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그곳에서...<27화>

[ 제27화 _ 알면 알수록, 위험한 데이트... ]

by youtoo

“저기요, 여기서 간다는 데가 어딘지는 몰라도, 저기는 잠깐 들러야겠네요...!”

액상 프로방스에 도착해 해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장소.

이 지방의 대표미술관, [그라네 미술관]이라고 하는 곳이었다.

제안 아닌 통보에도 세현은 해인의 행동을 예상이라도 한 듯, 가벼운 미소를 보이며 뒤 따랐다.

벌써 저만큼 멀리 앞으로 나아가 얼굴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성큼성큼 미술관 입구로 향하는 발걸음으로 충분히 예측이 가능했다.

“그래요, 뭐 실컷 보셔요...! 그러자고 온 건데 뭐, 따로 조사 한 게 아니긴 하지만...

근데 여기, 잠깐 들를 수 있는 규모는 아닌 것 같은데...”

멀찌감치 떨어져 거의 혼잣말이 되어버린 웅얼거림으로 툴툴대며 세현은 해인을 뒤따랐다.

입구부터 이 지역 출신이라는 조각가들의 작품을 시작으로 세잔과 피카소, 램브란트, 마티스, 고흐...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다 알만한 화가들의 그림이 섹션별로 옹기종기 전시되어 있었다.

[그림쟁이]를 지향하며 이곳에 머물고 있는 예술가들이라면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는 장소.

예술 방면에 전혀 문외한이었던 세현은 그저 차례차례 눈으로 훑으며, 그림보다도 더 신기하게 해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곳에 온 이래 쪽 해인을 보아왔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 왔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되긴 했었지만,

이렇듯 똘망똘망한 눈동자로 어딘가 집중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열심히 사진을 찍고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며 메모를 남기는 모습.

무언가 이야기나, 소재가 생각났을 때에 메모장을 꺼내어 메모를 남기는 자신 역시도 남들에게 이렇게 보이지는 않을까.

그림의 화풍이 어떻고, 작가가 어떤 시대를 대표하는, 어떤 역사를 담고 있는 지.

그런 건 아는 바가 없었지만,

이야기꾼이 되기를 자처한 세현 역시도 이내 그림 한 장 한 장에 담긴 강렬한 스토리 성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전히 품에 소지하고 있던 메모장을 꺼내어 적기 시작했다.

“음? 세현씨도 그림 좋아 하나 봐요? 뭐 열심히 적고 있네?”

“결과로 만들어져 있는 게 그림이든 글이든, 큰 틀에서 보면 어떤 [이야기] 잖아요?

그림은 몰라요. 그냥 그 이야기인지가 궁금한 거지...!”

“오~! 아, 맞다, 작가님이시지... 맨날 장난치고 놀려대기만 하니까 좀 의심됐었는데,

보여줬던 글도 그렇고, 얘기하는 것도 그렇고, 생각해보니까 작가 맞네요! 풋.”

“[작가 맞네요] 해놓고 [풋]은 또 뭐예요. 꼭 잘나가다가 안 터져도 될 때 터져가지고 신빙성 확 떨어뜨려...”

해인은 무수하게 쏟아져 나오는 화가들의 그림에 정신이 혼미할 정도의 환희를 느꼈다.

두 그림쟁이와 글쟁이 지망생의 미술관 관람은 몇 시간이 지나도록 계속되었다.

“저기요, 다 좋은데 뭐 좀 먹으면 안돼요?”

“...그러게... 배는 좀 고프다. 세현씨 안다는 데 어디예요? 밥 먹으러 온 거니까 아는 데 있는거죠?”

“몰라요, 그런 게 어딨어...

소풍 정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맛 집 조사까지 일일이 다 했을 리가 없잖아요.”

“나도 이거 참, 고질병인가, 여기서도 여행객들 마냥 오늘 하루에 끝장을 다 보려고 아주... 일단 나가요, 우리.”

"그러게, 그거 병이야, 병!!

몸을 아주 혹사 시키는 게 습관이 되어 있더라, 저번에도 보니까...!"

그러고 보니 오늘 하루 일어나서 제대로 된 식사 한번 못했던 두 사람. 목이 마르고, 배는 고파왔다.

다리도 허리도 슬슬 아파가는 시점에 허기짐 때문인지, 힘도 다 빠진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미술관을 나와 [미라보]라 불리우는 메인 거리로 나왔다.

저택들과 넒은 길, 가로수가 죽 늘어선 곳에 그만큼이나 많이 늘어선 시장 상점들.

곳곳에는 지도를 들고 돌아다니는 여행객들 투성 이었다.

“뭐 먹을래요?”

“하아...뭐든...!”

“갑시다. 가다가 꽂히는데 있으면 거기 들어가요. 선택은 맡겼으니 책임은 못 집니다!”

“... 음, 좋아요, 가요 일단!!”

아직 낮 시간이라 거리가 이어지는 길목 곳곳에는 좌판이든, 상점의 전시건 아기자기한 소품과 식료품들이 가득했다.

배가 고파 식당을 향하는 길에도 눈길을 잡아끄는 사방의 볼거리들.

