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2화 _ 처음으로... 네에게 ]
“해인 씨, 나, 해인 씨한테 얘기 할 거 있어요...!”
이 남자, 갑자기 뭐야...
해인은 침을 꿀꺽 삼키며 아무 말 없이 세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실, 나... 글 쓰러 여기 왔어요.
전에 왜, 일종의 크리에이터라고 얘기한 적은 있었죠?”
“아? 아... 예...”
“해인 씨랑 자세하게 얘기한 적이 없기는 하지만... 해인씨도 그림 그리러 여기 온 거잖아요? 솔직히 좀 놀라긴 했지만...”
“에? 뭐가 놀라워요?”
“일본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그렇고...
뭐랄까, 좀 허술한 사람이겠구나, 했는데...
하고 싶은 거 하려고 이제까지 쌓아놓은 거 어느 정도 포기하고 여기 온 걸 거 아니에요?"
갑자기 치고들어온 예상치 못했던 세현의 얘기.
해인이 예상했던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진심으로 이야기하는 듯한 세현의 말투에 해인 역시 아직까지도 조금은 남아있던 경계가 서서히 풀어져 가는 듯 했다.
“포기라... 뭐 그것도 그거지만...반대가 장난아니었죠... 특히 집에서는 말도 못했어요. 조용히 잘 지내던 딸내미가 갑작스럽게 가출이라니...! 하면서...”
“그렇겠죠, 갑자기 나간다는데... 그것도 바다 건너..."
"저번에 세현 씨가 아영이 안다고 했을 때 아영이한테 전화해서 좀 듣긴 했어요.
글 쓴다는 것도... 사실 그 때 들어 알고는 있었어요.”
“아, 아영이랑 연락했구나...! 어디까지 들은 거예요...!?”
“응... 뭐랬더라... 자기 꿈이 있고... 잘생겼고..키도 크고...앗!!”
“왜요...? 듣기 좋구만! 계속해요, 계속...!”
“흠, 너무 여자들끼리 수다를 까발리는 것 같으니 이 정도에서 멈출게요. 아무튼... 글을 쓰러 유럽에 왔다고... 그때 먼저 듣기는 했었어요.”
이야기 하다보니 어느 새 광장에 도착한 두 사람.
전에 세현이 해인의 화장실 용무를 도와주었었던 그 카페의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아영이가 그거 말고... 다른 얘기는 없었죠?”
“다른 얘기요? 음... 뭐 하려다 말았던 거 같긴 한데, 집안이... 어떻다 그랬던가...”
“흠, 그래요. 뭐...”
그 전과 같이 커피를 사와 나란히 테이블에 앉은
두 사람은 광장의 분수대를 보며 이야기를 계속 했다.
“암튼, 해인씨도 보기보다 강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구나 싶어, 조금... 믿음이 간달까요...”
“흥, 고마워해야 되는 건가. 생각보다 쎄보인다는 말은...! 근데, 면회 요청해서 부탁하겠다는 게 뭐예요? 나 돈은 없으니까, 그쪽 관련이면 사양합니다.”
“헛, 이렇게 불러놓고 내가 돈 빌려 달랄까봐?
걱정 마요, 그런 거 아니니까...!”
“음? 그럼 딱히 뭐 떠오르는 게 없는데? 뭔데요?
반찬을 달라거나 그런 것도 안됩니다...! 나 먹을 거도 지금 없어요..."
세현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작심한듯,
가지고 온 봉투에서 10여장의 서류를 꺼냈다.
“뭐예요? 이게? 유럽까지 와서 보험 들라고 영업하는 건 아닐 테고...”
세현은 헛기침을 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흠... 이건... 제가 쓴 소설이에요. 완성한지 얼마 안된 단편이죠. 따끈따끈 해, 아주...
알다시피 제가 저기 앞 레스토랑에서 일하잖아요? 거기서 친분이 생긴 한 할머니를 모티브로 해서 소설을 만들어 봤어요.”
해인은 테이블에 놓인 서류를 들추며 세현을 힐끔 올려다 보았다.
“소...설이요? 직접 쓴 소설? 그런데...이걸 왜...”
“이거 한 번... 봐 줄래요?”
“에!!?? 내가 왜요?”
서류와 세현을 번갈아 쳐다보며 해인은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이걸 왜 저한테 보여주시는 거예요?
작정하고 쓴 글이면 보통 유출 안 시키려고 막 그러지 않나... 소설가들은...”
“소설가들은 그럴 지도 모르죠. 근데 난 아직 아니니까...”
세현은 서류들을 해인의 앞 쪽으로 조심스럽게 놓아주며 이야기 했다.
“말했잖아요, 해인씨는 좀... 믿음이 간다고.
