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_ 길 동무 ]
“반가워요!!”
얼핏 보기에도 3개국 이상은 되어 보이는 다국적의 청년들. 그들은 프랑스어로 해인을 맞이했다.
“카와모토한테 얘기 들었어요.
앞으로 저희 도와주실 분이시죠?”
“예,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한국인 이해인 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릴게요.”
그들은 작업실과 칸막이 만으로 나뉘어 있는 회의실에서 이야기 중이었다.
“말씀 드렸죠? 저 그림 그리신 분...!
가끔 여기서 작업도 하실 거예요.”
카와모토는 작업실의 한쪽 벽을 가르키며 친구들에게 해인을 소개했다. 그 곳에는 해인이 전날 그렸던 그림이 벽에 붙어있었다.
“아니, 저... 저게...!! 왜 저기 붙여놓으셨어요?
부끄럽게...”
이미 자신이 그린 그림에 대해서 품평이 끝났던 건지 외국인 친구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하며 해인을 향해 말했다.
“그림 배우신 적도 없으시다 면서 저 정도하셨으면 대단한 거예요. 관찰력도 좋고, 배경이 아비뇽 맞죠?”
“맞아요, 더군다나 한 시간 만에 완성했다면서요. 약간 천부적인 게 보여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입장에서 해인은 이런 과한 칭찬일색의 멘트들이 익숙치 않았다.
그저 새로 들어올 직원에 대한 립서비스로 밖에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칭찬은 해인을 미소 짓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아직 이곳의 소속 멤버들에 대해 아는 정보 하나 없이, 오직 남자들 뿐이라는 사실은 왜인지 모를 두려운 감정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차피 이곳에 온 것 자체가 도전.
해인은 일단 예술인들이라는 이들을 믿고 일단 같이 있어보기로 마음을 굳혔다.
“저희는 각자 자기 작업들 하기 때문에 뭐 달리 같이 있어야 한다거나 그렇진 않아요, 그냥 개인 작업하는 거죠, 밤을 샐 때도 있고, 보통 야간에 작업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해인 씨가 도와줘야하는 부분은 꼭 저희가 있을 때 해야 하는 일은 아니니까 매일 저녁 쯤에는 퇴근하세요. 남아서 그림을 그리셔도 되고...”
"예, 그럴게요. 근데 저 혹시 지금 그리고 계신...
그림들 구경 좀 해도 될까요?"
해인은 작업실을 둘러보며 외국인 친구들의 그림을 관찰했다. 각기 다른 개성의 다른 양식의 그림들.
아를 역 앞의 불만투성인 표정의 걸인을 묘사한 그림, 원형경기장을 배경으로 몰래 입을 맞추고 있는 연인의 그림,
아를의 좁은 골목에서 죽어가는 고양이 묘사, 인물의 표정을 극대화해 색감만으로 감정을 나타내려는 그림 등...
다섯 명의 화가 모두 결코 범상치 않은 소재로 각자 스타일의 스토리를 써나가고 있다.
쓰이는 재료들 역시도 다채로웠다.
그림의 스타일을 감상하고, 화가의 의도를 파악해 가는 과정. 해인은 그 과정이 즐거웠다.
더군다나 이곳은 그림이 만들어 지는 현장.
물감과 종이냄새, 작업실 특유의 약간은 퀘퀘한 냄새까지도 해인에게도 더한 의욕을 불러 일으킬만한 장소였다.
"각자 해인 씨랑 인사도 할 겸, 잠깐 요 앞 카페에서 커피나 할까요? 얘기나 좀 더 하면서..."
"그래요, 나갑시다. 종일 물감 냄새만 맡았는데 잠깐 바깥 바람 좀 쐬어야지!"
해인은 작업실의 화가들과 함께 이곳과 멀지 않아 자주 찾는다는 카페로 이동했다.
"어서 오세요!"
웃으면서 손님을 맞이한 건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각 잡힌 동작을 선보이는 세현이었다.
"어? 당신...?"
"엣? 댁은 지난 번 아를 역 앞에서 해인씨 지갑 같이 찾아줬던 사람?"
썩 유쾌하지는 않았던 기억 속에 서로를 알아 본 와중에, 세현은 대부분이 서양인 남자들의 무리 속, 유독 눈에 띄는 한 여인을 발견했다.
작업실이라고 들어갈 때는 기세등등하더니,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해인이라는 자그마한 여자.
아를에 도착하자마자 마주쳤던 이 세 사람은 이 엉뚱한 상황에서 다시 재회했다.
세현은 눈앞의 해인과 카와모토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가만, 저 여자랑 이 놈...
그 날 처음 본 사이 아니었어? 왜 같이 있는 거지?
이 여자가 아까 저 건물 작업실로 간댔으니까, 이놈이 혹시...?'
의심어린 눈초리로 해인을 바라보는 세현.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 잠시 접객은 잊은 듯 했다.
