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_ 운명의 조력자...?! ]
꿈에 그리던 프랑스 아를에서 맞이한 첫번째 미술작품 전시 관람.
[ 찰칵, 찰칵 ]
해인은 전시장에 진열된 작품들 중 특히 마음에 드는 작품 하나에 이끌려, 넋이 나간 듯 사진까지 찍어대던 중이었다.
[ 저벅 저벅... ]
성당 안쪽, 인파들의 웅성거림 때문에 뒤쪽의 상황은 전혀 신경 쓰지 못했었는지,
주변 아랑곳 않고 그림 속 이야기에만 빠져들던 해인의 뒤편으로는 알 수 없는 그림자가 서서히 접근해 왔다.
“Coucou,qu'est-ce que tu fais là!!”
갑작스레 해인의 옆으로 파고들어 양손을 벌려 앞 그림을 가로막으며 소리치는 이 검은 그림자의 주인공...!
그렇지 않아도 어두컴컴한 성당 전시장 분위기 속에서, 해인은 마치 몰래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어린 아이 마냥 깜짝 놀라, 들고 있던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아앗...!!”
자연스레 정신이 번쩍 든 해인. 떨어진 핸드폰을 주우며 조심스럽게 이 검은 그림자의 실체를 확인하려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뭐가 이렇게 긴 건지, 해인은 한참동안 고개를 올려다보아 겨우 그와 눈이 마주쳤다.
이 사람... 뭔가 낯이 익은데...
“혹시, 어제... 지갑 찾아준 일본 분?”
/
“혹시, 어제 지갑 잃어버렸던 한국 분?”
잠깐의 정적, 그리 길지 않은 고민 끝에 두 사람의 입에서 같은 대사가 동시에 튀어나왔다.
해인이 보고 있던 그림을 가로막은 이 검은 그림자의 정체는 전 날 지갑 해프닝의 조력자, 일본인 카와모토라는 청년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올블랙, 스타일리시한 패션에 선명한 이목구비를 한 이 남자.
그는 이내 부리부리한 눈매로 해인을 보며 웃음 지었다.
“봐요, 제가 다시 만날 것 같다고 했죠? 이 동네 갈 데라 봐야 뻔하니까...!”
“아...!! 그러네요. 뻔한 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정말 반가워요...!! 그 때는 경황이 없어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었죠... 큰일 날 뻔 했는데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뇨, 그 때 결국엔 일행이신 거 같던 그 옆 친구 분이 지갑 찾은 건데요. 뭐... 지금은... 그 분하고 같이 계신 건가요?”
“아, 아니에요, 아니에요!! 진짜 그 사람하고 일행 아니라니까요. 그냥 어쩌다 비행기에서 우연히 만났던 사람이에요.”
한사코 부정하며 손사래를 치는 해인. 카와모토는 이제야 알겠다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나저나 그림에 관심 있으신 모양이네요. 이렇게 갤러리까지 오셔서 열심히 들여다보고 계신걸 보니...”
“예, 특히 누가 그렸는지는 몰라도 이 그림 참 인상적이에요. 처음 보는 스타일이라고 해야 되나... 아, 저도 그림 그리는...아니, 그림 그리려고 하는 사람이거든요...!!”
“아 그러시구나. 그림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이 지역으로 많이 오긴 하죠. 고흐의 발자취를 느끼고 싶다나? 하핫, 암튼, 예술에 심취하기 참 좋은 동네죠.”
“맞아요!! 온 지는 얼마 안됐지만 여긴 정말 그림 그리고 싶게 하는 뭔가가 있는 느낌이에요!!”
유럽인은 아니지만, 이곳 아를에 와서 처음 만났던 이 외국 남자. 아직까지 눈앞의 이 사람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었지만,
가출의 정석을 알려주던 아영과는 또 다르게
한 스탭 더 나아가 ‘예술에의 열정’을 알아주는 상대를 만나기라도 한 듯,
해인은 한껏 들떠서 카와모토와 더 깊은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다.
“저 성함이...어떻게 되셨었...”