[그들만의 세상]이 자기 인생 소설이라고 하면서,
그 일러스트 때문에 여기까지 올 정도로 열정 있는 예술인이라면 같이 의견을 듣고 싶어서 그래요.”
“예술인은 무슨... 근데 정말 괜찮아요?
나 보여줘도?”
“나는 봐줬으면 좋겠는데, 선택은 해인씨가 해주는 거죠. 정 부담된다 싶음 퇴짜 맞는 거고...”
해인은 조심스럽게 자기 앞에 놓여진 봉투 속 종이를 한 장 한 장 꺼내어 훑어보았다.
빼곡하게 쓰인 10여장의 단편 소설.
결코 장난삼아 말하는 분위기는 아니었기에 해인은 조심스럽게 서류봉투에 다시 소설을 넣으며 세현에게 말했다.
“그럼... 잘 볼게요. 어떤 계기인진 모르겠지만 일단... 믿어준다니 고맙네요.”
“고마워요. 읽고 감상을 좀 얘기해 줄래요?
100% 완성했다고 보여준다기 보다,
고쳤으면 하는 부분이라던가, 더 넣었으면 하는 부분 있거든 같이 얘기해 달라는 부탁인 거예요.”
“그래요, 어렵게 부탁해 준건데 그 정돈 당연히...!”
두 사람은 테라스에 앉은 채 시덥지 않은 얘기부터 자신의 일상과 일과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 했다.
각자 아영과의 에피소드 역시 이제는 이야기의 단골 소재가 되어버린 듯 했다.
처음같은 틱틱거림 만이 아닌, 조금은 더 가까워진 이웃 주민...
몇 시간이 흘렀을 까, 해인은 작업실에 잠시 들러야 겠다며 세현과 헤어졌다.
세현은 자신에게 받은 단편소설 봉투를 품에 꼭 안은 채 작업실로 향하는 해인을 흐믓하게 바라보았다.
“아, 이거 괜히 보여줬다가 지적만 신나게 듣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뒤, 자신이 가진 것이 너무 없다고 여겨 일부러 이러저러한 경험을 통해 에피소드를 만들어 왔었지만,
세현은 자신이 쓴 글을 누구에게 보여주려 하는 것이 처음이었다.
아니,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스스로를 대단하다고 치켜세운 적은 없지만, 자신이 만든 세상을 누군가에게 들키거나,
큰 무대에 내놓기 전까진 꽁꽁 싸매 감추어 왔던 버릇 때문일까.
상대가 해인이라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보여 지는 것 자체 만으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대와 불안은 동시에 느껴졌다.
‘집에 가서 정독해 봐야지...’
나온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소위 ‘따끈따끈’한 신작 열람에 앞서, 미리 열어보고픈 충동을 억누르며
해인은 봉투를 꼭 안은 채 작업실로 향했다.
해인은 작업실에 들어와서 전문가들에게 배운 첫번째 가르침. 즉, '완성에의 경험'을 느껴보려 본격적으로 그림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이곳에 와서 처음 그렸던 아비뇽 배경의 상황 표현작.
주일은 사무 업무로 나오지 않아도 되었지만, 자신의 작업까지 병행하고 있어 신경이 쓰였던 해인은 작업실에 들를 참이었다.
“어이! 지금 장난하는 거야? 어디 새어 나가고 있는 돈 있는 거 아냐?!”
어딘가...
고요하기 그지없던 이 아를 동네에서 보기 드문 고성이 울려 퍼지고 있다.
해인이 향하는 작업실이 가까워질수록 더 크게 들려오는 목소리들.
“작업실 임대료가 어떻게 그렇게 오를 수가 있는 거야? 우리 각자 나누어 내기로 하고 지금 거의 두 배 가까이 오른 거 아냐? 이게 말이나 되는 거야?!”
“해인 씨 오기 전엔 우리가 돌아가면서 관리했던 거잖아! 각자 돌아가면서 한번 씩 담당해놓고선 왜 이제 와서 비싸네 어쩌네 그러는 건데??”
“카와모토 너야 그냥 혼자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다 쳐, 우리들은 가족이 있는 몸이라고! 이런 거 변하면 민감할 수밖에 없다고!”
틀림없이 거론되었던 자신의 이름, 작업실에서 들려오는 싸움 소리가 명백했다.
한 번도 크게 다투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지라 작업실에서 들려오는 이 정도의 분쟁에도 해인은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히 작업실에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을 줄 알고 음료를 사서 준비해 갔던 해인.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신이 들어가 자리 잡고 있기엔 어색할 것이 뻔했다.
