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_ 남자 따위... ]
“아영아, 그게 아니라... 사실은...”
“뭔데? 혹시 돈 문제야? 진행한다는 프로젝트에 혹시...돈 모자라?”
“...응, 예상치 못하게... 원래 생각했던 금액보다 초과가 되어 버렸어... 그래서 같이 하는 친구들 모두 십시일반으로 돈을 더 모아 보고는 있는데...”
아영은 늘 확신과 자신감에 여유 넘치던 크리스에게 보이는 약한 모습이 무척 낯설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싫었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만큼은 도와줄게.”
“정말? ...미안한데... 괜찮겠어? 일단 만들어지기만 하면 나중에 돈은 바로 돌려줄게.”
“그 전에...”
“??”
“네 개인적인 일이라면 내가 알 권리는 없다고 쳐도 돈 문제가 얽히고 들어가니 무슨 일인 지는 알았으면 좋겠는데, 알려줄 수 있어? 나쁜 일이나...뭐 그런 건 아니겠지?”
“맹세코!! 그런 거 아니야!! 사실 아는 친구들하고 같이 조그마하게 사업을 시작하려는데, 사업장이다 뭐다 이래저래 준비해야 할게 산더미인거야.
다들 젊은 친구들이라 경험도 없고, 그래서 이래저래 발로 뛰어다니긴 하는데, 예상했던 금액보다 준비 자금이 더 나와 버려 전전긍긍 중이야 다들...”
“사업이라고... 음... 그럼... 일단 너 믿고, 내가 모아놨던 돈...빌려줄게.”
“...고마워!! 정말!! 자리 잡는 데로 바로 네 돈부터 돌려주도록 할게!!”
남자친구에 대한 신뢰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도움을 자청한 아영.
이때는 정말로 순수하게 남자친구를 돕고자 하는 마음뿐이었다.
아영은 그간 자신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신의 목표를 위해 안 먹고, 안 사가며 그때까지 모아놓은 돈의 대부분을 남자친구에게 빌려주었다.
불안함보단 오히려 홀가분한 마음이 컸다.
이제까지 혹시나 기분이 상할까 두려워 서로의 사생활을 간섭하지 않았건만,
믿어 의심치 않는 자신의 남자친구의 일을 도와줄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에.
이 후 크리스는 아영의 원조 덕에 더 활기차게 일을 진행시킬 수 있게 된 건지, 이전보다 더 바빠진 일상을 보내게 되었다.
바빠졌다는 이유로 만나는 횟수가 적어지더라도 아영은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이유는 확실하게 알고 있고, 자금을 보태준 이후, 남자친구의 사업 번창을 위해 여자 친구로서 더 응원을 해주어야 한다는 의무감마저 들었기에.
[ 아영아, 진짜 고맙다. ]
그 후 몇 번이고 꺼내 본 남자친구에게 받은 문자 메시지.
현재까지도, 아영은 이 메시지가 담긴 핸드폰을 바꾸지 못하고 있었다.
“개 새끼...! 차라리 어디서 뒈졌다고 연락이나 받았으면 억울하지나 않을 텐데...”
아영의 단호한 연애관에 있어 단 한 번의 실수.
실수의 아픔은 뼈저리게 오래갔고, 분노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입에 담기엔 자존심이 상해서였을까,
아영은 아직 누구에게도 자신의 지난 연애 이야기를 자세히 털어놓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방어적인 그녀의 연애관은 이 일로 인해 남성혐오에 가까운 지경에 이르렀다.
자기도 모르게 무작정 빠져버린 사랑.
그것은 나중에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시기에 돌아보았을 때, 너무 단계가 빤히 보이는 장난질과도 같았다.
아영은 낡디 낡은 휴대폰을 일하는 책상 위에 내 던지며 괜한 화풀이를 했다.
밤 시간.
하루의 마지막 일과를 마치고 피곤에 쩐 상태로 집으로 향하던 아영.
잊고 살고 싶었지만 문득 문득 생각나버린 전 남친의 기억에 이 날은 더 짜증이 났다.
“저기, 잠깐 시간 괜찮으시면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이 와중에 길거리에서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노란색 염색 머리와 선글라스를 끼고 아영에게 말을 거는 한 남자.
이 비슷한 무리는 이 근방에서 여러 번 눈에 띄었다.
매번 거절을 해도 다른 이들을 대신 내세우며 다가와 매번 말을 걸어대는 느낌이었다.
