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_ 궁금해, 조금씩... ]
"왜 남의 친구 이름은 물어보고 그래요?
알아서 또 스토킹 하려고...!?"
"아, 나... 그냥 물어봤어요, 나이대도 비슷하다니까... 설마하니 많은 일본 방문자 중에 해인씨 멘토라는 사람이 '천아영'이기야 할려구요?"
"그럼요, 일본 가는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천..."
해인은 뭔가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고 세현을 바라보았다.
"응? 방금 천... 아영 이라고 내가 먼저 그랬어요?"
"이 여자가 무슨 소리야, 내 친구 이름이 천아영인데 해인씨가 어떻게 알고..."
두 사람은 미간을 찌푸린 채, 의심스럽게 눈알을 굴리며 비슷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음... 나 지금 좀 소름 돋으려고 하니까 얘기 하려던 사람 이름... 하나 둘 셋 하면 동시에 말합시다. 알았죠?"
세현의 말에 멍해진 얼굴로 고개만 끄덕이는 해인.
"하나, 둘, 셋...!"
"천아영!!"
""!!!!!!""
눈이 휘둥그레 져 당황함을 감추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두 사람.
"아니, 이...이거 봐요... 천아영이가 그렇게 흔한 이름이 아닌데... 친구 이름...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니죠? 음... 전아영 이라던가..."
"참, 내!!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잊어먹을 게 따로 있지!!"
" 와... 진짜 세상 좁다, 좁다 하더니만...어떻게 이러냐...!"
[아영]이라는 어마어마한 공통분모를 발견한 두 사람은 집에 들어가는 것도 잊고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그러니까 천아영이 해인씨 고등학교 동창에..."
"세현씨 아르바이트 동료였다 이거 아니에요..."
"아, 해인씨 혹시 여기오고 나서 아영이랑 연락한 적 있어요? 내 얘기를 한 적이 있다던가... 그래요?"
"연락이야 자주 하죠... 가만, 그러고 보니 자기 아는 사람이 나 오던 같은 날에 유럽행 비행기 탔었댔는데!! 그땐 누구라고 얘기는 안했었지만..."
"헛, 얘기한 적 있구나..! 아영이...
해인씨 고등학교 친구라... 친했어요? 얼핏 스타일은 정 반대인데?"
"고등학교 때... 솔직히 그렇게 친하진 않았어요. 근데 아영이가 워낙 와일드하게 멋지게 사니까 뒤늦게 동경해서 내가 따라다닌 거지...!"
"멋지긴 하죠... 우리 아영 선배님이... 훗...!
나도 아영이한테 좀 그런 게 있긴 해요.
남 눈치 안보고 살고 싶은 데로 사는 게 부럽죠...! "
"아영이랑... 많이 친해요? 혹시 뭐... 남녀끼리... 그런...? 뭐 이상할 건 없지만..."
"음? 해인씨 정말 아영이랑 별로 안 친했구나.
자세히는 말 안 해도, 나름 아픔 있는 거 몰라요? 여자끼리라 말 안하는 건가... 하긴 그 자존심에..."
"아픔...?"
인식하지 못했던 두 사람의 연결고리는 꽤 큰 파장으로 이어졌다.
피곤도 잊은 채 정신이 번쩍 들어 한참 동안 각자의 기억 속 아영이라는 인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두 사람.
긴 수다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려는 찰나, 약간은 쑥스러운 자세로 해인이 세현에게 말했다.
"그리고... 얘기할거 하나 있었는데, 고마워요.
여기 와서 갈피 못 잡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세현씨가 저번에 좀 돌아다녀보라고 했었던 거..."
"음, 내가 그랬었나...!"
"그랬어요! 그래서... 그냥 엉겁결에 아비뇽 다녀왔거든요. 근데 가서 엄청, 엄청~ 영감 많이 받고 왔어요!!"
그냥 지나가는 충고에 이렇게 까지 고마워해주다니, 세현은 괜스레 새어나오는 미소를 숨긴 채, 해인에게 말했다.
"그렇죠? 당연히 그런 덴 봐주고 와야죠...!
풋, 오늘 같이 걸어줘서 고마워요! 담에 우리 카페 오면 내가 커피 한잔 쏜다! 그럼 들어가요."
"예, 그럼, 갈게요. 쉬세요."
그렇게 잦은 우연에, 같은 멘토를 두기까지 했다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이 기묘한 전개에
미묘한 감정까지도 스멀스멀 생겨가는 들어가는 듯 했다.
숙소로 들어서던 해인은 아영과의 관계를 떠나 이 남자의 동선을 다시 한 번 되새김질 해 보았다.
'왜 나랑 같이 가자고 한 거지?'
그리고 생각해보니 이 만남도 잦은 남자가 정확하게 이곳에 뭘 하러 왔는지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었다.
