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_ 둥지 떠난 새끼 새들]
[ 드르륵, 드르륵... ]
남프랑스 아를.
세현과 해인은 각자 짐을 끌며 가로등을 따라 나란히 걸어갔다.
이미 온 동네가 어둠에 쌓인 밤 시간.
비교적 일찍 가게 문을 닫는 유럽의 분위기에,
처음 맞는 프랑스의 밤 풍경은 더없이 고요했다.
그저 끌고 가는 두 사람의 짐 트렁크 바퀴소리와 울퉁불퉁한 바닥에 끌리는 소리만이 작은 울림을 만들어 낼 뿐.
얼마나 같이 걸었을까, 버스에서부터 시작되었던 침묵을 깨고 해인이 세현에게 물었다.
“저... 세현씨? 같은 X번 스트리트인 거는 알겠는데요, 이 길 맞나요?"
"맞을 걸요. 아마, 얼핏 기억 나는 거 같아."
"기억? 여기서 언제 살았던 것 처럼...얘기하네요?"
"살았어요, 까마득한 옛날이긴 해도..."
"오...진짠가... 근데 혹시 그거 알아요? 요 근처가 소설 [ 그들만의 세상 ] 배경인거?"
세현은 곁눈질로 힐끔 해인을 쳐다 보았다.
낡아빠진 책 들고 다니더니, 역시 그 소설 팬이었구나...
해인은 가로등 불빛이 만든 골목의 야경을 뿌듯하게 바라보며 얘기 했다.
"아무 말 없는 것 보니 모르나 보네, 생전 책 같은 거 안 읽게 생겨가지고... 그런 게 있어요, 한국 작가가 쓴 소설인데 세계적으로 히트 쳤던 작품."
"아... 그래요?"
"너무한다...! 그 유명한 작품을 모르다니...! 서점가면 어디든 베스트셀러 칸에 꽂혀 있는데...!!"
"본...적은 있어요, 뭐...아, 다왔네. 저기 좁은 골목 보이죠? 진입해서 두 번째 있는 건물. 아마 저기 맞을 거예요."
"아, 여기구나...!! 와, 골목 분위기 봐... 예술이다."
"프랑스어는 할 줄 알아요? 집 주인한테 입실 수속은 혼자 할 수 있겠어요?”
"할 수 있어요!! 뭐... 쳇, 신경 끄시죠. 자, 그럼 긴 여정 여기서 마쳐야겠네요. 우여곡절 많았는데 아무튼 여러 가지로 고마웠어요."
"그래요, 서로 뭐, 뭘 하러 왔는지 캐묻긴 좀 그러니, 어찌됐건 원하는 바 이루고 가길 바래요."
"예, 그럼 가요."
세현과 해인은 숙소에 도착해 집주인에게 예약을 확인 후, 각자 방을 배정 받았다.
원래부터 휴양지로 유명했던 프로방스 지역의 이 작은 도시는 [그들만의 세상] 소설의 영향으로 부쩍 관람객이 늘었었다.
그럼에도 화려한 다른 프랑스 볼거리에 밀려 방문 1순위로는 잘 들어가지는 못하는 이 곳 [아를].
프로방스 지역 내에서도 작고 조용하기로 꼽히는 지역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건물의, 2층 방으로 들어가게 된 세현은 낑낑대며 짐을 방안으로 옮겼다.
"후우, 여기가...!!"
침대 하나에 옷장, 부엌, 화장실에, 남은 공간이 10평 남짓 되는 작은 방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손님이 한동안 없었던 건지 살며시 먼지가 쌓여 있기는 했지만.
"후우... 이거, 빨리 내 방으로 만들어 놔야겠어!“
세현은 짐을 풀지도 않은 채 창문을 열고 방 청소를 시작했다.
청소 중 자연스레 시선이 향한 창밖.
좁은 골목의 한편에 자리 잡은 작은 건물이라 그런 지, 창밖의 뷰가 그리 멋지진 않았다.
그저 세현이 있는 건물과 비슷한 모습을 한 건물들이 나란히 배치해 있는 모습.
5미터도 안 되는 간격으로 들어선 건물들, 더군다나 창문 너머로 보이는 건 바로 다음 건물의 벽들과 창문뿐이었다.
건물까지 들어오는 골목 진입로는 늘어서서 켜져있는 조명이 더해져 아기자기한, 스토리 가득한 풍경이었으나
방에서 보는 창 너머의 모습은 그저 시야를 가린 건물 벽.
“이 경치 좋다는 프랑스에 와서 아침에 일어나 이 답답한 뷰를 맨날 봐야 되는 거야? 에잇...”
구석구석 앞으로 지내야 할 집 내부를 점검하던 중, 열어놓은 창문 맞은 편 건물의 창문에서 불이 켜졌다.
“꺄아아아악!!!!”
“뭐, 뭐야 뭐...!!!”
