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그곳에서...<21화>

[ 21화 _ 엇갈린 커플이야기 ]

by youtoo

"오빠!!"

익숙한 목소리에 기태는 뒤를 돌아보았다.
예상했던 얼굴, 전 여자 친구는 무거운 표정으로 기태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왜?"

아무렇지도 않게, 무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기태.

"오빠 여기 왜 있는 거야?"

혹시나 했지만, 여전히 싸늘한 전 여자 친구의 말투에 잠깐이나마, 혹시나 품었던 기대는 바로 분노로 바뀌었다.

"왜 라니? 나는 이런 데 오면 안 되는 거야?"

"오빤... 이런 데 오는 거 진짜 싫어했잖아. 일행...없는 것 같은데... 혼자서 올 사람도 아니고."

"너는? 너도 이런 데 싫어한다면서 왜 와있는 건데? 같이 온 사람하고 신났던데, 뭘..."

“그래...뭐 오빠도 올 수도 있다 치고... 왔으면 알아서 놀고 가지, 왜 사람은 엿보고 그래?
혹시... 나 따라온 거 아니야?”

“......”

전혀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이 상황에서 아니라고 말하는 게 과연 곧이곧대로 들리기나 할까.


전화로 이별을 통보받던 순간에도 분노가 들끓긴 했지만 모두 이해해야만 했다.

자신이 해주지 못한 부분을 인정하니까,
평범을 원하는 여자 친구가 참다 참다 못해 떠나갔다고 해도 다른 할 말이 없었으니까.

가지 말라고, 가지 말라고 더 붙잡지도 못했다. 갑작스레 찾아온 그 상황을 어렵게 받아들여, 이제 겨우 정리가 되어가는 상황이었거늘...

“할 말 없으니까... 그냥 들어가 마저 놀아.
그리고 분명히 말해두는데, 너 따라온 거 아니야...”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숨기지 못하는 전 여자친구. 뒤늦게 밑에서 전 여자 친구를 따라 올라 온 남자가 따라 나왔다.

“뭐야,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기태는 돌아서려다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다시 전 여자 친구 쪽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어두운 표정으로 심각하게 나간 그녀의 안부를 확인하러 밖까지 따라 나온 듯 했다.

“아니야... 다시 들어가자, 우리...”

전 여자 친구 역시 따라온 남자의 손을 잡아 끌며 애써 기태의 시선을 외면하려 했다.

따라 나온 남자는 자신의 여자 친구 앞에서 센 모습을 보이고 싶기라고 했는 지, 눈앞의 기태를 노려보며 여자 친구를 다그쳤다.

“뭐야, 저 자식이야? 너 전에 만났다던 그 찌질이가? 왜 아직까지도 따라다니는 거야?!”

“아니라니까, 오빠, 얼른 들어가, 들어가!”

어떤 놈인가 싶었더니...대가리는 빈 놈이었구나. 저렇게 말하면 자기 앞에 있는 여자 친구 입장은 뭐가 될까.

기태는 뭔가 억울한 감정이 솟아 올랐다.

그녀에게 이끌려 다시 지하 클럽으로 들어가던 남자. 그 남자를 향해 조용히 있던 기태가 경멸어린 눈빛으로 먼저 말을 걸었다.

“어이! 당신...!”

기태는 분노를 억누르며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왜 이래? 나 따라온 거 아니라며!! 얼른 갈 길 가!! 오빠, 우리 얼른 내려가자! 얼른...!!”

싸움이라도 일어날 듯한 일촉즉발의 상황, 전 여자 친구는 필사적으로 두 남자를 뜯어말리려 해보았지만 이미 분노로 불이 붙기 시작한 기세는 막을 수 없었다.

“나한테 찌질이네 어쩌네 하는 거 보니 이미 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는 있는 모양인데, 처음 보는 사람한테 말을 너무 막하는 거 아닌가?"

“흥, 지금도 보니까 파악 끝나네, 얼마나 찌질하면 이별 통보 받고도 이러고 졸졸 쫓아다닐까? 들은 대로의 이미지라는 건 똑똑히 알겠어!”

“상황이 참 뭣 같이 됐는데... 나 싫다는 애 쫓아다닌 적 없고, 찌질하네 어쩌네 하는 건 댁이 신경 쓸 바 아니잖아? 댁한테 직접 찌질하게 군것도 아니고!”

“지금은 내 여자 친구니 남의 일은 아니지, 더군다나 아직까지도 이렇게 꽁무니를 쫓아다닐 정도면...!"

기태는 피식 웃으며 더 날카로운 눈초리로 남자의 위 아래를 훑어본 후 서서히 다가와 얼굴을 들이밀었다.

“지금 남자친구시라고...? 음... 보아하니 집에 돈은 좀 있는 모양인데, 하나만 알려주고 꺼져 드릴께.”

약간은 혼이 나간 듯한 기태의 표정과 행동에 남자는 흠칫 놀라며 당황한 표정을 감추려
더 과격한 말을 퍼부었다.

“뭐, 뭐야!! 이 자식! 죽고 싶냐!!??”

