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그곳에서... <23화>

[ 제23화 _ 언젠가 잡고 말거야...! ]

by youtoo

뜻밖의 문자를 받아 든 세현.

“뭐야, 이 여자...이건... 뜬금없는 고백...??
왜 나 때문에 잠이 안 온데??”

세현은 화들짝 놀라 창문너머를 기웃거리며 몰래 건너편을 훔쳐보았다.

어둠 속, 창으로 켜져있는 불빛은 보였지만 반투명한 유리창 탓에 방 내부는 잘 보이지 않았다.

[ 이쪽 그만 보시구요...! 거기서 서성거리는 거 여기서 다 보입니다...!]

“헉!! 젠장!!”

[ 보..긴 뭘 봐요...!! 근데 무슨 말 이예요? 나 땜에 못 잔다니... ]

[ 세현씨 소설 때문에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가시질 않아요...! ]

[ 벌써... 봤구나. 어때요? 괜찮아요? ]

[ 네, 좋아요...감동도 있고 반전도 좋고... 잘봤어요 ]

[ 지...진짜요? 고마워요, 그렇게 봐줬다니... ]

[ 아직 작가 아니고 초보라더니 문장도 그렇고 어휘도 그렇고...엄청 고급지던데요?
쉽게 쓴 글 아닌 거 같아... ]

[ 뭐...쉽게 쓴 글은 아니죠...! 양에 비해 오래도 걸렸고...! ]

사실, 엄청난 감동에 흐름을 타고 가족과의 화해까지 이어졌다는 에피소드까지도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혹시 몰라 해인은 일단 말을 아꼈다.

문자메세지로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 이어져 갔다.

처음으로 세상 밖으로 공개한 글에 대한 나쁘지 않은 평가.

직접 만나 이야기하는 것이었다면, 창피했을 정도로 세현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공모전 출품도, 전문가한테 평가를 받고 있는 것도 아니건만, 소설을 해인에게 넘겨준 이후로 세현은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선택했던 자신의 인생 2막의 시작 여부를 판가름하는 평가처럼 느껴지기라도 한 건지.



[ 그래서, 지금 소설 다시 보고 있는 중이에요? ]

[ 아뇨, 그냥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맴돌아 잠이 안온다고요. ]

[ 역시 그림 그리는 사람은 이미지로 떠오르는 구나... 그럼 한번 그려보지 그래요? ]

[ 에이, 무슨 소리에요, 나 같은 초짜한테...
그냥 가족들도 생각나고 그래서... ]

실제로 그것 때문에 새벽에 깨어 스케치를 하고 있는 중이었지만, 아직 자신있게 이야기하기엔 창피했는지,

해인은 그 사실을 섣불리 세현에게 얘기하지 않았다.

[ 내용 중에 어디... 수정이 필요하다거나 이런 데는 혹시 없어요? ]

[ 음... 내가 뭘 알겠냐만은... 한 번 봐선 잘 모르겠던데, 좀 더 보고 말할게요.
암튼 다시 봤어요, 세현씨. ]

[ 소설은 다시 볼 거고... 지금은 나를 다시 봤다는 거죠? 대체 몇 번을 다시 볼 거야!? 나 충분히 멋있는 사람이라고!! ]

[ 은근슬쩍 말 놓네...나도 확 반말 까버릴까보다... ]

[ 흥, 누가 천아영이 친구 아니랄까봐, 오라버니한테 바로 말줄임표네... ]

[ 시끄러요! 빨리 자! 나 이제 잘라니까... ]

[ 얼래? 점점 더 천아영 말투가 보인다... ]

얼굴을 보면서도 이렇게 장난칠 수 있을지.
세현와 해인은 밤이 새도록 문자로 툭탁댔다.






***






“크리스? 라는 분이요? 일본 분이신가요?”

“예, 일본인이에요.”

“음...저희 쪽에 크리스라는 이름을 가진 분은 안 계신데요.”

“혹시 비슷한 이름의 다른 분이라도...”

“아, 죄송합니다. 개인정보에 관한 부분은 민감해서, 저희도 도와드릴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 크리스 ]라고 밝혔던 이전 남친에게 연인을 빙자해 돈을 갈취당한 지 이제 3년 째.

아영은 일본에서의 자기 꿈 실현을 위한 자금을 모아두려 이곳저곳 일에 매진 하느라 몹시 바빴지만,

그와중에도 틈틈이 그의 행적을 쫓아왔다.

이상하리만큼 한 번도 자신의 집을 공개하지 않았던 전 남자친구.

이제 와 생각해보면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살았다는 동네의 부동산이며 이야기 중에 나왔던 관련 직종이며,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니긴 했지만 외국인 신분으로 현지인을 찾기는 어려웠다.