가뜩이나 낯선 장소 안에서 싱숭생숭하게 묵은 먼지 맡아가며 방 청소 중 이거늘,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들려온, 귀에 꽂힌 여성의 비명 소리.
세현은 황급히 창밖을 확인했다.
불이 켜진 반대편 건물 창가 안쪽인 듯 했다. 분주하게 이쪽저쪽으로 움직여대는 실루엣.
"뭐, 뭐야... 저 집... 강도라도 든 건가, 치안에 문제있는 동네는 아닐 텐데..."
[ 퍽! 퍽! ]
이윽고 둔기로 누군가를 내리치며 세워져 있던 집기들까지도 우당탕대며 넘어지는 소리...
계속해서 이어지는 알 수 없는 소란에 세현은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누가... 싸우나 본데... 이거, 집주인한테 얘기를 해야 되나..."
크고 작은 몇 번의 소음이 더 울려 퍼진 후, 마침내 진정이 되기라도 한 듯, 건물은 다시 고요를 되찾았다.
큰일이라도 벌어진 것 같은 앞집의 소동에 긴장되기는 했지만, 소란이 잦아들자 언제 그랬냐는 듯 동네는 다시 평온한 분위기로 돌아왔다.
잠시 의아해하던 세현은 다시 청소를 재개해 꼼꼼하게 새 보금자리의 세팅을 이어갔다.
[ 덜컥 ]
순간, 열어두었던 창문 밖으로 조금 전 소란이 일어났던 것으로 추측되는 방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음? 뭐야, 밤에 시끄럽게 진짜..."
처음으로 맞이한 이 불친절한 이웃의 얼굴을 확인하려 힐끔 창문 너머를 본 세현.
창문 문턱에는 얼빠진 모습으로 기대어 한숨을 푸욱 내리쉬는 한 여자가 보였다.
“살림 다 때려 부순 게 저 여자...?"
수상한 기운에 세현은 창문 쪽으로 가까이 와 고개를 쭉 빼고 눈 앞 창가의 여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헉, 뭐야 저 여자!! 여기서도 앞 뒤 자리인거냐!!!??’
세현의 방의 정면 건물, 2층 창가에 기진맥진하여 산발에 거지꼴을 하고 있는 여자는 해인이었다.
무슨 일인지 고개를 푹 떨군 채 하나마나한
헛 손 부채질을 해대고 있다.
[ 똑똑똑... ]
세현은 자신의 방 창틀을 두드리며 해인의 시선을 유도했다. 첫 번에 눈치 채지 못한 해인.
“여봐요!”
5미터도 안 되는 건물 간격.
가볍게 소리치면 들리지 않을까 생각에 이번에는 해인 쪽을 향해 소리를 질러보았다.
“응?”
해인은 어디선가 들려온 한국말에 화들짝 놀라 여기저기 고개를 돌려가며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댔다.
돌고 돌던 해인의 시선은 곧, 맞은 편 건물 창가의 세현에게 고정되었다.
“헉! 뭐...뭐예요...!!? 왜 또 거기 있는 거야!!??”
어쩌다보니 여정 내내 같이 있었던 두 사람.
이제는 뭔가 친근하기까지 하다.
“난들 알아요!? 숙소 규모가 작은 걸 어떻게 해!!
뭐, 같은 숙소면 또 마주칠 수도 있는 거죠.
요런 정면 뷰로 또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이러니까 스토커 소리 안 나오게 생겼어요? 스토커 아닌 거 알았어도 스토커 같은 상황이지 않아요? 이건...”
“에휴...이젠 지겨우니까 그냥 스토커라 칩시다...!! 근데. 뭐예요, 그 꼴이... 뭔 일 있어요?
분명 혼자 온 걸로 봤는데, 거기서 아는 사람 만난 거예요? 오자마자 왜 대판 싸우고 난리야. 언제, 꿔 간 돈 안 갚았구나?"
맞은 편에서 고개를 들어 세현을 쳐다보고 있는 해인은 그야말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뭘 했던 건지, 헝클어진 머리, 윗옷에 단추는 풀어지고 다크 써클까지 내려와 앉은 느낌.
세현의 말에 급하게 머리를 정리하고 풀어진 웃옷 단추를 다시 여미는 해인.
“어맛!! 큰일 날 뻔 했네. 마... 만나긴 누굴 만나요!! 그 방에는 바퀴벌레 없어요??!! 불 켰는데 시커먼 게 떡 가운데 앉아 있길래 뭔가 하고 가까이 갔다가 깜짝 놀랐네, 아주...”
“아, 바퀴벌레... 왜요, 처음으로 만난 프랑스 현지 충들 일 텐데 인사나 나누지 그랬어요? 그런 거 가지고 쫄긴..."
“그냥 놀란 거예요. 방심하다가!! 바퀴벌레 같은 거 무서워하는 내숭과 아니라구요, 난!! 인사요? 했죠. 보자마자 작별 인사해 드렸는걸 뭐!!
“아 그거 때려잡는다고 그렇게 쿵쾅 댔구나...
