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_ 그리고 싶어서...!! ]
많은 이들이 워너비 여행지로 꼽아 마지않는 프랑스.
꽤 오랜 기간 머물 생각으로 이곳에 온 해인으로선,
이곳의 어디라도 마음만 먹으면 기차나 버스를 타고도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가자...!”
습관이란 게 무서운 건지,
그렇게 살지 않으리라며 뛰쳐나온 다른 공간에서도 똑같이 행동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
어떻게 해서든 깨부수고 싶었다.
마침 정류장에 도착한 아비뇽 행 버스.
출입문이 열리고 닫히는 그 잠깐의 시간동안 무수한 고민을 하던 해인은 결국 버스의 좌석에 올라 앉았다.
‘그래, 천천히 시작하자, 천천히...!’
거추장스러운 짐들로 가득했던 첫날과는 달리 가벼운 차림새에 발걸음은 보다 가벼웠다.
흐르는 론강과 무수하게 지나치는 건물 밀집지역, 라벤더 향 가득한 산과 들을 거쳐 드디어 도착한 아비뇽이란 도시. 아를과는 확연히 달랐다.
“우아....”
고대의 건축물들이 남아있는 듯 큼직큼직하고 거대한 도시의 느낌.
이 곳은 그야말로 상상하던 프랑스의 이미지 그대로가 느껴지는 비주얼 이었다.
거대한 성벽과 곳곳에 고딕 양식 그대로 장식 가득한 건물들의 규모에 압도되는 느낌.
대부분이 관광객이었는지, 오고가는 사람들 역시도 아를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많았다.
해인은 조금 전까지 안고 있던 고민이 전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이 도시의 전경에 빠져들고 있었다.
동양 사람을 잘 찾을 수 없던 아를과는 달리 주변에는 여자들끼리, 연인들끼리 온 동양인 여행객들 투성 이었다.
당연히 어두움 따위는 찾아볼 수 없던 그들의 표정들.
“저기요, 혼자 오셨어요? 저희랑 같이 다니실래요?”
이제야 상상하던 유럽의 모습을 보기라도 한듯, 신기하게 이쪽저쪽을 살피던 해인의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딱 보기에도 어려보이는 대학생 남자들의 무리.
“네? 아... 저는 그냥...”
“괜찮으시면 저희랑 같이 구경해요, 혹시 유학생이세요?”
해인은 자신이 일본에서 세현에게 했었던 대사를 본인이 다른 이들에게 듣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학생같이 보였나...
“아니에요, 전... 따로 볼일이 있어서 그러는데 그냥 혼자 다닐게요. 즐거운 여행 되세요.”
“에이, 아쉽네요, 알겠습니다. 그럼...”
순순히 물러나는 가 싶던 남학생 무리는 멀찌감치 뒤에서 욕설 섞인 불만을 토로 했다.
뭔가 내기를 했던 듯한 이 남자 무리들은 '같이 놀' 다른 한국인 여성을 찾아 두리번 대는 듯했다.
이래서 타국에서 만난 자국민을 경계해야 된다는 건지.
말 통한다고 마음 열었다가 어떤 일이 일어날 몰라.
지나친 경계심에 살짝 주눅이 들긴 했지만 해인은 계속해서 성큼성큼 이동하며 아비뇽의 곳곳을 구경하고 다녔다.
어느 각도로 바라보아도 그리고 싶은 욕구가 저절로 생겨나는 그윽한 분위기의 풍경들.
여러 나라의 외국인들이 많이 보이긴 했지만 사람에게 눈이 가지 않을 정도로 도시의 볼거리는 어마어마했다.
새삼, 유럽은 어디를 찍어도 작품이 된다고 하던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이것들을 그림에 담아내면 어떤 느낌일까...'
유럽의 한 앵글을 배경으로 상상을 시작하자 무수한 스토리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해인은 그제서야 세현이 ‘예술가에게 영감을 준다’ 했던 말을 실감했다.
‘잠깐 와 본 아비뇽도 이 정도인데, 다른 데는 얼마나 더 엄청날까...’
넋이 빠져 넓디넓은 도시를 하염없이 돌아다닌 해인은 어딘 지 움직임을 귀찮게 하는 통증 때문에 잠시 광장의 돌 턱에 기대어 앉아 몸 상태를 살폈다.
아를에서도 아침부터 일자리를 구하느라 무수하게 돌아 다녔던 해인, 이곳에서의 더 격한 움직임은 결국 그의 다리에 이상 신호를 보내온 듯 했다.
“아야야... 이게 뭐야...?!”
물집이 잡혀 까져버린 발바닥.
양말에는 피가 흥건하게 묻어있을 정도로 심하게 살집이 벗겨져 있었다.
‘이게 바로 여행의 마력이란 건가... 내 몸 상하는 줄도 모르고 무리하게 만드네...’
어쩔 수 없이 해인은 복귀를 결심했다.
