둠 뿐 이었다.
소문으로 듣던 프랑스의 불빛 가득한 밤거리는 이 시골 마을에선 적용이 안 되는 듯한 모양.
[ 치이잉 ]
이래저래 서로를 신경 쓰느라 얼마나 걸린 건지도 모르게 이동한 버스는 이내 목적지에 다다라, 두 사람은 버스에서 내렸다.
듬성듬성 늘어선 노란 불빛의 가로등을 따라 늘어선 돌길.
그곳을 말없이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
"참 오래도 간다..."
한국의 한 대형서점.
기태는 베스트셀러 가판대에서 꽤나 장기 집권 하고 있는 세현 아버지의 소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이제까지 수 없이 봐왔을 그 소설을 다시금 꺼내어 읽어보았다.
"스테디셀러... 한국에서 이런 작가 나오기가 쉽지 않을 테니, 나 늙어 죽을 때까지도 이건 이 자리에 있겠지 아마도..."
말없이 책을 빠르게 넘겨보던 기태는 문득 뭔가 생각이라도 난 듯, 서점 내 소설 섹션으로 발을 옮겨 다른 책 한권을 집어 들었다.
책을 들고 다시 베스트셀러 가판대로 돌아온 기태.
뭔가 심각하게 고민하는 듯 하더니 좌우 앞뒤로,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베스트셀러인 [ 그들만의 세상 ]이 놓여있던 자리에 다른 곳에서 가져온 책을 바꿔치기 해 놓았다.
한 발짝 떨어져 자신이 바꾼 책이 베스트셀러 가판대에 놓여있는 장면을 지켜보다가 누가 볼 새랴 부리나케 서점의 출구로 향했다.
'아, 어린 애냐...이 병신아...'
기태가 바꾸어 놓고 온 책.
그것은 지금 그다지 '잘 팔리지 않는' 기태 본인의 소설 이었다.
"그래도 뭐 훔친 것도 아니고 그냥, 장난 좀 쳐 본 건데 들켜도 뭐라 하진 않겠지..."
그저 장난일 뿐이라고 얘기하지만, 더 깊은 속내로 '장난'만은 아니었기에, 일부러 혼잣말로 소리 내어 변명을 해 보이는 기태.
그렇지만 너무도 당연히, 베스트셀러 코너에 늘 있어왔던 책 한권이 바뀌어 있다는 것에 사람들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에 관해 시비를 거는 이도, 무어라 채근 하는 이도 없었건만, 기태는 다급하게 서점을 나왔다.
***
"16세 한.기.태.
귀하는 청운 중학 스토리 창작 콘테스트에서 우수한 성적을 보였기에 이 상을 수여합니다."
"감사합니다."
"문장력이나 이야기 깊이가 남다르군 그래.
독서량이 상당해 보이는데 어떤 책을 주로 읽는 편인가?"
"예, 이것저것 가리지 않는 편이지만 특히 소설
[ 그들만의 세상 ] 좋아합니다.
세계적으로도 유명하시기도 하지만, 그 작가님이 제 롤 모델 입니다!! 수도 없이 읽었습니다!"
중학교 시절, 글쓰기 대회에서 수상하며 자신의 포부를 밝히던 기태.
"그런가, 확실한 취향이 있군 그래, 아, [ 그들만의 세상 ] 말인가 ? 그 작가 아들이 아마 우리 학교 3학년인가 그렇지 아마?"
"작가 임형우 씨 아드님이...우리 학교라고요??"
이른 나이부터 꿈꾸어 왔던 작가라는 직업.
한창 연예인이나 친구들하고의 놀이에 빠져 붕 떠있을 나이부터 기태는 작가를 꿈꾸어 왔었다.
친구들은 자신들과는 뭔가 다른 기태를 이상하게 여기기도 했지만, 늘 확고한 기태로서는 그런 시선 따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네가 임세현이니? 혹시 아버님이 소설가 임형우씨?"
이어폰을 낀 채 공부를 하고 있던 세현은 자신을 찾는 누군가를 천천히 돌아보며 날카로운 눈빛을 흘겼다.
"뭐야, 넌?
방문하셔서 응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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