대충 다시 마주칠 거란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엎어지면 코 닿을 위치로 이웃 된 거 같은데 잘 지내봅시다. 까짓 거.”
“쳇, 그럽시다. 까짓 거. 그럼 일 봐요. 아...진짜 피곤한 하루였다...”
기나긴 여정 끝에 기나긴 타지 생활까지 동행을 하게 될 것 같은 신기한 인연을 창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각자 방으로 들어왔다.
거의 모든 짐 정리를 끝내고 침대에 누워 간만에 여유를 찾은 세현.
“ 하아...정리하고 인제 딱 내방 같이 만들어 놨더니 아직까지 일본에 있는 건지, 어디 와 있는 건지 헷갈리네... 아...!!”
세현은 문득, 일본에서 자신을 떠나보내며 눈물을 보이던 아영이 생각났다.
"가시네... 울긴...평소에 쎈척은 혼자 다하더니..."
올라오는 뭔가 짠한 감정, 세현은 곧바로 전화를 집어 아영에게 전화했다.
"여보세요."
"아영 선배님, 저 잘 도착했습니다."
"뭐 이리 빨라, 유럽도 별거 아니군 그래."
"풋, 오라버니 간다고 슬퍼서 울고불고 여자 흉내 내더니, 금새 다시 돌아왔네?"
"죽을래? 내가 언제 울고불고 했어? 벌써 딴 여자 만나서 나랑 헷갈리는 거 아냐? 내가 그럴 위인이냐!?"
"알았다, 알았어! 거기 낮이지? 밥 먹었어?"
"칫, 새삼스럽게 의식주는 챙겨주고 난리야,
일 때문에 이동 중이지 뭐... 빵 쪼가리 하나 우겨 넣으면 식사 땡이지. 뭘 꼬박꼬박 챙겨 먹니...!? 그러는 너는?"
"기내식으로만 몇 끼를 때웠더니 별 생각이 없네. 여기 지금 밤 9시야."
"아, 당연히 시차가 있겠지. 지금 막 도착한 거야?
피곤할 텐데 전화를 다 주셨어?"
"도착했다고 선배님께 인사드려야지요. 후훗."
우려와는 달리 평소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은 아영.
엊그제 레스토랑에서 수다를 떨던 말투 그대로의 모습에 세현은 안심했다.
“별 일 없이 잘 갔어? 엄청 시간 걸렸을 거 아냐?”
“별 일...아, 뭐 나한테 별일이 있진 않았는데,
이상한 여자 하나 만나가지고... 좀 재미있긴 했어.”
“이상한 여자? 또 뭔 썸띵 생긴 거야? 일하고 글만 쓴다고 한동안 잠잠하더니, 움직이기만 하면 해프닝이 일어나는 구나. 인생 참 피곤하다 피곤해...“
“후훗...! 왜 이렇게 과민반응이야... 그냥 오면서 재미있는 애 만났다고...”
“흥, 그래 뭐. 어떻게, 일은 언제부터 시작하게?”
“아, 뭐 지금 막 왔으니까 내일, 모레 정도까진 좀 구경 좀 하다가 찾아가 보려고.”
“참, 벌어놓은 돈도 있겠다, 안 그래도 서포트 해줄 집안도 있으면서 왜 거기서도 사서 고생이야.
실컷 준비하다가 인제 본격적으로 시작하러 간 거면 일하지 말고 글만 쓰지 왜 또...”
“돈도 돈이지만 뭐 그것 때문만은 아니니까. 이쪽 사람들은 어떻게 사나 보면서 글 쓸 거리도 늘어나는 거지 뭐...!
지금 방에 있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게 반대편 건물 벽 밖에 없어. 훗, 이런 풍경에서 글만 쓰면 정신병 걸릴수도 있어! 잠만 자야지, 여기선.”
들어온 지 몇 시간 되지도 않는 타국이었지만 방정리를 끝내 놓고 익숙한 목소리를 들어 편안함을 느껴서 였는 지,
세현은 누워서 전화를 하다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어이 임세현, 야, 야... 이거 왜 갑자기 말이 없어?”
“푸우.....”
“어랍쇼? 이거 뭐야, 자고 있잖아.
나만 신나게 떠들었네, 이거... 자라! 또 연락하고...!”
뒤늦게 찾아온 피로에 죽은 듯이 잠든 세현.
다음 일을 하러 가는 중이었던 아영은 세현의 전화를 끊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새끼 새를 야생으로 보낸 뒤의 어미 새 같은 느낌이 이런 비슷한... 응?’
[ 부르르르르르 , 부르르르르르 ]
아영의 전화가 또 다시 울려댔다.
‘잉? 나 오늘 왜 이렇게 인기가 많니...?’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영이니? 나 해인이야!! 나 지금 유럽이다!!!”
‘풋... 이것들이 뭐하자는 거야... 챙겨야 될 새끼 새들이 왜 이렇게 많아 졌어 갑자기...!’
방문하셔서 응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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