“아, 저 카와모토라고 합니다. 카와모토 케이타. 저도 볼 일이 있어서 여기서 한동안 머물고 있어요.”
“맞다, 카와모토씨 였구나. 카와모토...! 카와모토 씨도 그림 좋아 하시나 봐요?”
“예, 좋아합니다. 전시회나 갤러리 같은데 자주 다니는 편이예요. 여기선 소규모라도 자주 전시하는 편이라 가볍게 볼 수 있거든요.”
“근데, 한국말 정말 잘하세요, 어떻게 배우신거예요? 진짜 한국사람 같이 얘기하세요.”
“하하, 그래요? 제가 여행을 참 좋아하는데요, 한국도 자주 갔었어요. 한국 친구도 많아요!
오며 가며 많이 배웠죠. 아, 그리고... 그림 좋아하시면 제가 앞으로도 갤러리 몇 군데 더 소개해 드릴께요.”
카리스마 넘치는, 날카로운 외모와는 다르게 다정한 친절을 베풀어 주는 카와모토와의 대화에 더 친근감이 생기기 시작한 해인.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온 장소에서, 관련분야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멋진, 게다가 한국인에게 우호적인 듯한 현지 정착인이라니.
꿈과도 같았던 상황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음에 새삼 놀라는 중이었다.
“근데 그거 아세요? 다른 데는 사진 찍으셔도 되는데, 여기 그림은 판매 목적이라 정면 샷 따로 찍으면 안돼요.”
“아아앗, 그렇구나...!! 몰... 몰랐어요!! 죄송합니다...!!”
“훗, 아니에요..제가 뭐 전시 관계자는 아니니까...! 근데, 정말 마음에 드시긴 하셨나 봐요 이 그림...”
“예, 뭐랄까. 설명하기는 좀 어려운데, 색감이나 터치 같은 게 눈에 확 들어왔어요. 판매 용도라니 제가 돈이 없어서 바로 살 수는 없을 거 같지만...”
“아, 그러세요? 신기하네요, 이 그림 작가, 제가 잘 아는 사람인데... 언제 한번 소개시켜 드릴까요?”
“옷!! 정말요?? 저야 감사하죠!!! 아니, 가능하시면 꼭 좀 부탁드리고 싶네요!!! 제가 저번 감사도 그렇고 밥 한번 거하게 살게요!!”
“진짜 좋아하시네, 하하, 그럼 잠시 만요.”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유창하게 프랑스어로 이야기를 하는 카와모토. 해인은 설렘과 두근거림 가득한 표정으로 그림을 다시 살펴보고 있었다.
이내 누군가와 짧은 통화를 마친 카와모토는 화가에게 어렵게 승낙을 받아냈으니 다음에 같이 자리를 하자고 전했다.
뛸 듯이 기뻐하는 해인.
“고맙습니다, 고마워요!! 이렇게 도와주시는 분을 만나다니...!! 첫 날 도와주신 것도 감사한데 이렇게까지 더 큰 도움을 받게 될 줄은...!!”
카와모토는 기뻐서 어린아이처럼 신나하는 해인을 보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에요, 뭘 이런 걸 가지고...”
해인이 좋다고 얘기 한 작품 이외에도 다른 작품들까지도 잘 알고 있다며, 카와모토는 마치 큐레이터와도 같은 자세한 설명으로 전시되어있는 작품들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큰 결심으로 멀리 타국까지 날아와 자신의 꿈에 가까운 이야기를 누군가와 하고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해인은 더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는 중이었다. 더군다나 눈앞에는 이다지도 멋진 청년. 좋지 않을 수 없었다.
해인은 열심히 자신에게 작품을 설명해주고 있는 카와모토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국적이 일본이라는 이 청년 역시 자신과 같이 할 일을 찾기 위해, 고국을 떠나 이곳에 와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동질감까지 생겨가는 기분이었다.
“저는 여기서 누굴 만나기로 해서요. 제 연락처 드렸죠? 다음에 같이 식사라도 해요. 그 화가 친구 만날 때는 제가 따로 연락드릴게요. 그럼...”