[ 왜 아를 인거냐고... ] 오면서 물었던 질문에도 답을 듣지 못했던 해인.
일찍 잠들어보려 침대에 누웠지만 호기심과 떠오르는 각종 잡생각들 때문에 뒤척일 뿐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고요하던 동네의 적막을 깨고 어딘가에서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끼이익...]
낡은 창문 경첩부에 녹이 슨 건지 열고 닫을 때마다 신경 쓰이는 소음을 내는.
그나저나 이렇게까지 방음이 좋지 않은 방이었나.
머릿속으로 무수한 생각들이 오고갔다.
혹시 맞은 편의 남자가...?
한참을 고민하다 해인은 살짝 창문을 열어 빠꼼히 얼굴을 내밀어 보았다.
[ 끼이익... ]
조심스레 열어, 아무도 몰래 살펴볼 생각이었지만 해인의 방 창문도 낡아있기는 마찬가지였는지,
살짝 열리는 잠깐의 소리가 마을 전체로 울려 퍼지는 듯 했다.
'아, 시끄러워..!! 이 놈의 창문...!'
해인의 예상대로 살짝 열린 창문의 틈새로 보이는, 바로 맞은 편 세현의 방 창문은 열려있었다.
열린 창을 통해 이 소리가 들렸던 건지, 세현 역시도 창가 쪽을 기웃거렸다.
그러다 정면으로, 마주해 버린 해인의 얼굴. 누가 봐도 몰래 숨어 얼굴만 내밀고 있는 듯한 모양새를 빼도 박도 못하고 들키고 말았다.
"응? 해인씨, 안자고 뭐해요? 혹시 나 감시?"
세현은 틈새로 숨어 얼굴만 내밀고 있는 해인에게 놀리듯 장난을 쳤다.
"가...감시라뇨!! 방에서 창문도 못 열어요?
환기 좀 시키려고 잠깐 열었어요, 실내 공기가 좀 답답해서..."
"그렇긴 해요, 좀. 나도 답답해서... 근데 환기를 할 거면 문을 활짝 열지 왜 얼굴만 그러고 내밀고 있어요?
그나저나 이거 창문 열어놓으면 사생활 너무 노출인데? 방이 완전 다 보인다...! 그럼 일 봐요, 너무 늦게 자지 말고...!"
"저, 저기요! 잠깐만요!!"
창문을 닫고 들어가려는 세현을 향해 해인이 외쳤다. 세현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해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까 질문 대답 안했잖아요! 세현씬 여기 왜 온 거예요? 나는 말했는데, 그쪽은 왜 안 가르쳐 줘요?"
갑작스런 해인의 질문에 세현은 잠시 조금 전 상황을 떠올린 후,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을 꺼냈다.
"아, 아까 그거 얘기 안했었었구나...!
뭐 별 거 아니에요. 이거...요!"
세현은 마침 자신의 눈앞에 놓여있던 책을 들어, 맞은 편의 해인에게 보여주었다.
표지가 낡디 낡은 소설 [그들만의 세상] .
"이것 때문에 왔고, 이것 때문에 있어야 하고,
또... 이걸 넘어서야만 하죠...!!"
"그들만의 세상...?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 책 때문에 라니..."
"아까 말했잖아요, 나한테도 꽤나 의미 있는 책이라고..."
"??"
"요 상태로 말해요? 좀 길어지는데? 후훗,
다음번에 해인씨 우리 카페 와서 커피 얻어먹을 때 이야기 더 해요. 그나저나, 약간 집요한 데가 있네...!"
"지...집요하긴 뭐 집요해요!! 나만 얘기한 거 같아 억울하니까 그렇지..!!"
"어쨌든, 해인씨처럼 그 책하고 관련 있다는 거 정도로 오늘은 일단 해둡시다! 얼른 자요!! "
"아, 알았어요! 자요, 그쪽도 그럼..."
"아, 그리고 자연스럽게 소통도 되는 거린데,
앞으로도 얘기 하고 싶음 창문 열어요.
집에 있고 문소리 들리면 나도 열어 줄테니...!
그때는 활짝 엽시다. 무슨 뻐꾸기 시계도 아니고 얼굴만 내밀고 그래...!?"
"앗, 참 그 쪽 여는 소리 듣고 창문 연거 아니라니까!! "
"알았어요, 뭐... 누가 뭐랬나...! 들어가요...!"
티격 태격대며 각자의 방으로 돌아 온 두 사람.
침대에 눕자마자 해인은 아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영아, 난데...!"
"음 해인이, 뭔 일 있어? 뭔가 급한 느낌인데...?"
일을 하던 중, 마침 잠시 휴식을 취하다 전화를 받은 아영.
이제는 거의 정기적으로 걸려오는 해인의 연락에 자기도 모르게 길들여져 가는 듯 했다.
" 내, 참 어이가 없어서... 너 혹시 임세현이라고 알아?"