그러나 당장은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건지, 그 중심부를 쓰러지듯 걸어가는 배고픔에 지친 두 명의... 흡사 좀비들.

해인과 세현은 넓은 미라보 거리를 지나 아를의 좁은 골목을 연상시키는 좁은 골목에 들어섰다.

본능에 이끌려, 그 안으로 진입하니, 옹기종기 그 모습을 드러낸 식당가.

사방에 풍기는 음식 향기에 취해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무심결에 이끌린 어떤 식당으로 들어갔다. 세현은 묵묵히 해인의 뒤를 따랐다.

“이 거, 이거로 주세요!!"

여행객들의 취향을 맞춰주기 위함인지 다양한 나라의 음식을 파는 가게들이 보였지만, 한국인의 밥심이 절실하다고 느껴서 였을까.

그들이 들어온 곳은 덮밥, 볶음밥류를 취급하는 베트남 식당이었다.

“음식 나왔습니다."

정신없이 마구 흡입해대는 두 사람.

이 순간, 둘 사이엔 별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순식간에 채워 넣어 어느 정도 허기가 사라진 시점에서야 정상적인 대화가 다시 가능해졌다.

“세현씨는... 여기 와서 어디 많이 돌아다녔어요? 보기에, 나만큼이나 바쁘게 사는 것 같던데...

예술가한테 영감을 주는 장소 많다고 알려줘 놓곤, 본인은 별로 안다니는 거 같아요... 보면“

게 눈 감추듯 눈 앞의 음식을 비워내고, 여유롭게 후식을 즐기며 해인이 물었다.

“나도 근처 말고는 못 다녀봤어요.

어차피 메인을 여행으로 왔던 건 아니니까.”

“메인은... 소설인거죠? 음, 소설가라... 그러고 보니 나 보여준 그 소설은 얼마 만에 쓴 거예요? 그런 거 쓰는 사람들 보면 참 신기해...”

“음... 구상 잡아 쓰고, 퇴고하고 한 것 까지 치면 한 일주일 정도 걸렸네요. 피차일반이죠. 나도 그림 그리는 사람들 참 신기한데...”

식당에서 나와 액상 프로방스의 곳곳을 더 돌아다니던 그들.

넘치는 열정으로 미술관에서만 몇 시간을 보냈지만, 액상프로방스의 묘미는 그곳뿐이 아니었던 지,

가도 가도 끊임없이 나오는 이국적인 볼거리가 두 사람을 잡아 끌어댔다.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 새 어둑어둑해진 하늘, 해인과 세현은 미라보 거리의 가장 큰 분수대 앞 카페테라스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건물의 무수한 조명들과 어둠이 같이 작품을 만들어내는 듯한 액상프로방스의 밤.

프랑스의 낮과 밤은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는 서로가 같이 있는 것이 그리 어색하지 않은 두 사람이었다.

“후... 해인씨, 한국 생활... 좀 물어봐도 되요?”

“엣, 뜬금없이?”

“뜬금없어요? 풋, 보면 볼수록 나랑 겹치는 게 좀 많아 보여서 물어봤어요. 어쩌다 그림 배운다고 여기까지 오게 된 건지...”

해인은 진지한 분위기로 자신의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 하고 있는 세현과 눈이 마주쳤다.

늘 장난스럽게 이야기하곤 했지만, 이번만큼은 장난기를 뺀 진지한 모습이었다.

“무슨 관련 업종에서 일해 오다가 더 공부를 하고 싶어서 유학을 왔다거나 하는, 그런 있어 뵈는 이유는 아니죠. 다 버리고 온 거나 마찬가지니까...”

“다 버려요?”

“음... 다니던 직장, 가족, 친구, 사람들 시선...

30에 가까운 여자가 이 정도 포기하고 왔으면 다 버린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여기에 더 열정을 쏟을 수밖에 없는 거고...”

“버렸다고... 표현할 정도로 반대들이 심했던 건가요?"

“많이... 부딪힐 수밖에 없잖아요. ‘네가 살아온 게 있는데’, ‘그거 한다고 뭐가 달라지냐’, ‘왜 편한 인생 놔두고 생고생이냐’ 는 식에... 친구고 가족이고 다 똑같았어요...”

“아무래도... 다르면 질타를 받는 사회니까...”

“훗, 근데 세현씨도 알고 있는 그 천아영이가 오래간만에 만나서 이런 얘길 해 주더라고요.

[ 자기는 이래저래 다 귀찮아서 그냥 나가 산다고, 인생 혼자 가는 건데 왜 눈치 보며 사냐고, 하고 싶은 거 하라고... ]

이러니 안그래도 불만투성이었던 제가 불이 안 붙을 수가 있겠어요?”

“훗... 답다... 다워...! 역시 아영 선배님...”

“그림 그리는 건 내 평생에 꿈이었어요.

업계가 어쩌네 저쩌네를 떠나 그냥 그리고 표현하고 싶은 걸 어떡해요.”

“음... 아영이 말고 뭐 남자친구나...

응원해 주는 사람 전혀 없던 거예요?”

해인은 세현을 가는 눈으로 응시하며 말을 이어갔다.