“예, 오늘 이것저것 설명해 주시고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번에 밥은 꼭 제가 사드릴게요!!”
성당 내에서 개최된 작은 전시회 구경을 마친 후 해인은 카와모토와 헤어졌다.
해인을 이곳으로 오게 만든 것은
소설 [ 그들만의 세상 ] 속 일러스트.
내용 역시 감명 깊게 읽은 바 있는 해인은 소설의 배경이었던 이곳 프로방스 지역에 대한 로망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원하던 인생을 늘 꿈꾸어 오면서도 현실 때문에 포기했던 지난 날, 언제라도 기회가 만들어 질 수 있다면, 자신이 속해있는 세상과 격리된 곳에 가서 새롭게 삶을 시작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오랜 결심을 실행에 옮기려는 순간, 어디로 향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에는 망설임이 필요치 않았다.
그리고 이곳까지 오게 된 그녀에게 이렇게 예상치 못한 조력자들이 하나 둘 생기고 있는 것에서 해인은 하나 둘 정당성을 찾아갔다.
막연한 이끌림을 따라 이곳 아를까지 왔고,
그것은 차츰 그녀의 안에서 정답이 되어가고 있었다.
한국의 가족, 친구 모든 이들의 만류를 뒤로 하고 어려운 선택을 했던 해인.
그렇지만 이곳에서 역시,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에만 집중할 수 있는 형편은 되지 못했다.
녹록치 않은 현실 속, 준비해 온 자금들을 관리하며 앞으로의 생활을 위해선 지속적으로 일을 할 곳이 필요했다.
해인은 마을을 샅샅이 돌아다니며 아르바이트로서 일할 곳을 찾아 다녔다.
한국에서 회사를 다니면서도 [언젠가 쓰일지 모른다] 는 바람과 함께 몇 년 간이나 독학으로 익힌 프랑스어.
커뮤니케이션에는 딱히 문제가 없을 정도의 수준이라 여겼건만, 언어만이 문제는 아니었는지, 찾아가는 곳들마다 이 한국인 아르바이트생을 반갑게 맞아주는 곳은 드물었다.
"후우... 이제 시작인데 뭘...!"
꾸준하게 이곳저곳을 뒤지고 다니며 이 날만 벌써 5번 째 장소에서 퇴짜를 당하고 나서,
해인은 지나치던 빵 가게에서 빵을 사 우걱우걱 씹으며 피곤한 다리를 주물러 댔다.
***
"아 그러니까요, 요즘 트렌드에 너무 벗어난다 말입니다!!"
"아니, 트렌드도 트렌드 나름이죠.
이거, 글 써서 먹고사는 사람 입장에서 포기하기 힘든 부분이지 않겠어요?"
"어허, 한 작가님. 일단 독자들이 봐야 의미 있는 것 아닙니까? 아무리 좋은 글귀에, 명문이면 뭐합니까? 독자들이 구독을 해줘야 출판사가 운영 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한국의 어느 영세 출판사.
기태는 항상 마찰을 달고 사는 건지, 원고료가 깎인 이전의 출판사외의 다른 이곳의 편집부 측과도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중이었다.
필사적으로 작가 프라이드를 설파하며 출판사와 대립 중.
“한 작가님, 작가님 쓰시는 글 내용이 나쁘지는 않습니다. 문장력도 좋으시죠...!
그런데 저희 서적 구매 연령대도 서서히 바뀌어 가고 있는 만큼, 집필 스타일도 변화를 줄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대중들이 좋아하는 소재, 좋아하는 문체로 승부를 봐야 하는 겁니다.”
딱딱하고 잔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출판사를 상대로 작가마인드를 내세우며 싸우기는 무리라고 판단해서 였을까.
기태는 이내 꼬리를 내리고 출판사의 입장에 순응했다.
“아...알겠습니다. 트렌드도...좀 봐가면서 바꿔가도록 하겠습니다. 예, 예...”
기세등등하게 대립각을 세우려 직접 방문했던 기태는 아무 소득 없이 출판사를 나왔다.