"어이구, 오래간만에 오셨네들.
요 앞 작업실 청년들이지? 뭐 드릴까?"
잠시 멍을 잡고 있던 세현을 보고 아저씨는 즉시 달려와 지원 사격을 해주었다.
[ 세현아, 왜? 아는 놈들이야? 무슨 일 있어? ]
아저씨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한 세현 곁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 아, 죄송해요...! 갑자기 딴 생각 하느라...
근데 아저씨, 저 놈들이 제가 아까 여쭤봤던 작업실 양아치들인가요? ]
[ 맞아, 걔들...! 저거 봐라, 또 뻗대고 앉았잖아...!
아, 저 여자애는 처음 보는데? ]
[ 아...근데, 저것들 무슨 여자한테 해코지하고 그런 놈들은 아니겠죠? ]
[ 그거야...알 수 없지... 왜? 아는 여자야? 쟤? ]
[ 아, 아뇨...그냥 좀... ]
"여기 주문할게요!"
"앗, 예, 예 갑니다!!"
작업실의 화가들은 커피를 시킨 후, 하염없이 이야기를 해댔다.
해인의 예상대로 외국인 친구들은 각각 스웨덴, 네덜란드 등지에서 이곳으로 온 직업화가라고 했다.
“왜 아를이에요?”
자신들의 소개가 이어지던 중 문득 궁금해진 해인은 화가들에게 물었다.
"왜 아를에서 모여 작업을 하시는 거예요?"
“음... 글쎄요, 왜 아를이었을까, 숱한 유럽 동네들 중에서...”
외국인 친구들은 새삼스럽다는 듯,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마, 다 비슷한 이유 아닐까요, 그러는 해인 씨는 왜 아를로 왔어요? 그림 그리고 싶다면서...?”
“저는...!”
해인은 들고 온 가방 안에서 너덜너덜해진 책을 한 권 꺼냈다.
세현이 비행기 안에서 주웠었던 그 책.
세현의 아버지가 썼던 [ 그들만의 세상 ]이었다.
“이 책, 보셨어요?”
해인은 외국인들 앞에 한국어판 그들만의 세상을 꺼냈다. 책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외국인들은 책 안의 일러스트를 확인하고 나서야 한 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아, [우리들의 세상] 제목으로 나왔던 책...!
나라마다 좀 다르네요. 당연히 봤죠. 이 베스트셀러 작품을...아 그러고 보니 이거 작가가 한국사람이죠, 아마?”
“예, 맞아요.
저는... 이 책의 내용 속 배경 마을로 꼭 와보고 싶었어요. 일러스트도 너무 마음에 들고,
그림을 배울 수 있다면 꼭 이 환경 안에서 배워보고 싶었어요.”
화가들은 나온 지 꽤나 오래 되었던 이 책을 새삼 다시 훑어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일러스트 좋죠...! 이 책... 한 때 막 그림 그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했었는데, 오래 되서 내용 자체는 좀 가물가물하지만 전 세계로 히트 쳤던 명작이잖아요.”
“커피 나왔습니다.”
주문한 커피를 나르던 세현은 아버지의 소설을 찬양하며 열정을 보이는 이 상황을 의도치 않게 목격해 버렸다.
더불어 너무 행복한 표정으로 이야기 하는 해인의 표정도.
세현은 문득 비행기 안에서 해인이 떨어뜨렸던
책 속 가득한 메모들이 떠올랐다.
‘책 안 그림에 이거저거 메모 잔뜩 써 있더니,
진짜 그림 그리러 온 사람이었구나... 저 여자...’
세현은 그저 여유를 즐기러 온 어리숙한 아가씨로만 보였던 해인이 새삼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자신과도 비슷한 입장...
왜인지 모르게 자꾸 얽히기만 하던, 저 여자에게 조금씩 신경이 쓰였다.
“어이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커피 한 잔 마시며 한참을 이야기 하던 작업실의 화가들. 저녁 무렵이 다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해인씨, 정식으로 내일부터 일하는 걸로 할게요. 이거, 작업실 열쇠고요,
오전 10시 정도부터 나와서 부탁드린 거 해주시면 되겠네요. 그럼 내일 뵈요!”
“아무튼 반가워요, 저흰 지금부터 또 들어가서 밤샘 작업 해야겠네요. 잘 부탁해요.”
화가들은 우르르 일어나 작업실로 복귀하고 해인은 반대 방향인 자신의 숙소로 향했다.
“저기, 잠깐만요!”
세현은 해인을 불러 세웠다.
“나, 요거 정리만 하면 끝나는 데 같이 갑시다.”
“왜요?”
“왜? 음... 집도 코앞인데 그냥 좀 같이 가면 안돼요?”
“쳇, 별 꼴이야, 남자가 밤길 무서워하는 거예요? 알았어요, 기다려 드리죠! 저번엔 성큼 성큼 잘도 가더니...!”