“얘 말이야, 옆에 계속 끼고 있고 싶거든 가진 돈 새어나가지 않게 단속 잘해...! 춤추고 이럴 때 보니까 아직 좋아서 죽고 못 살 때 같은데...”

남자는 기태의 멱살을 잡아 올렸지만, 기태는 몸의 힘을 쭉 푼 채, 당황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저 분은 워낙에 하고 싶은 게 많고 바라는 게 많으신 분이라 지금이야 좋아 죽겠다는 표정하고 있겠지만, 조금이라도 부족한 모습 보이면 바로 갈아탈 준비부터 하는 애니까...”

“뭐...뭐라...”

“알다시피... 내가 얘 전 남자친구야...
잘 못나가는 전업 작가에 집에 가진 돈도 없어 쟤 기준에서 보자면 거지나 다름없다고 봐야지...

근데 초반엔 그러더라... 돈 없어도 열정 넘치는 모습이 좋다고, 열심히 하고 있으니 꿈 이룰 거라고...”

남자는 멱살을 잡혔음에도 전혀 두려움, 분노 없이 반쯤 감긴 눈으로 담담하게 말을 이어가는 기태에게 뭔가 섬뜩함을 느꼈다.

“근데... 기대했던 시기가 지났는데도 아직까지도 못 나가는 작가라... 버림을 받게 되더라고... 다 내 책임이겠지, 뭐...

네놈을 언제부터 만나왔는가는 모르겠는데... 불과 몇 주 전 까지는 내 여자친구였어!
네 놈이 꼬득인 건지, 저 계집애가 휘둘린 건진 알 수 없지만...”

“그건... 네놈이 하도 병신 같이 구니까...!”

“그렇지? 옆에서 죽으라고 쏘삭거렸겠지. 저 거지한테 벗어나서 이것도, 저것도 다 해줄 수 있는 나한테 와라...! 하면서...”

기태는 멱살을 잡고 있는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

“흠, 뭐 어쩌겠어... 가진 게 없어 해줄 수 있는 게 없는데, 붙잡아 놓을 수도 없잖아?
바로 갈아탄 데도 뭐 어쩔 수 없는 거지..."

기태는 멱살 잡혔던 자신의 옷 매무새를 정리하며 더 목소리를 깔았다.

"아, 아직 쟤 친구라고 하는 애들은 못 만났지?
쟤도 쟤지만 친구들 조심해...! 뭐라고 털어대면서 흔들어 놓을지 모르니까...
보니까 그런 데에 잘 휘둘리더라고... 왜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 짜ㅡ악!! ]

뒤에서 가만히 듣고 있는 전 여자 친구가 어느 사이 기태 옆으로 와 있었던지, 계속 주절대는 기태의 뺨을 후려 쳤다.

"그래, 내가 쳐 죽일 년이다...! 그러는 너는, 여자 친구를 위해서 뭘 희생했었니..."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현재 남자친구라는 남자의 손을 강하게 끌고는 다시 클럽으로 들어가 버리는 그녀.

기태는 우두커니 서서 자신의 얼얼해진 뺨을 어루만졌다. 그렇지만 웬일인지 무뎌진 듯한 감정.

이상하리만치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후... 생각지도 못했던 데에서 어마어마한 소재 하나 얻어 가네...?"

기태는 집으로 향하며 자기도 모르는 한숨을 지었다.







***





"우리 영감이... 지난 주에 가버렸어..."

프랑스 아를.

이곳의 터줏대감으로 세현이 이곳에 오기 훨씬 전 부터도 늘 할아버지와 손을 꼭 붙잡고 레스토랑에 찾아와 커피와 함께 담소를 나누곤 했던 한 할머니.

오늘은 구슬프게도 혼자 찾아 와 눈물을 보이고 있었다.

세현의 에피소드 노트에 단골로 쓰여 지기도 했던 동네의 행복한 노부부가 사별을 맞이했다는 것이었다.

아저씨의 레스토랑은 이 동네에서 꽤 오래 된 가게였던 만큼, 돌아가셨다는 할아버지는 사장 아저씨와도 꽤나 친분있는 사이였다.


"갈거면...같이 갔어야 하는건데... 이렇게 먼저 휙 가버리면 어떻게 살아..."

할머니는 슬픈 표정으로 사장 아저씨와 세현의 손을 꼭 붙들고 호소하였다.

건강 때문에 멀리 나아갈 수 없던 노부부에게 마을 한 가운데의 이 카페는 늘 좋은 데이트 장소가 되어 주었었는데...


이곳, 남프랑스 아를은 다른 남프랑스의 지역들과 함께 예술적 영감을 주는 마을임과 동시에, 고즈넉한 분위기와 멋진 풍경들이 있어 노후를 보내고 싶은 곳으로도 정평이 나 있었다.

실제로 관광객들을 제외한 주민들 중에는 노부부들이 눈에 많이 띄곤 했다.

세현은 울먹이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나머지 손마저 꼭 잡았다.

어렸을 적부터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던 세현은 이곳 아를 레스토랑에서 만났던 이 노부부와 특히 친했었다.