결국 자신만만하게 크리에이터를 지향하고 있지만, ‘돈이 될 수 없다’는 자신의 컨텐츠가 무시 받는 느낌은 썩 좋지 않았다.
“돈, 돈... 사정은 이해하겠다만... 얼마나 공을 들여 나온 내 자식 같은 문장인지, 그렇게 쉽게 까기 전에 한번 동정이라도 해줘라. 불쌍하잖아.”
혼잣말로 기분을 털어내려는 기태.
그렇지만 부글부글 속에서 끓는 기분은 결코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마감이 코앞인 원고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왜인지, 알코올의 힘없이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기분.
그렇지만 애매하게, 같이 마셔달라고 누구 부를 수 있는 친구도 생각나지 않았다.
확고하기 그지없는 그의 작가 인생은 하나 둘 친구들로부터 그를 등지게 만들었다.
사상이 다른 친구들, 꿈도 없이 돈의 노예로 사는 듯한 직장인 친구들을 한심하게 여기게 된 후 부터 그는 사실 혼자가 편했다.
“이럴 때는 또 누구라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말야...”
문득, 일본에서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주었던 세현이 떠올랐다. 많이 늦기는 했지만 자신과 비슷한 인생을 택했다는 유일한 동료.
그렇지만 열심히 자기 꿈 찾아, 다니던 좋은 직장까지 관두고 집필에 전념을 다하겠다던 세현의 행태는 여전히 기태에게 [ 배부른 자의 여유 ] 로 보일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쳇, 네가 그런다고 어디...”
기태가 세현과 학창시절 친하게 어울리려했던 것은 오로지 자기 선망의 대상, 세현의 아버지 때문이었다.
그때는 친구인 세현이 자신의 아버지를 증오하며 전혀 반대의 길을 걸으려 하던 모습이었기에 은연중에 더 안심 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고 늘 자기암시를 걸며 오로지 한 길만을 파왔던 자신은 결국, 성공의 정점에 있는 세현의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걸을 수 있으리라.
아직 기회가 오지 않았을 뿐.
그런데 전혀 다른 일을 하던 놈이 뭔가 깨달았다고 그제서야 작가로 전향을 하려고 해? 괘씸한 것.
아니, 그 괘씸함 뒤에는 사실 두려움이 앞섰다.
천재 작가라 칭하는 이의 가족이니 어쩌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재능이 있지는 않을까.
자신은 이렇게, 애초부터 다른 유흥도 포기한 채 오로지 문장에만 매달리고 있는 판에,
누릴 것은 다 누리다, 심지어는 재능까지도 물려받았을지 모를 녀석이 갑자기 나타나 작가로 주목을 받는다면...
자신의 인생은 너무 쓰라릴 것 같았다.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고 있는 지...
출판사와의 마찰 후, 혼자라도 마실 생각으로 편의점에서 소주를 한 병 사들고 집으로 들어가던 기태.
동네에 접어들었을 때, 눈앞에는 서너 명의 양복을 빼입은 남자들이 자기들 끼리 껄껄대며 기태를 스쳐갔다.
양복을 입은 남자 중에 한명은 스쳐간 기태를 다시 뒤돌아 확인했다.
“엉?! 너...? 혹시 한기태?”
“누구...? 아... 이종수냐?”
“그래, 임마! 잘 살았어? 연락도 없이...아직 이동네 살았구나? 지금 시간에 뭐야, 이거? 혼자 소주 사가지고 들어가는 거야?”
“아, 그냥 사놓는 거야. 볼일 보고 오는 길에...”
“야, 잘됐네. 얘들 다 알지? 우리 고등학교 동창들!! 우리 지금 한 잔 하러가는데 같이 가자!!”
“어? 음....그... 그럴까... 그럼”
엉겁결에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을 따라나선 기태.
평소 같으면 이런 식의 만남은 거절했겠지만,
마침 술이 필요하다고 외쳐대는 신체 반응에 순순히 응해주었다.
‘에잇, 가자, 일단은 이 찝찝한 기분을 푸는 게 우선이지...!’
방문하셔서 응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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