냉정한 눈초리로 눈을 마주하지 않고 무시하듯 갈 길을 재촉했다. 다행히도 이 무리들은 이렇게 대처하면 더 따라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전략에 의한 미행일지 모른다.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하는 건 지, 이들은 아무나 이렇게 따라오는 것은 아니었다.
잘 알려진 일본의 성인물 업계나 유흥 주점 관계자들.
피 튀기는 경쟁 업계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늘 새로운 인재 모집에 혈안이 되어있는 모습이다.
업계의 캐스팅 담당자들은 번화가의 사방팔방을 뒤지며 [괜찮은] 여성들에게 물 밑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그들은 일반 직업으로는 상상도 못할 액수를 제시해 계약을 요구했고 실제로 담당자들의 설득에 넘어가 그 업계로 빠지게 되는 여성들도 적지 않았다.
어차피 본인의 선택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문제이지만, 현대 사회에서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미끼는 쉽게 거부할 수 없는 유혹.
전 남자 친구로부터 갈취당한 큰 금액의 돈.
당시에는 막막함에 모든 것이 무너지는 듯 했다.
당연히 아무 조건 없이 빌려주었던 터라 꿈을 위한 그녀의 몇 년 동안의 고생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버린 셈이었다.
잠시 흔들렸었다.
지지를 받던 자신의 꿈이, 지지자와 함께 산산 조각 나 버렸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 포기해버리고 싶을 시점에서 고액을 보장한다는 성인 업계나 유흥 주점 등에의 손길은 더한 혼란을 초래했다.
"이 미친 년아!!! 워이 워이!!!"
아영은 자신의 볼을 사정없이 때리며 자책하듯 혼잣말을 해댔다.
"그 좋다는 자유로운 영혼 놀이가 이쪽으로 가도 된다는 건 아니잖아, 정신 차리자, 정신...!!"
그 이 후 아영은 더 무리해서 돈을 벌기 시작했다. 마치 기계라도 된 양, 혹사에 가깝게.
하나 둘 늘려가기 시작한 아르바이트 자리.
아침 저녁, 때로는 새벽까지 하는 아르바이트를 구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2년을 넘게 일을 하고 있던
한 레스토랑에서 아영은 이제 갓 들어온 신입 직원에게 업무를 알려주었다. 여전히 시크하게.
"임세현 입니다. 잘 부탁 드려요. 선배님."
"선배는 무슨... 부탁하고 말고가 어딨어요.
어려운 일도 없는데, 그냥 각자 알아서 합시다.
서로 피해 가는 일만 없게... 아무튼, 전 천아영이라고 해요. 잘 지내봐요.”
1년여 전 아영과 세현이 처음 만나는 순간이었다.
***
“어서 오세요. 한국 관광객이시죠? 많이 구경하셨어요?”
프랑스 아를.
아버지 친구 분의 도움으로 일 할 수 있게 된 레스토랑에서 세현이 맞는 첫 한국 관광객.
프랑스어도 일본어도 별다른 문제가 없는 세현이었지만, 외지에서 만난 한국인은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와! 여기 일하시는 분이세요? 이렇게 잘 생기신 분이 왜 한국에서 일 하시지 않고...!”
“얘, 미쳤어!! 아니에요, 아니에요! 저희 그럼 주문할께요.”
친구로 보이는 두 젊은 여성의 아를 방문.
유럽의 여느 손님과도 같이 세현은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세현이 이곳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눈에 띄게 매출이 늘었다.
일본에서의 경험과 타고난 서비스 정신,
뛰어난 외모의 장점은 전 세계인들이 찾는 이곳 유럽 작은 도시 속 한 레스토랑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저씨, 아, 사장님, 이 메뉴 한번 추가해 보는 것 어때요?”
서빙에서 주방까지. 분야를 가리지 않는 활약에 사장 아저씨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음. 이거 괜찮네. 이런 건 또 어디서 배운 거야?”
“레스토랑 서빙 1년이면 그 식당 메인 메뉴 레시피 정도는 아는 법이죠. 훗, 일본에서 일하던 레스토랑에서 제일 인기 있던 메뉴였는데요.
한번 흉내만 내봤어요.”
덩달아 활기를 되찾은 레스토랑 내 직원들.
다양한 연령대가 분포되어있는 이 레스토랑의 직원들은 도시의 분위기답게 모두 여유 있고 선한 인상들이다.
손님들이 한창 붐비다 조금은 한적해진 오후 4시경. 세현은 주방 일을 돕고 있었다.