동양에서 넘어온 서글서글하니 잘생긴, 손자 같은 청년이라며 노부부는 특히 세현을 예뻐하기도 했다.

“할머니, 기운 내세요... 더 자주 오셔야 돼요..."

주인아저씨의 부탁으로 세현은 온 몸에 힘이 빠져 잘 걷지도 못하는 듯한 할머니를 부축해 댁까지 모셔다 드렸다.

나오면서 보인 할머니의 뒷모습은 퍽이나 쓸쓸했다.

아마도 같이 있던 집안의 보이는 모든 것들이 할아버지와의 추억일 테니...

특히 가장 이상적인 노년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이 부부의 사별은 개인적으로도 크게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 달이 조금 넘어가는 아를 생활.
이곳 사람들이 보여주는 일상의 여러 모습들은 세현의 에피소드 노트를 풍성하게 채워주고 있었다.

세현의 글쓰기 수행을 위한 가출이 어언 4년차에 들어서는 시기.

그의 보물 노트 속 에피소드들은 언제나 다시 다른 글의 소재거리로서 활용을 기다리고 있었다.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다.

적어도, 잘 나간다는 아버지 밑에서 부러움 없이 잘 살던 때에는 절대로 경험하지 못했을 일들과 느끼지 못했을 감정들이 넘쳐났다.

문장력 향상을 위해서 틈틈이 수필을 쓰기도 하고 강렬한 소재들과 잊을 수 없는 사건들은 재편집, 재구성하여 단편으로 제작해 두기도 했지만,

세현이 처음부터 만들고 싶어 했던 장편 소설은 아직 시작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인생의 일부였던 존재를 잃어 통탄에 빠져있는 이 할머니를 보며 세현은 착잡함에 원래의 장편 작품 집필에 전념할 수 없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과 행동, 말투 등,
어떤 모델의 한 형태로서 무수한 창작 에피소드 노트의 주인공이 되어 주었던 이 부부.

세현은 고민 끝에 이 할머니에 대한 단편소설을 써보기로 하였다.

이야기는 의외로 순식간에 떠올랐다. 카페로 가고 오는 길 내내 세현은 떠오른
이 이야기를 메모장에 잘 정리해 두었다.

세현은 그날 밤부터 필사적으로 집필에 매달렸다. 일할 때나 밥 먹을 때나 오로지 글 구성과 퇴고에만 매달린 지 나흘 째.




“저기요, 잠깐만요...!”

일요일 오후 경.
세현은 집 창문을 열어 앞집의 해인을 불렀다.

[ 끼이이익... ]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열린 창문 너머에는 세현 만큼이나 쾡 해있는 눈을 한 해인이 있었다.

“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 다크 써클이 저 1층까지 쳐져 있는데?”

“흥, 사돈 남말 하시네, 세현씨는 땅 파고 들어갈 정도예요. 그쪽이야말로 무슨 일 있었어요?”

“잠깐... 면회신청 좀 할게요...!
뭐 좀 부탁할 것도 있고... 잠깐 산책 ok?"

"음... 그래요, 나도 인제 좀 움직이려던 참이니까.”

잠시 후 집 앞에서 만난 두 사람은 이제 조금은 익숙해진 레퓌블리크 광장 쪽을 향해 산책을 하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해인씨, 작업실에서 혹사시켜요? 왜 그렇게 팍 늙었어요?”

“늙긴 뭘 늙어요!! 그냥 피곤하니까 다크 써클 좀 생긴 거 가지고... 업무 말고 그림 작업을 시작했어요. 그거 그리고 하는데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더라고요. 욕심 생겨서 손에서 못 놓다보니까..."

“그림 그리러 왔다더니, 거기서 업무 도와주면서 그림 같이 그리는 거 였구나... 어떻게, 할 만해요?

일터 한 번 기가 막힌데로 잘 잡기는 했네! 그림 업무 도와주면서 그리기 까지 할 수 있는 곳이라니..."

“그렇죠? 다 카와모토 씨 덕분이죠, 얼마나 친절하게 잘 가르쳐주는지 몰라요.
내가 뭐 물어보고 귀찮게 해도...”

“그... 그래요? 생긴 거랑 좀 다른 모양이네... 그래도 조심해요, 그 자식 무슨 꿍꿍이가 있는 지 몰라...”

“다르긴 뭐가 달라요! 생긴 것도 예술적으로 생긴 사람이니까 생긴 대로 해주고 있구만...
혹시 질투...?”

“질투는...무슨...!! 거, 거기서 한다는 일은 무슨 일인 거예요? 귀찮은 사무작업 다 떠다 넘긴 건가...?”

해인은 속으로 피식 웃으며 실눈을 뜨고 추궁하듯이 질문을 해대는 세현을 바라보았다.

“뭐가 그렇게 궁금하실까...?”

“이...이웃끼리 좀 알고 삽시다...! 까짓 거!!”

세현은 변명을 해댔다.

“흠, 그리고 해, 해인씨, 나... 사실 해인 씨한테 얘기할 거 있어요...!”

해인은 갑자기 곤두선 촉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현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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