해인은 가지고 온 음료를 문 앞에 놓아두고 메모를 남겨둔 채 숙소로 돌아왔다.
“뭐 맨날 좋을 수야 있겠어? 저렇게 자기 세계 확고한 화가들 끼리 모여서... 말싸움 할 수도 있는 거지 뭐...”
전에 없던 불안함이 생겨나기는 했지만, 억지로 아무 일도 아닐 것이라 못박았다.
집에 도착한 해인은 오는 내내 들추어 보고싶은 욕구를 참았던 세현의 소설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레스토랑에서 손님으로 만난 할머니 모티브라...”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소설은 짧았다.
아니, 짧게 느껴졌다.
몰입도가 올라 갈 수밖에 없는 환경이어서 인지,
그야말로 순식간에 다 읽혀진 내용.
해인은 놓친 페이지라도 있나 다시 확인하면서도 순간 전달된 뜨거운 감정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떨구었다.
“어라...”
어느 새 빨려 들어가 버린 이야기 속 슬픈 결말.
아무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맞은 카운터 펀치와도 같이,
글을 읽어가며 빠르게 움직이던 눈동자가 눈 어딘 가의 눈물샘을 건드린 듯.
"에이...이거 왜 이래 바보같이...! 이깟 소설이 뭐라고..."
아니면 이제는 거의 할머니가 다 되었을 엄마가 떠올랐음인지.
해인의 눈에선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러고 보니 날 좀 내버려 두라며 악다구니를 쓰고 집을 뛰쳐나와 아직까지 가족에게 연락 한번 하지 않았던 것이 새삼 떠올랐다.
아직까지도 소설이 여운이 가시지 않은 시점.
해인은 빤히 핸드폰 속 엄마의 번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눌러버린 착신 버튼.
통화 연결음은 하염없이 길었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해인이니? 해인이야?!"
".........."
"아이구 맞네, 이것아! 밥은 먹고 다니냐? 왜......인제서야 연락을 해!! 썩을 것아!!"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다그치는 목소리.
틀림없는 [우리 엄마].
"엄...."
해인은 복받쳐 오르는 울음에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엄....마... 엄....마 엉...."
"왜...왜 울고 난리야!! 나간다고... 그렇게 악다구니를 쓰고 나가더니 ... 연락도 하도 안되고 해서 어떻게 된 줄 알았잖아 나쁜 년아!!!"
딸의 울먹임에 더 강하게 이야기 하는 듯한 엄마였지만 오래간 만에 들리는 딸 목소리에 눈물이 차고 올라 오는 건 마찬가지였다.
"잘 있어? 간다는 덴 잘 도착한거야? 먹는 건 어때? 있는 데는 불편하지 않고?"
"응..."
서서히 진정이 되어가는 듯한 해인은 못다한
그 간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생각지도 못했다.
세현의 소설이 가족과의 연락의 교두보가 되어줄 줄은.
"응, 엄마, 미안해... 이제 연락 자주 할 께.
잘 있어...!"
몇 년이나 이어져 왔었을 가족과의 불화가, 일시적이겠지만 이 전화 한번으로 해소가 된 느낌이었다.
무언가 쌓여있던 앙금까지도 한꺼번에 풀려버린 기분.
어느 새 맞이한 깊은 밤.
해인은 잠을 청했지만, 소설 속 이미지와 그로 인해 가족과 연결될 수 있었던 고리가 신기해 쉽사리 잠들 수 없었다.
“으음...”
침대에 누워 한시간 째 뒤척이는 중이지만,
감은 눈 속에서 계속해서 아물아물 맴돌고 있는 그 이미지.
“에잇!!!”
해인은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스케치북을 열어 떠오른 이미지의 스케치를 시작했다.
“부르르르...!!"
기왕 시작한 김에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작업 중이던 해인. 알람을 위해 옆에 두었던 핸드폰으로 문자가 도착했다.
“엥? 이 시간에 누가 문자를 보내? 여기 알 만한 사람이... 아영인가?”
[ 지켜보고 있었던 거 아닙니다...갑자기 불 켜지 길래... 새벽인데 안자고 뭐해요? ]
반사적으로 창문 너머 세현의 방 불 역시 켜져 있는 것을 확인한 해인.
혹여나 고칠 부분은 더 없는 지 늦게까지 소설의 퇴고작업 중이던 세현은 3시가 넘어가는 새벽시간에 다시 불이 들어온 해인의 방을 발견하고 연락을 보냈다.
“후우...!!”
안도인지 뭔지 모를 한숨을 내쉬는 해인.
바로 답장을 보냈다.
[ 댁 때문에 지금 잠이 안와요!! 어떻게 할 거예요? ]
“엉??!!”
방문하셔서 응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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