해인은 콧방귀를 뀌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테라스 밖의 의자에 앉아 가게 정리를 하는 세현을 기다렸다.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뵐게요. 아저씨.”
“어, 그래 근데 왜 지금 퇴근하니? 자청해서 야근인가... 수당은 못준다!”
“아? 일이 재미있어서 시...시간이 이렇게 된 줄 몰랐죠... 드...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 [ 조심해서 저 아가씨 잘 모셔라... ]"
“예? 아... 아니에요. 그냥 방향이 같은 거예요, 방향이...!!”
“가봐! 얼른!!”
아무 말 없이 세현의 등을 내리치는 아저씨.
돌아서며 픽 웃는다.
‘에이, 뭐야 또, 이상한 생각하고 계시는...’
“아, 진짜! 얼른 갑시다! 잠깐이면 된다더니...”
“아, 미안해요, 가요, 가요!”
세현이 일하는 곳에서 걸어서 20여분이 걸리는 숙소.
처음 아를에 온 날 이후로 같이 이렇게 걷게 될 일이 생길 줄은 몰랐지만, 지금 세현은 그냥 막연하게 얘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항상 아버지의 소설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던 세현으로선, 얘기가 나오는 것조차 극도로 예민한 반응을 보여 왔었는데,
조금 전의 해맑은 모습으로 아버지 소설을 꺼내며 자기 꿈을 이야기 하던 해인에게는 오히려 이야기를 꺼내보고 싶어진 것.
드문 드문 늘어선 가로등 불 아래로 나란히 걸어가는 두 사람. 세현은 잠시 뜸을 들이다 해인에게 말을 걸었다.
“해인 씨.”
“왜요?”
“그... 소설이요, 재미있게 봤어요?”
“무슨, 아 이거요? 당연하죠!! 내 인생 서적인데!! 생전 책 안 읽을 거 같기는 해도 이건 읽었댔죠?”
“네, 읽었죠. 나한테도... 좀 의미가 있는 책이어서...”
해인은 무심하게 걷다가 약간은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는 세현을 힐끗 바라 보았다.
매번 장난만 치고 놀리기나 하더니 왠일로 진지한 모습의 이 남자.
보폭마저도 조절하며 복잡한 표정으로, 뭔가를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얼굴임에 분명했다.
“세현씬, 왜 아를이에요?”
“네?”
뜬금없이 조금 전 화가들에게 했던 질문을 세현에게 던지는 해인.
“일본에서...처음 만났었죠? 우리? 왜 일본에 있다가 유렵으로, 또 하필 아를로 온 거예요?”
어리바리한 줄만 알았는데 뭔가 눈치를 챈 듯한 해인의 직접적인 질문에 약간은 당황한 세현.
“음... 이건 일본의 내 멘토한테도 자세하게 설명한 적 없는 내용인데...!”
“일본에 멘토가 있어요? 하긴, 따지고 보면 내 멘토도 일본에 있는 셈이지만...”
“생각해보니 멘토라고 까지 하긴 좀 그렇고,
암튼 좋은 영향을 많이 받은 친구랄까... 있어요, 같이 알바하던 동료.
음... 그때 해인씨도 누구 친구 만나러 왔다지 않았었나? 그 멘토라는 친구 만나러 왔던 거예요?"
“헉, 그런 얘기 했었나? 참 쓸데없이 기억력은 또 좋네요...!! 맞아요. 고등학교 때 친구였는데, 일찍부터 사회생활 시작해서 일본에서 일 한진 꽤 됐다는 친구 있어요.
사실, 내가 여기 오는 것도 그 친구 아니었으면 결심이 안 섰을 거예요.”
“대단한 영향력이네요. 친구를 지구 반대편으로 보내다니... 고등학교 동창이면 해인씨 정도 나이 됐다는 얘기겠고,
우리... 신주쿠에서 만났었죠? 그 근처에서 만났던 거예요?”
“신주쿠... 였나? 암튼 큰 역 안에서 만나고 나오는 길에 댁 만난 거였죠. 뻔지르르 하게 생긴 남자가 말을 걸었었지. [도와드릴까요~] 하고...! 쳇!”
“잘나가다 쳇은 뭐예요, 쳇은... 내가 쳇! 이다, 흥.”
“어머, 유치한 거 봐...!”
“그렇다 칩시다, 까짓 거...! 일본오는 한국인들
한 두명이 아니긴 하지만 지역도 그렇고 나이도 비슷한 거 같고, 혹시 내 친구랑 알 수도 있겠네요. 그 친구 이름 뭐예요?”
"흥, 남의 친구 이름은 물어보고 그래요...!? 알면 어쩔건데요?"
방문하셔서 응원 부탁드립니다.^^
http://m.me.co.kr/?mode=cdetail&itemNo=206
http://m.novel.naver.com/challenge/list.nhn?novelId=628943&page=1#volum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