"어, 알지, 세현이...!! 뭐야, 넌 어떻게 알아??"
"... 거짓말은 아니구나... 일본에서 여권 찾아줬다는 남자 있잖아. 왜, 그 남자가... 어쩌다 계속 이어지고 이어지다 지금 앞 집 살아...! 얘기 중에 너 안다 길래..."
"헉!! 정말이야?? 글 쓰러 유럽 간다고만 들었지, 거기로 갈 줄은 몰랐는데...!!"
"글을... 쓴다고...? 작가... 같은 거야?"
새롭게 알게 된 세현에 관한 사실.
자신이 크리에이터니 어쩌니 했던 말을 그저 장난으로만 여겼던 해인은 세현이 새삼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프로는 아니니까, 작가 지망생인거지.
와, 근데 진짜 신기하다...! 이럴 수도 있구나...
근데 벌써 얘기하는 사이까지 된거야?"
"아 뭐 그냥 어쩌다...! 아무 사이 아니야!!
오해 하지마! 과...관심도 없어!!"
"왜, 세현이 정도면 에이스지...! 잘 생겼지, 키 크지, 나름 얼마나 잘나갔다고... 인제는 자기 꿈도 확실히 있지...!! 게다가 아버지가 무려..."
"아버지...?"
간만에 수다를 떨려던 아영은 순간, 세현이 아버지에 대해 예민한 반응을 보였었음이 떠올라 일단 입단속을 했다.
"아, 아니야... 암튼 집안도 괜찮다고!!"
"음? 그렇게 까지 얘기 하는 거 보니 아영이 너 혹시...?"
"아...아냐!! 미쳤니!? 난 기본적으로 남자란 동물들 안 믿는 여자야!! 그냥 친구지, 친구!!"
한창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 세현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조건 같은 것 몰라도 가끔 세현의 친절한 모습에 미묘한 감정을 느끼기도 했던 해인.
다른 사람과 그 사람 얘기를 하고 있으니 뭔가 더 좋게 포장 되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이 날의 동행은 어떤 의도가 있지는 않을까 의심하던 차.
"훗, 근데 오늘은 전화 타이밍을 좀 잘못 잡았다,
얘. 나 다시 일하러 들어가 봐야 돼. 거기 밤이지? 쉬어 그럼...
아, 나중에 세현이한테도 물어봐야겠다.
히힛! 새끼 새 두 마리가 야생에서 만난 셈이네!"
"엉, 그래, 수고해...새끼 새? 무슨..."
"아냐, 쉬어. 그럼."
재미있어 죽겠다는 투로 급하게 전화를 끊고 일하러 간 아영.
해인은 조금 전 세현의 말과 아영이 알려준 정보를 조합해 보았다.
"[그들만의 세상] 때문에 여기 글을 쓰러 왔다는 건가? 나처럼 알바 하면서... 완전 나랑 똑같은 처지구나..."
세현의 방.
'뭐야, 내가 저 여자한테 왜 같이 가자고 했지?'
세현은 책상에 앉아 글을 쓰며 문득 조금 전까지 이야기를 나누던 해인을 생각했다.
무엇보다 작업실의 화가들과 이야기 할 때 아버지의 소설과 함께 보여준 해맑은 미소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순수해 보이던 미소...
거기에 그 책으로 인해 그림을 그리고 싶어 이곳에 겁도 없이 혼자 왔다는 뒤늦게 안 사실은,
그 순수한 미소의 진심을 뒷받침 해주는 증거로 보이기 충분했다.
분노와 증오에서 용서와 성장을 위해 찾은 이곳, 아를.
아버지를 부정하면서도 무수히 많은 책을 읽어왔고, 아버지 만큼이나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의 미세한 감정들을 겪어보려 가출을 감행했었다.
그 가운데 유일하게 잊고 있던 감정.
그것이 살아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본인조차 의심하고 있는 중이었다.
"연애 따위...!"
이 전에 세현이 만나오던, 무수한 여자들.
서로 원하는 게 있었기에 연인으로 정해지면 그저 남들 하는 것을 ‘의무적으로’ 해오며 지내왔다.
세현의 정신세계에 선천적인 어둠이 밑에 깔려있어서 인지, 누구든 서로 좋은 감정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었다.
남들보다 괜찮은 조건 속에서 상대방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많았지만, 해주면 해 줄수록, 바라는 것은 더 늘어가는 듯 했다.
지겨웠다.
연애란 감정의 실체가 이런 것이라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연애 감정의 모습을 다시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항상 호기심으로 시작해서 실망으로 끝났던 패턴.
본능에 이끌려, 모르는 이성에게 그 호기심을 갖는다는 것조차 질려갔다.
그럼에도, 애증의 대상이었던 아버지의 소설과 무언가 이어져 있다고 생각해서 일까,
지금 이 여자의 이야기, 조금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방문 및 응원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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