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그곳에서...<10화>

[ 10화_ 시작, 프랑스...! ]

by youtoo

“아영아!! 나 지금 유럽이야!!”

격앙된 반가움에 전화기 너머로 소리를 질러 댄 해인.

아영은 뭔가 심하게 들뜬 해인을 진정시키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헤이, 헤이...! 어리바리...! 알았으니까 진정하고...!! 거기 지금 밤 아니야? 너무 큰 소리 내면...”

“아, 그렇지... 미안. 아무튼 덕분에 지금 잘 도착했어. 근데 여기 밤인 거 어떻게 알았지...?"

“헤헤...! 희한하네. 나 아는 다른 사람도 방금 전에 유럽 도착했다고 전화 왔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너한테도 바로 연락이 오지..? 이거, 혹시 둘이서 같은 비행기 탄 거 아냐?”

“풋, 누군지 몰라도 유럽 갔다고 했으면 이 동네로 바로 오긴 쉽지 않을 걸, 여긴 유럽에서도 좀 특별한 데라...아마 비슷한 시간대 비행기였나 보지 뭐.”

일본에서 여권을 잊어버려 공항에서 겨우 찾은 사건, 도착한 마을에서 지갑을 도난당할 뻔 했던 사건... 해인은 짧지 않았던 여정 중의 해프닝을 모두 아영에게 보고했다.

“유럽에서 여행객들 왜 귀중품 조심하라고 하잖아, 근데 내가 오늘 당할 뻔 했어!! 어떤 놈이 지갑을 들고 튀더라고! 도와준 사람만 없었어도 큰일 날 뻔 했잖아. 돈 잔뜩 넣어놨었는데...

아, 여기서 어떤 일본 남자가 도둑 따라가서 도와줬었는데, 진짜 멋있게 생겼더라...!”

“일본 남자? 유럽에서 일본 남자를 만났다는 거야?”

“응, 이름이... 뭐랬더라...? 들었었는데... 암튼 뭐랄까, 예술가 같은 느낌? 터프한...뭔가 더티섹시 같은 느낌이랄까...

유럽에 와서 예술하는 동양인들 많다고 들었는데, 스타일도 그렇고, 틀림없이 무슨 아티스트인 게 분명해...!!"

“예술가 느낌의 일본인? ... 음, 그런 놈들이 어떻게 보면 제일 위험 할 수도 있어!! 도움 준답시고 접근해서 뭘 할지 모르잖아.

혹시 모르니까, 그런 애들 다시 만나거든 좀 멀리해. 원래 외국에서 만나는 같은 동양인들이 제일 위험하다더라!!”

“음? 뭔가, 경험에서 나온 충고...? 너 일본에서 무슨 일 있었니?"

“에휴... 말하자면 길고도 길지요... 꺼내봤자 좋은 얘기도 아니니 넘어가자...”

“음...하긴, 넌 외국생활 그렇게 오래했으니 별 일 다 겪었을 만도 하지...”

이후로도 한참 동안이나 프랑스에서 맞는 첫날의 잠자리가 두려운 해인에게, 말동무가 되어 주었던 아영.

시공간을 초월한 원거리 수다는 아영의 일하는 곳 바로 앞까지 와서야 끝을 맺었다.

전화를 마친 후, 해인은 바로 잠을 청해 보았지만,
몸으로는 몹시도 피로를 느끼면서도, 늘 꿈꾸던 곳에 와 있다는 설레임과 기대 때문인지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이 후로도 한참을 뒤척이다 겨우겨우 눈이 감긴 해인.





*






다음 날,
처음 맞는 프랑스의 아침.

예상보다 일찍 눈을 뜬 세현은 바로 편한 복장으로 외출 준비를 하고 숙소를 벗어나 좁은 골목길을 빠져 나왔다.

골목으로 나란히 늘어선 자그마한 상가들에서는 나이가 지긋한 상인들이 장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매일이 같은 모습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듯한 이곳의 상인들은, 조금도 서두름 없는 여유로운 모습들이었다.

처음보는 자신과 눈이라도 마주칠 때면, 미소를 아끼지 않기에 자연스럽게 인사를 주고 받게 된 세현.

프랑스냐, 유럽이냐를 떠나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늘 도시에서만 있어왔던 세현에겐 시골 마을의 이 여유로운 정서는 다소 낯설었다.

프로방스 지방의 작은 마을 아를,
여행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몇몇의 명소들보다 더 재미난 볼거리라는 아기자기한 골목을 지나쳐 한참을 걸어 내려오니,

어렴풋이 기억 속에 갇혀있던 한 거대한 건축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현재까지도 투우 등의 행사장으로 이용되고 있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원형 경기장.

“아...!”

세현은 콜로세움과도 비슷한 형상의 이 경기장을 눈앞에서 마주하자, 조금 더 명확해진 모습을 한 아버지와의 기억이 소환되어졌다.


거대한 원형투기장의 가장 위쪽 공간에서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아를의 풍경.

그 공간에서 아버지는 세현의 목마를 태워 옹기종기 작고 예쁜 집들이 밀집되어 있는 도시의 전경을 보여주곤 했다.