특히나 절차를 엄격하게 따지는 일본 경찰에 맡기자니 여러 번 들락날락하며 시간만 뺏길 거 같고,

자칫하다가 자국에 알려져 '외국에서 사기당한 한국여자'라는 오명까지도 쓸 수 있으니.

할 수있는 한 개인적인 기억으로 찾아다니려 하는 아영이었다.

찾아다니는 시간 역시도 아깝기 그지 없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쌓인 울분을 다스릴 수 없을 것 같았다.

'내 기필코 직접 찾아내서 그 놈을 죽여버리..'

옛 남자친구에 대한 애틋함 따윈 잊은 지 오래다.
오해 같은 감정으로 다툰 것도, 집안의 문제,
혹은 국적의 문제로 갈라선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재수 없는 사기꾼에게 잘못 물려 철없던 순정을 탈탈 털려버린 과거의 아영.

남은 것은 그저 분노뿐이었다.

싸잡아 남성 혐오, 나아가 주변인에 대한 불신이 생겼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언니, 그냥 잊고 다른 남자 만나...!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거래, 원래...!!”

아영의 사정을 대충 알고 있는 같은 일터의 동생은 일을 병행하며 사람 찾기에 여념이 없는 아영에게 지나가는 말로 가볍게 얘기하곤 했다.

“시끄러! 남자고 뭐고 털린 돈은 받아야 할 거 아냐!? 누가 남자 못 만나서 안달 났다디?”

“대체 얼마를 털렸 길래 그래? 뭐 한 돈 백 돼?”

“... 말을 말자...! 기집 애야! 네 볼 일이나 봐라!!”

“아니, 남자가 아무리 찌질해도 그렇지 어떻게 여자한테 돈을 꿔 갈 생각을 하냐!!?
언닌 그걸 또 빌려줬어?”

“얘 말하는 거 봐라? 남자면 뭐 날 때부터 돈다발 안고 태어 난다디?

어쩌다 형편 안 되면 돈 빌릴 수도 있는 거지 뭐, 받고 날라버린 게 문제지만...! 남자 여자 문제가 아니잖아!”

“언니는 안 그럴 거 같이 생겨서 남자한테 빠지면 그냥 막 퍼주는 스타일이구나?
이 시대에 얼마 안남은 순정파?”

“이 지지배야!! 약 올리냐?
도와줄 거 아니면 저기 가서 청소나 해! 얼른...!”

어디부터가 잘못 되었을까.

연애를 빙자한 사기꾼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지금, 아영은 있는 힘껏 몸을 혹사해, 남차친구에게 빌려주었던 돈 이상으로 더 벌어 놓은 상태였다.

그렇지만, 금전적인 부분에 양심문제까지 덧대어 놈을 직접 잡아 응징하기 전에는 가슴 속 응어리가 풀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어느 새부터인가 그녀의 전 남친 찾기는 정기적, 의무적인 스케쥴이 되어있었다.

점점 희박해져 가는 가능성에 포기할 만도 하지만, 분노의 기억을 한 시도 잊지 않으려 매일 되뇌어 가며 끊임없이 수색에 매달린 지도 모른다.



"아영 선배님, 뭐 하나 물어 볼 께요."

"뭔데요? 업무 외적인 거는 묻지 말고요."

"예, 이거 어디에 갖다 놓는 거예요?"




"아영 선배님, 뭐 하나 얘기 할 께요."

"뭔데요? 일에 필요한 거만 얘기해요."

"예, 점장님이 직원회의 있다고 오래요."





일본에서 아영이 세현과 같이 일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입으로는 늘 필요 없다던 타인의 관심을 은근히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던 건지,

새로 온 한국 남자 직원의 무관심이 괜히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이게 공주 병인가... 맨날 여기서 만난 한국 남자 놈들은 나한테 수작을 부렸었는데... 쟤는 벌써 들어 온 지 몇 달째인데 별 다른 얘길 안하네...!'

"아영 선배님, 무슨 할 말이라도?"

"아, 아니에요! 왜요?"

"아니, 빤히 쳐다 보길래..."

"아니에요! 세현씨 본 거... 착각하고 있네!!
근데 일 끝나고 뭐하길래 맨날 부리나케 튀어 가는 거에요?..."

그래도 말 통하는 한국인인데 소통이 안 되어 답답했던지 아영이 먼저 말을 걸었었다.

“아, 서점 가서 책 봐요. 할 것도 있고...
그러는 아영씨도 매일 바쁘시던데요 뭐...”

“나야, 다음 일 가는 거고, 근데,
일본에 왔는데 서점가서 책을 봐요? 희한하네...”

엉뚱하게 시작해 서서히 대화를 트기 시작했던 아영과 세현.

각자 가고자 하는 길이 있고 서로에게 달리 바라는 게 없어서 그랬는지 금새 성별을 넘어선 친구가 되었다.