“세현아, 잠깐 아저씨랑 얘기 좀 할까?”
“예, 이거 마저 정리하고 갈께요.
커피 한 잔 드릴까요?”
“좋지!”
동료직원들과도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뒷정리를 마친 후 세현은 아저씨와 한 테이블에 앉았다.
“그래, 덕분에 가게 분위기가 아주 좋아졌네,
이건 내가 도와주는 게 아니라 네가 나 도와주는 거네, 완전히.”
“아니에요, 기회를 주시니까 제가 여기 있을 수 있는 걸요.”
“어릴 때 잠깐 봤었을 땐 참 시무룩하니,
애가 지 애비 닮아 좀 싸가지 없겠다 싶었는데, 크니까 이렇게 싹싹하니 분위기 메이커가 될 줄 몰랐네, 그려!”
“제가 생각해도 저 어렸을 땐 좀 재수 없었을 거 같아요. 여기저기 다녀보니 역시, 사람이 혼자 잘날 수가 없더라구요, 하핫.”
“그래, 글은 잘 진행되어가니? 어떤 글 쓰니?
내가 네 아버지 옆에서 봐 와서 글 쓰는 사람 옆에 있는 역은 잘해요, 이렇게 대를 이어가며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게... 그렇게 되네요. 왠지 죄송한데요.”
“뭐가 죄송하니, 옆에서 또 대작가 하나 만들어줘야지, 내가. 하하핫!”
"소설... 쓰고 있어요. 아직 정리가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차곡차곡 에피소드 구성 중이에요.”
"그래, 네 아버지 때도 그랬지, 글 쓰는 거에 내가 도움 줄 건 없겠지만, 힘든 거 있으면 말만 해.
그리고 아저씨 편하게 생각해도 돼. 그 자식 아들이면 내 아들도 되는 거지 뭐!!"
"예, 이미 충분히 잘해주시고 계세요. 감사합니다."
저녁때가 되어 손님들이 하나 둘 다시 붐비기 시작해 세현은 자연스럽게 다시 업무로 복귀했다.
야외 테라스의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던 세현은 가게를 지나쳐 성큼성큼 지나가는 익숙한 한 여인을 발견하였다.
"해인씨!"
방심하다 이름을 들은 해인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누...누구, 아? 세현씨예요? 여기서 일하는 거예요? 왜...왜?"
"무슨 질문이 그래요? 왜 일하냐니...
그나저나 저녁 다 됐는데 왠 선글라스는 쓰고 다니고 그래요? 길눈도 어두우면서!"
"남이사!!! 그리고 나 이제 이 동네 지리 잘 알거든요!! 아, 오늘 부터 저 앞 작업실에서 일 도와주기로 했어요."
"저 앞 작업실??"
"그래요, 저기 저 건물 보이죠? 그럼 바빠서 이만 실례...!"
세현은 해인이 알려준 건물을 확인하고 아저씨에게 물었다.
"저 건물 작업실? 아, 그 외국 놈들 몇 놈 모여서 무슨 그림 그리고 그러더라. 여기도 자주들 와,
한 다섯 놈 정도 되던가...
맨날 물감 잔뜩 묻은 앞치마 같은 거 하고 나타나고 그래. 꼭 그렇게 티 내야 겠나 싶지만..
하도 껄렁껄렁해서 얘기는 많이 안해봤어."
"껄렁껄렁해요? 혹시 양아치들인가?"
"뭐, 그림 그려서 갤러리에서 전시하고 판매하고 그러기는 하는 모양이더라.
양아치까지는 아니고 왜 있잖아, 지들 예술 합네 하고 목에 깁스하고 다니는 애들.
좀 그래, 저것들... 내가 너무 저 세대 애들을 몰라서 그런 가 몰라도.."
세현은 새삼 해인이 신이 나서 뛰어 들어간 건물을 바라보았다.
"실례 합니다!!"
해인은 두근대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카와모토의 작업실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아, 해인씨 왔어요? 들어와요. 친구들하고 얘기 중이었어요."
해인은 작업실 안으로 진입해 웅성대는 소리가 들리는 방으로 이동했다.
그야말로 다 국적의 남자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던 모양.
'뭐야, 다 남자였어? 이건 좀...'
카와모토의 소개에 얘기 중이던 남자들은 일제히 해인을 쳐다보았다.
예상치 못한 남자들의 시선.
해인은 갑작스럽게 두려운 감정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방문하셔서 응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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