“부모며, 친구도 이해 못 해주는 판에, 그런 걸 이해해주는 남자 있겠어요?

별나도 너무 별난 ‘여자친구’를 끝까지 이해해 줄 수 있는 남자... 내가 봤을 땐 없어요.”

“...왜요? 있을 수도 있잖아요...아직 젊으면서...”

“없어요. 나중에, 자리나 잡게 되면 또 모르지,

이래저래 신경 쓰고 할 것도 많은 와중에 연애?

남자들이 바라는 연애란 거 뻔 하잖아요.

난 못할 거 같아 포기했어요.”

“뭐, 벌써 포기를 해요!!?”

“남들 스타일가지고 뭐라 할 생각은 없지만, 연애라는 거, 기본적으로 만나고, 즐거운 시간 갖고 서로 의지 하려는 게 목적일 거잖아요. 그게 마음이 됐건 몸이 됐건...”

“음... 대부분이 그런 식이기는 하지만...”

“이상주의자라고 해도 좋아요.

아까 말했지만 다 버리고 바다 건너 온 판국에, 끝가지 꿈을 응원해 주면서 의지가 되고, 기다려 줄 수 있는 사람? 과연 있을까요?

연애라는 게 나도 상대방한테 잘해줘야 하는 건데 그게 안 되면 이기적인 거잖아요.

서로 신경 쓰게 되고, 그러면 하려는 일도 제대로 안될 게 뻔하고...”

이런 마인드를 가진 여자였다니...

세현은 자신이 과거에 만나왔던 여자들과 비교하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난 일단, 큰 결심하고 나왔으니 하고 싶은 것부터 할 거예요! [그들만의 세상] 속에 나온 배경 안에서, [그들만의 세상] 속 일러스트 같은,

자유로운 일러스트를 한 순간만이라도 그리면서 살아보자는 게 학생 때부터... 내 꿈이었으니까...! 이래저래 미뤄오긴 했지만...”

“그들만의 세상...”

다시 이야기 속으로 등장한 아버지의 소설.

세현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이 확고부동한 여성에게 어디까지 말을 해야 분위기를 망치지 않을 수 있을지...

“세현씨도 뭐 비슷한 이유예요? 그러고 보니, 세현씨도 그 소설 때문에 왔댔잖아요...

너무 내 얘기만 주구장창 했더니 억울해서 안 되겠다.”

“음...! 내가 왜 나도 해인씨랑 비슷하다고 했잖아요.

엄밀히 나도 글쓰기 시작한 지 얼마 안됐어요.

말하자면 나 역시도 한국에서 많이 포기하고 왔어요. 글... 쓰고 싶어서...”

“소설 영향이라면, 소설 속 배경이 아를이라서 여기서 글 쓰고 싶었던 건가요? 그럼... 중간에 일본엔 왜 있었던 건데요?”

세현은 무언가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자세를 고쳐 잡고 해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해인씨, 그림 그리는 사람은 보통 뭘 그리죠?"

"... 떠오른 생각이나 보이는 풍경, 사물 이야기의 표현...뭐 이런 거죠. 갑자기 왜요?"

"그렇죠... 근데 글도 똑같은 것 같아요.

떠오른 이야기를 자기 입장에서 만들어 내 문자로 옮기는...이것저것 참고도 하지만요...!"

"뭐, 그렇겠죠!"

"그거에요. 나도 너무 어둡게만, 좁게만 살아서 만들어 낼 수 있는 이야기가 별로 없었어요.

해인씨도 일단 집을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듯이, 나도 일단은 서울에서 나와 지방 곳곳을 돌았었어요.”

“아, 일본가기 전에 또 한국 지방에서 떨어져 살았었구나...”

“뭔가를 쓰고 싶은데, 뭘 써야 될지를 모를 때의 절박함이랄까...

어차피 이야기라는 게, 다 사람 사는 얘기인 거잖아요, 인간이 됐든, 동물이 됐든... 봐주는 사람들도 결국 사람인거고...”

“그래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흠...약간 부잣집 도련님들이 자주하는 말 같은데...

‘오늘 서민의 생활을 체험해보기 위해 시장을 방문했습니다!’ 같은...”

“아니... 어찌됐건 사람들 틈에 있어야 이야기도 보고 듣는 거잖아요!”

“알았어요. 뭐... 그래서 한국 지방 돌다가 일본까지 간 거네요. 결국엔 여기까지 왔고...”

“가까운 일본이라도 국내랑 국외랑 있을 때 기분은 많이 다르죠, 이제는 해인씨도 많이 느끼겠지만... 더 집중하게 되는 뭔가가 있달 까...”

“맞아요, 그런 거 좀 있는 거 같아요.

뭔가 좀 긴장하게 되고...!”

“음, 그리고 [ 그들만의 세상 ] 말인데요.

나한테는 해인씨처럼

‘감명 깊게 읽은 책 중에 하나라 그게 모토가 되어 이런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는 정도가 아니에요...”

“...에? 그럼 뭐예요?”

긴장하며 목소리를 가다듬는 세현.

지금이라면, 이 사람에게라면 괜찮을 것 같단 생각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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