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8화 _ 영혼이 가득 담긴 한 마디, 그리고... ]
"그러고 보니...
세현씨 그때 해줬던 말 기억나네요, 그 책 때문에 왔고, 또... 넘어서야 한다고...그랬던가."
"엣, 내가 그런 말을...?"
"했잖아요, 창 너머에서 있는 폼 다 잡으면서...
이제 와서 괜히 안한 척하는 거 보니 창피하긴 한 모양이죠...? 대체 소설하고 무슨 관련이 있단 거예요?"
"아, 아니..."
살아오며 너무나도 듣기 싫었고,
자신의 큰 트라우마가 되어있는 그 사실을.
먼저 자신이 입에 담는 것이 민망한 생각이 들긴 했지만 눈앞의 이 여자, 한번 믿어보기로 하고 세현은 천천히, 조심스럽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들만의 세상] 말인데요... 그 소설...
사실 우리 아버지가 쓴 글이에요..."
"에? 뭐예요?
뭐... '우리 아버지가 먼저 비슷한 내용을 생각했는데 다른 누군가가 먼저 출판을 했다, 원래 우리 아버지 게 오리지널 인데' 이런 장난하는 거예요?"
"아니에요, 장난하는 거 아니고...
그 책을 정말로 직접 쓰고 출판한 작가... 그 사람이 내 아버지라고요... 소설가 임형우..."
"에? 작가 임형우씨... 세현씨가 임세현...이니까 그러니까... 그...러면?!“
해인은 순간 너무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겨우 차린 정신으로 세현의 눈을 바라보며,
"누차 말했지만... 이거, 내 ... 내 인생 소설이니까, 그런 거 가지고 장난치면 안돼요!! 정말...이예요??"
세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세계적인 베스트 셀러 작가의 아들이...
아버지 같은 작가가 되고 싶어 글쓰기 연마 중이라는...건가요? 지금 내 앞에 있는 남자가..."
조심스럽게 꺼내긴 했지만, 기왕 밝혀지게 된 사실에 후련해지기라도 한 듯, 세현은 의자 뒤쪽으로 몸을 기대며 크게 한 숨을 들이 쉬었다.
"후우... 뭐, 비슷한 상황이죠... 좀 늦은 나이에 내린 결심이긴 하지만, 이래저래 힘든 일 투성이네요.”
새삼 해인은 세현을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분명 현실의 상황은 달라진 게 없는데,
눈앞의 이 남자, 주변의 정보들이 더해져 무언가 조금씩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바로 그런 시선이죠. 이러저러하다는 걸 알게 됐을 때에 날 바라보게 되는 시선... 참 부담스러워요..."
"옛?! 뭐...뭐가요??"
"해인씨처럼 얘기나 많이 할 수 있어서
'사실은 이렇습니다' 하고 설명이나 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생판 모르는 남들은 그렇지가 않아요."
"남들...이요? 남들은 어떤 데요?"
"시선은 딱 한가지 뿐 이죠. 아버지 잘 만나 호위호식 한다, 아버지 빽 믿고 실력도 없는 게 필드로 나오려고 한다, 위대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 좋겠다...
애초에 아버지 수식어 없는 '나'는 없어요,
‘나는 나다’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그렇게 봐주질 않으니까.”
자신을 향한 시선을 저렇게 줄줄 꿰고 있을 정도로 시달려 온 걸까.
얼핏 유명인 가족이라면 풍족한 경제력 안에서 더없이 행복하기만 할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임형우씨는 워낙에 세계적인 대작가가 되신 분이니... 시기하는 사람도 많을 수밖에요...
근데 세현씬 하필 왜 작가를 하려고 했던 거예요?
아버지의 영향력으로 봤을 때 그런 상황들, 아주 예상 못할 상황들도 아닐 텐데...”
조근조근 얘기하는 해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어딘가를 잠시 응시하던 세현은 숨을 한번 가다듬으며 다시 말했다.
"일단은 아버지가... 싫었죠.
부정하고 싶었고, 작가 같은 거, 심하게는 아예 생각도 없었어요.
사람들이 보고 안다고 하는 아버지는,
뛰어난 문장력으로 세계에서 인정받은 작가의 모습, 그게 다잖아요?
다른 건 아무것도 모르겠지..."
"다른 거??"
"아버지로서의 임형우씨 말이에요.
이제 어느정도 받아들이기로 하긴 했지만, 아직 난 용서하지 않았어요. 최악이었죠."
해인은 가만히 세현의 말을 경청했다.
"작가라는 직업에 대한 혐오감까지 생길 정도였어요. 작가라는 작자들은 다 저런 건가 싶어서... 일부러 아버지와는 다르게 살고 싶어 아주 이를 득득 갈았죠.