아쉽긴 하지만, 촉박한 날짜나 시간 등을 이유로 가이드가 정해준 '겉'만 핥고 부리나케 복귀하는 패키지 여행객들처럼 서두를 이유는 없었다.
이곳에 있으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테니.
그 길로 해인은 다시 버스에 올라 아를로 돌아왔다. 날은 벌써 어둑어둑한 저녁이 되고 있었다.
이곳이나 저곳이나 유럽의 상가들은 대체적으로 일찍부터 문을 닫는 듯 했다.
오면서도 자신과 풍경 사진들을 찍어 두고두고 남길 인생 샷을 찍는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보였다.
뭘 하며, 어디에 살았던 누구이건 이곳에서 보여지는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저러니, 유럽 여행 갔다 고국으로 돌아가면 일상생활이 제대로 될까... 환상의 세계를 보고 와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건데...’
해인은 유럽여행 다녀왔다면서 자신의 SNS 메신져 등의 프로필 사진을 유럽에서 찍은 사진으로 해 놓고,
몇 달을 주기로 계속 유럽사진을 돌려가며 게시하던 친구들이 떠올랐다.
한편으로는 그들과는 달리, 자신은 남은 날이 많으니 언제든 다시 들를 수 있다는 생각에 뭔가 알 수없는 우월감이 느껴졌다.
버스가 아를에 가까워졌을 무렵, 해인은 피로함에 지쳐 버스에서 잠이 들어 버렸다.
[ 지이잉 ]
자동문이 여닫히는 소리와 함께, 잠결에 많은 사람들이 이동하는 모습들이 희미하게 보였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쏟아지는 잠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저기요, 저기요??”
달콤한 잠에 빠져있는 해인을 누군가가 흔들어 깨웠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 해인.
“음....음?? 엉!!”
해인의 눈에는 몇 센치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서 정면으로 해인을 바라보고 있는 잘생긴 어떤 남자... 이건, 꿈인가...
“악!!!!”
너무 놀라 비명과 함께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를 밀쳐 낸 해인.
정신을 다시 차려보니 앞에 있는 남자는 얼마 전에도 교회 전시장 안에서 만났던 카와모토였다.
“하하, 많이 피곤했나봐요? 다음에서 내려야죠? 아를 다 왔는데? 아를 쪽에 사시는 거 맞죠?”
“아, 카와모토씨...!! 밀쳐서 미안해요.
아, 벌써 도착했구나...”
“어디 멀리 다녀오셨나 봐요?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데...”
“아, 저 아비뇽 다녀왔어요, 아비뇽!! 정말 끝내주는 도시더라고요!!”
“아, 아비뇽 다녀오셨군요. 좋죠, 으리으리하죠, 이 동네랑 비교하면...”
“아, 가보셨어요?”
“하하, 예... 뭐 저는 여기 있은 지 오래 되서 갈만한 덴 거의 가 봤어요.”
여행의 뿌듯한 감격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던 와중에 눈앞에 나타난 카와모토.
해인은 떠올랐던 새심한 감정들 하나하나를 카와모토에게 주저리주저리 떠들어 댔다.
가만히 들어주던 카와모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해인에게 말을 꺼냈다.
“해인씨, 지금 혹시 시간 괜찮아요?”
“예?”
“왜 저번에 전시회에서 좋아했던 그림 작가 있잖아요.”
“아, 알죠, 알죠! 그 인상적인 터치의 그림...!”
“그 사람 지금 작업실에 있다고 저 만나러 가는 길인데 같이 갈래요?”
“아? 진짜요? 갈래요, 갈래요!!”
정류장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화가의 작업실. 들뜬 마음에 카와모토를 따르던 해인은 잠시 잊고 있었던 발바닥의 통증을 감지했다.
“음? 왜 그래요? 해인씨?”
“아..., 별거 아니예요. 오늘 너무 걸었나 봐요, 발에 상처가 좀 났어요.”
“아이쿠, 얼른 그 친구 작업실 들어가서 응급 처치라도 합시다!"
자연스럽게 해인의 손을 잡고 부축을 하는 카와모토.
옆으로 다가와 의지할 수 있도록 힘을 주는 카와모토의 모습에 해인은 미세하게 두근거림을 느꼈다.
두 사람이 향하는 좁은 아를의 골목 골목.
이윽고 해인이 머무르는 동네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작은 한 건물에 다다랐다.
오르는 계단 내내 세심하게도 곁을 지지해 주는 카와모토.
“여기 앉아 잠깐 기다려요. 구급상자 가져올게요.”
해인은 작업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이젤에 얹혀져 작업 중인 그림들과 구석에 쌓인 큰 캔버스들.
각 그림들의 앞에는 붓들과 파레트가 작은 의자 위에 놓여 져 있고, 사방에는 물감이나 페인트 등 여러 그림 도구들이 흩뿌려져 있다
벽이며 바닥 천장 할 것없이 낙서 같이 덧칠되어진 문양들은 얼핏 지저분하지만, 의미 있어 보이는 멋진 배경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사방 벽에는 액자에 끼워진, 완성된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려고 일어나 찬찬히 그림을 살피는 해인.