“아직도 그 사람 찾으러 다녀?
벌써 몇 년 째라며... 일도 힘든데 이제 그만해.”

“흥, 그만하라고 멈췄을 거 같으면 이 짓,
내가 시작도 안했어...!!”

“그 남자 이름 뭐라고? 크리스?
뭐야, 딱 봐도 가명이잖아. 남아있는 사진도 없고, 돈 빌려주면서 무슨 각서를 쓴 것도 아닐 테고,

집도 모르고... 어떻게 찾을 거야... 일본인들이 개인정보 어디 쉽게 알려주디? 경찰 조사도 아니고...”

“가명...이겠지...? 하긴... 일본이름이 크리스 일 리가 없지..."

“모르지, 나야...
근데 그렇게 큰 돈 빌려다 튈 생각이었으면 의도적으로 접근했다고 봐야지...

무슨 계기로 만났는진 몰라도..
그냥 아주 뻑 갔었나보구나? 그 남자한테...”

“가긴 뭘 가! 너네 남자 놈들 다 똑같아!!
너도 조심해!!”

“큰돈 송금했으면, 계좌정보가 있을 것 아냐. 경찰에 신고해 계좌 정보로 알아보면...”

“알아봤는데 어렵 데... 한 번에 다 준 게 아니라서... 그것도 신고를 해야 조회를 할 텐데...

그냥... 무서워, 다른 나라에서... 아무도 못 믿지...!!
암튼 걱정해주는 마음만 받겠어! 신경 안 써도 돼! 내가 알아서 할라니까!!”

본인이 이리도 완강하니 앞장서서 세현이 총대를 메어 줄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그러기를 1년이 넘어가는 시점.
세현도 떠나고, 자신만이 과거에 머물러 점점 의미 없는 집착을 하고 있다고 여길 때 즈음.

아영은 새벽이 다 되서야 끝나는 야간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전차에 올랐다.

만만치 않은 월세에, 도심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 방을 구한 아영,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는 늘 인적이 드물었다.

“아, 피곤하다...! 하루 정도는 좀 쉬고 싶은데...”

텅텅 남는 좌석에, 고개만 옆으로 떨구면 그대로 스르르 잠이 들 정도의 피로감을 가까스로 견디며 아영은 출구를 나와 집 방향으로 걸어갔다.

출구나 이어지는 교통로 만도 수십 개인 일터 근처 신주쿠와는 달리, 집으로 가는 지하철은 작은 단 하나의 출구 만이 이어져 있었다.

12시가 다 된 시각.
도심에서 살짝만 벗어나도 일본은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간혹 자전거를 타고 순찰을 도는 경관들을 제외하면 이 시간에는 사람 구경하기가 힘들었다.

환하게 불이 들어와 있는 곳은 드문드문 위치한 자그마한 편의점 몇군데 뿐.

집까지는 아직 10분 이상을 더 걸어야 한다.
익숙한 거리, 어둠 따위는 전혀 무섭지 않았지만 다만 지루할 뿐이었다.

아무도 없는 골목에 음악을 들으며 지나가던 중,
아영은 평소와는 다른 인기척을 감지했다.

“음?”

음악을 끄고 뒤를 돌아보았다.

가로등 저 너머로, 누군가가 자신을 뒤따라오고 있음을 인지한 아영.

누군가 따라온다는 일, 이래저래 [ 잘난 ] 아영에게 처음 있는 일은 아니지만,

이렇게 집 근처까지 몰래 따라온 기억은 없었기에 뭔가 오싹한 기운이 서서히 등을 타고 내려왔다.

‘아니야, 무섭다고 이대로 그냥 가면... 사는 데를 들켜버릴 거 아냐? 강도인지 도둑인지...

그냥 먼저 선수를 쳐버려? 아이 씨... 아까 경찰들 나다닐 때 얘기 할 걸...’

아영은 음악을 끄고 점점 걸음 속도를 늦추어, 온 정신을 귀에 집중해 뒤 따라오는 듯한 사람의 행동을 예측했다.

자신의 발소리에 맞추고 있는 듯한...
뭔가 허술한 움직임이었다

‘에잇! 나도 모르겠다!!’

아영은 갑자기 뒤로 돌아 인기척이 의심되는 방향으로 내달렸다. 갑작스런 돌발행동에 따라오던 수상한 자도 놀랐는지 주춤하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전력으로 달려오는 아영과, 잠시 주춤하던 순간에 정면으로 얼굴이 마주친 수상한 남자.

남자는 반대로 아영이 뛰어오자 놀라서 반대방향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대로 보내버린다면 이 상황은 모면할 수 있을 것을, 아영은 굳이 도망가기 시작한 남자를 쫓았다.

“야 임마!! 너 누구야!!! 누군데 나 따라오는 거야!?”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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