약간은 바랜 듯한 벽면의 재질, 위에서 보이는 다양한 색의 지붕들과 함께 파란 하늘이 대비되어 보이는 장면.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 모습만은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얼마나 변했을지, 세현은 그 풍경을 다시 확인하러 입구를 통해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성인이 된 지금 봐도 어마어마한 규모의 내부, 그 당시라면 얼마나 더 호들갑을 떨었었을 지 짐작이 갔다.

무려 25년 만에 다시 오른 장소.
원형 경기장의 꼭대기에서 내려다 본 아를의 풍경은 어렴풋한 기억 속의 그것과 많이 다르지 않아 보였다.

이건 다행이라고 해야 할 지, 실물을 확인하자 더 선명해지기 시작한 그 때의 기억들...

아버지와 함께 했던 이 공간을 다시 찾은 세현은
늘 가지고 다니던 메모장을 꺼내어 자신의 감상을 적기 시작했다.

특별한 순간마다 그때그때 떠오르는 감상과 감정들을 기록하는 세현.

그렇게 기록된 메모들은 하루를 마칠 때 즈음, 자신의 보물 1호, 경험노트에 옮겨 적어두곤 했다.


그렇게 한참을, 오래된 기억들과 함께 주변을 거닐던 세현은 [ 레퓌 블리크 ]라 불리우는 광장의 한 까페 야외 테라스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오전 일찍이는 많지 않더니 슬슬 낮 시간이 가까워 오자 늘어나기 시작한 아를의 인파.

관광객들이 대부분인 듯한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은 아를의 대표 명소를 차례차례 탐방 중 인듯 했다.

압도적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서양인들.

"그렇지, 나처럼 다른 목적 있는 사람 아니고서야 여기 오는 동양인은 잘..."

그러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현의 눈앞으로 동양인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나 [ 보기 힘들다 ]는 이 동양인은 얼굴이 사색이 된 채, 이리 저리 눈치를 보며 종종걸음을 하고 있었다.

"아주... 매일을 만나는구나, 매일을... 참 나...!"

큰 유럽인들 틈에 자그마해 더 눈에 띄는,
왜인지 광장의 건물 벽에 손을 더듬더듬 짚어가며, 괴상한 걸음걸이를 선보이고 있던 동양인은 다름아닌 해인이었다.

세현은 몰래 해인의 바로 옆까지 다가가 소리쳤다.

"Qu'y a-t-il pour votre service!?"

화들짝 놀라 소리나는 방향으로 바로 고개를 돌린
해인.

"에?! 아...뭐.. 뭐예요, 장난치지 말아요!! 으... 으..."

가까이 와서 보니 해인은 식은 땀까지 흘려가며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있었다.

"여기서 뭐해요? 어디 아파요? 얼굴이 영..."

해인은 이리저리 눈빛을 돌리다가 조용히 세현에게 물었다.

"저...여기 근처에... 화장실 없나요..."

사정을 전해 듣고 피식 웃어 보이는 세현.

"아, 화장실 때문에 그랬구나... 큰 거요? 작은 거요?"

"쉿!! 조용히 해요!! 알 거 없잖아요!! 근처에 화장실 사용할 수 있는 데 혹시 알아요??"

"여기 한국말 알아들을 사람 아무도 없어요, 나 참...뭐 창피하다고..."

해인 역시 관광 중,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생리적 현상에 공중 화장실을 찾아 공원으로 보이는 이곳에까지 오게 된 듯 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발견하지 못해, 곤란을 호소하고 있던 모양.

"잠깐만 있어 봐요."

세현은 자신이 앉았던 테라스의 카페 안으로 들어가 커피를 두 잔 사와, 다시 야외 파라솔 자리에 앉았다.

"뭐... 하는 거예요? 화장실 간다는데 왠 커피를..."

"3651! 저 까페 들어가서 오른쪽 벽 쪽에 3651번 누르고 화장실 들어가요."

"아...! 그래서...아... 알았어요!!"

급하게 카페로 뛰어 들어간 해인.
좀 지나고 나서야 해인은 멀쩡해진 모습으로 세현이 있는 곳으로 나왔다.

"이제야 좀 살아났네. 근데 작은 거였어요,
큰 거였어요? 여자들은 원체 화장실 시간이 오래 걸려 알 수가 없어...!"

"몰라요!! 그런 건 왜 굳이 물어보고 난리야..!! 민망하게 시리..."

"알았어요, 알았어...! 이거나 마셔요. 이거, 본의 아니게 두 번이나 커피를 같이 마시는 사이가 됐네?"

세현은 빨대로 쭉쭉 빨며 조금 전에 사온 커피 한 잔을 해인에게 내밀었다.

"고...마워요, 프랑스에선 화장실 가려면 이렇게 뭐 사지 않으면 안 되는가 봐요..."

"뭐, 차차 얼굴 알아가면 그 정도는 허락해 줄 지 모르겠는데, 처음보는 사람한텐 좀 박하지 않겠어요? 우리나라가 그런 건 참 좋았는데 말이죠...!"