온전치 못한 발 상태로 절뚝대며 걷던 중,
널 부러져 있는 화실의 집기들을 잘못 밟아 우당탕 넘어지고 말았다.
“아이쿠야!!”
“아이 참, 앉아 있으라니깐...!”
급하게 구급상자를 가져온 카와모토는 해인의 신발을 벗겨 환부를 확인하였다.
이미 피로 흥건해져 있던 해인의 양말.
“세상에... 이거 너무하네요. 얼마나 돌아다녔으면...”
“아아악..!!”
카와모토는 해인의 발 환부에 소독약을 바르고 큰 반창고를 고정한 뒤 붕대로 감아주었다.
“아야, 이거 번번히 신세지네요. 카와모토씨...죄송해요.”
“아니에요. 바로 가서 쉬어야 될 걸 여기 오자고 한 게 저 인걸요. 뭐, 자, 이제 고정됐어요.
팽팽해졌나, 한번 걸어볼래요?”
“예, 아... 이제 좀 괜찮아 진 거 같아요. 고맙습니다. 아, 근데 아무도 안계신가요, 화가 분은...?”
말을 끝내기 전에 해인은 카와모토의 앞에 둘러진 물감 흔적 가득한 앞치마를 확인했다.
“어? 카와모토씨...? 도 혹시 그림 그려요?”
“아, 하하, 조금 더 재미난 상황에서 놀래 켜 주고 싶었는데 바로 얘기하게 되어버리네요. 사실은 제가! 좋아하셨던 그림 그린 사람입니다!! 하하.”
“헉!! 진짜예요?? 그러면.. 직업이 화가신거예요? 그럼 이 작업실도 카와모토씨 거...?”
“예 그림 그리면서... 먹고 살려는 사람이죠. 하하, 아 그리고 이 작업실은 제건 아니고,
그냥 임대로 동료들하고 같이 쓰고 있습니다.”
“여기서 같이 그림 그리시는 분들 또 계신 거예요? 우와!!”
“예, 다른 친구들은 유럽 쪽 친구들인데 모여서 그림 같이 그려요. 그려서 갤러리나 전시회 같은 데에 내고... 사겠다는 사람 있으면 팔고 뭐 이러는 거죠...!”
“와!! 멋있어요! 저도 그림 그리고 싶어서 여기 온 건데...!!”
밝혀진 카와모토의 정체에 화들짝 놀라는 해인. 새삼 벽에 걸려 진 완성된 그림들을 살펴보며 본격적으로 호기심을 드러냈다.
“해인씨도 그림 그리세요? 어떤 그림이세요? 서양화? 동양화?"
“아, 저는 아직 어떤 그림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단계예요. 전공도 아니고... 그냥 그림 그리는 거 좋아서 혼자서 끄적이거나 하는 거 밖에 없었어요. 흉내 내보기도 하고...”
“그 정도라고 보기엔... 그림 보는 눈이 있으신데요? 하핫, 어떤 걸 주로 그리셨는데요? 유화? 수채화?"
“조금씩 해보긴 해봤어요. 근데 평소엔 연필 콘테 스케치하는 걸 즐기고요, 약간 파스텔 톤 들어간 일러스트 풍? 느낌은 혼합재료로 아크릴 화나 유화도 좋아해요.”
“여기서 그리는 작가들 스타일 다 합쳐야 좋아하는 그림 나올 것 같은데요? 하핫.”
“풋, 그냥 느낌이죠. 느낌...!”
“제일 어려운 과제를 알고 있네요. 금방 늘겠다. 해인씨, 그림 정식으로 배우면...”
사방이 온통 그림으로 뒤덮인 공간, 그리고 눈앞에 가득한 그림 도구들, 그것에 관해 토론할 수 있는 환경.
해인에게 있어 지금의 이 장소는 아비뇽에서 느낀 감동 이상으로 다가왔다.
간만에 타국에서 만난 동양 여성과의 이런 토론이 신선했는지, 역시 즐거움을 감추지 못하던 카와모토.
“저 해인씨, 어디 다른 작업실 있는 거 아니면 여기서 그림 그려볼래요?”
“네?! 네?! 아니... 그런...!!!”
“작업실 따로 있구나? 그럼 뭐 어쩔 수...”
“아니요! 없어요, 없어!! 그... 그런데...”
“?”
“사실... 요 며칠 동안 일 자리 찾아서 막 알아보는 중이었거든요. 가져온 돈도 얼마 안 되고 해서...
일하면서 남는 시간에 그림을 그려 볼 생각이었어요. 제안해 주신 건 감사하지만...
같이 임대료 낼 돈 구하려면 일부터 찾아야 해서요.”
“아...”
카와모토는 해인의 아쉬운 대답을 듣고 골똘하게 무언가를 생각했다.
“음, 해인씨 그러면요...”
방문하셔서 응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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