해인은 세혜에게 넘겨 받은 커피를 마시려 컵을 입에 대려다 뭔가 생각난 듯 물었다.

"아 맞다...이 커피도 또 무지하게 쓴 건..."

"안 써요, 저번에 보니까 쓴 커피 잘 못 마시더만...! 좀 연하게 달라 했어요!"

"암튼... 고마워요. 아, 커피 값 드릴께요."

"됐어요, 뭐 다음에 내가 화장실 가고 싶을 때 얻어먹는 걸로 합시다...!"

(쳇, 또 제대로 놀릴 거리 하나 걸렸네,
어떻게 이럴 때만 나타나...)

"사람 앞에 두고 볼륨 조절 안 되거든 혼잣말 하지 맙시다. 다 들립니다."

혼잣말마저 들킨 해인은 세현에게 눈을 흘기며 그저 애꿎은 커피만 들이켰다.

"많이 좀 다녔어요?"

세현이 뾰루퉁 해있는 해인에게 물었다.

"글쎄요, 유명하다는 데를 돌아다녀 보고 있긴 한데 그리 크진 않네요."

"해인씨, 여기 관광하러 온 거 아니죠?"

"에? 왜, 왜요...?? 내가 언제... 얘기 했던가..."

갑작스런 세현의 예측에 화들짝 놀라는 해인.
세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해인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풋, 뭘 그렇게 놀라요? 그냥 그런 거 같아서...
보통 프랑스 여행한단 사람들 루브르, 에펠탑, 개선문 보러 파리로 먼저 가지 이 동네론 먼저 잘 안오잖아요."

"아...언제 기회 되면 다 보고는 싶죠. 근데 먼저 할 게 있기도 하고..."

"흐음...역시 그냥 여행객은 아니었구나. 뭐 하러 온 모양이죠? 근데 이렇게 어리바리 해서야..."

"또 놀리는 거야?! 어떻게 그 쪽 만날 때 어쩌다 자꾸 그런 일들이 생겨서 그런 거지! 내가 얼마나...!!"

"음...뭘 하러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우선
요 근처는 한번 돌아 다녀봐요. 프로방스 안쪽 동네라도...근방에 예술가들한테 영감을 많이 준다는 풍경들이 넘쳐나거든요."

"예술가라... 음, 근데! 그러는 세현씬 뭘 하러 온 사람이에요? 그렇게 도사마냥 다 아는 것처럼 얘기 하는 게 수상쩍기도 하고...!!"

"나? 음... 뭐랄까... 그냥... 일단 자유로운 영혼의 크리에이터라 칩시다. 아직까지 떳떳하게 밝힐 입장은 아닌지라..."

'입장...? 그러고 보니 이 사람, 일본에서 있던 사람이잖아, 혹시 한국에서 죄짓고 해외로 떠돌고 있는 사람은...'

"또, 또!! 보인다, 보여!! 해인씨 지금 무슨 범죄자
도피 같은 거 생각하고 있죠? 참 상상력 빈곤해..."

"내...내가 뭐라 그랬어요?! 별 꼴이야 진짜...!”

어쩌다 보니 카페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게 된 두 사람.

세현은 이내 시계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바로 잡았다.

"자, 그럼 동네 주민과의 반상회는 여기까지 할까요? 우연히도 이렇게 자주 마주치는 거보면 댁하고 나, 무슨 인연은 인연인 모양인데 서로 연락처나 교환합시다."

"연...락처요? 음... 알았어요."

마지못해 연락처를 알려준 해인.
두 사람은 그렇게 헤어져 각자 볼일을 보러 이동했다.



해인은 다시 혼자가 되어 지도를 들고 이리저리 방황하기 시작했다.

"요 근처라는데... 아 저기 보인다!!"

해인은 아를 시내의 갤러리를 찾아 돌아다니다 교회 안에서 열리고 있다는 젊은 화가들의 전시회의 소식을 접해 그곳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생 트로핌 성당.
세현이 들렀던 원형 경기장과 함께 아를의 랜드 마크로서 관광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거대한 건축물이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시선을 사로잡는 웅장한 자태.

"우와...!! "

화려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내부와 유려한 조각 장식들,

성당 내부에서 열린다는 자그마한 전시회를 보러 온 해인이었지만, 국내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건물 규모에 먼저 압도되었다.

얼마 가지 않아 내부에서 모습을 드러낸 소규모의 미술 전시장 모습에 화색이 돌기 시작한 해인.

전시 된 한 작품, 한 작품... 유심히 관찰하며 소지하고 있던 메모장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해인은 전시되어 진 여러 작품 중 특히 한 작품에 빠지기라도 한 듯 그림을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

가까이로 다가가 위아래를 뚫어지도록 응시하며, 메모만으로 만족하지 못했는지, 관리자의 눈치를 살피다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림에 정신이 팔려 그저 신이 나 있던 해인은 자신의 뒤쪽으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짐을 인식하지 못했다.

해인의 뒤로 점점 가까워지는 수상한 발자국 소리, 이윽고 길다란 그림자는 해인의 앞으로 나타나 소리질렀다.

“Coucou,qu'est-ce que tu fais l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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