잘 사는 집이니 풍족하지 않았느냐고요? 그렇죠... 충분히 풍족하게 살긴 했죠, 물론...아버지 덕분에... 그렇게 쌓여만 가던 불만에, 이제는 덕 안보고 혼자 좀 살아보려고 하는데,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도 그 꼬리표는 떼고 갈 수가 없는 거예요. 알고 있겠지만, 돌아가시고 난 후에도 작품으로 영원히 살 거 같다고나...”
담담하게 이야기를 해 나가는 세현.
액상프로방스의 밤 풍경을 구경하기 위해서 일까,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해 조용하던 분수 앞은 서서히 웅성대는 소리로 들어차기 시작했다.
새삼 시계를 확인한 세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해인에게 말했다.
"후우...! 돌아가는 시간도 있고, 슬슬 우리도 일어날까요. 이제...?"
엉겹결에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세현을 따라나선 해인. 이제까지와는 달리 무언가 어색함이 감돌았다.
세현은 해인을 슬쩍 내려 보았다.
너무 심각한 얘기라 흥미를 잃은 걸까, 아니면 알게된 자신의 정체가 불편한 걸까,
해인은 일부러 시선을 피하려는 듯 다른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 퍽! ]
"아얏!"
세현은 해인의 등을 가볍게 찰싹 때렸다.
"뭐예요? 갑자기!!"
"그러지 마요, 왜 갑자기 어색하게 그래?"
"내... 내가 뭘요!? 아, 아무렇지도 않은 걸 뭐...!"
세현의 돌발 구타로 조금은 분위기 반전에 성공 한 건지,
두 사람은 차로 향하는 동안 가벼운 장난을 주고받던 그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는 듯 했다.
남프랑스 밤의 도로는 그리 밝지 않아 운전이 쉽지 않은 듯 했다.
원래부터 그런 분이기인지는 몰라도, 차가 그다지 많지 않은 도로에서도 속도를 올려 쌩쌩대며 차를 모는 운전자들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안전에 신경을 쓰는 건지, 아니면 조금 더 이야기 시간을 벌고 싶어서 인지, 세현 역시도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로 차를 몰았다.
"그래서요?"
"응??"
서서히 멀어져 가는 조명 가득한 액상 프로방스를 바라보던 보조석의 해인이 세현에게 말을 걸었다.
"다른 일 하겠다고 매달렸다면서, 지금은 왜 아버지 같이 작가를 하겠다고 나와 있는 건데요?"
"음... 글쎄요..."
"뭐예요, 얘기를 시작했으면 끝까지 해 줘 봐요!!"
"훗, 또 아영이 말투 나온다...! 알았어요!!"
번화가를 나와 그저 산과 들로 이어진 캄캄한 어둠뿐인 차 밖의 풍경.
얘기는 더 집중도 깊게 빠져들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탔을 때도, 난 아버지 소설 안 봤었어요."
"에? 왜요??"
"용서하기 싫었으니까. 왜 그 소설 배경이 아를이잖아요?"
"그렇죠. 그것 때문에 나도 와 있는 걸..."
"아를... 아버지가 소설을 썼던 곳도 아를이었어요. 그리고 집필 당시에 나도 거기에 같이... 있었고."
"임형우 작가님이 [그들만의 세상]을 쓸 때 같이 있었다고요!!??"
"그래요, 가족이니까. 당시엔 꼬맹이였지만...
왜, 우리 만났던 초반에 내가 여기서 살았던 적 있다고 했잖아요. 그게 그 때였어요. 5살, 6살 됐었으려나...”
"와우!!"
"뭐가 와우야! 아버지라는 사람한테 남은 기억이라곤 그 때가 전부인 걸...!
그 후에도 아버진 여기 몇 번 더 왔을지 모르지만, 같이 있었던 적은 그 때 뿐이었어요.“
“음...그럼 세현씬 여기 다시 와서... 어렸을 적 기억을 되살리고 싶은 거?
‘아버지의 길을 선택 했습니다’ 하는... 무슨 의식 같은 건가...”
“...의식이라고 하긴 좀 거창하고...
대학 때 정도에나 읽게 되었던 아버지 책을 나중에 평범하게 회사를 다니면서 다시 보게 됐죠.
슬슬 분노가 잠잠해졌던 시기여서 그랬나... 그러니까 여기 있던 때도 막 생각이 나면서...
전혀 생각지도 않던 창작욕이 솟구치더라고요.
그동안 즐기고 놀고, 이러던 다른 것들은 다 의미 없어지고...
그래서 고민 끝에 나온 거예요.
그리고 글을 시작한다면 여기에서 하고 싶은 마음도 생기고...”
“음...그렇구나... 그런 또 기나긴 역사가 있을 줄은 몰랐네...”
“해인 씨 아버지는 괜찮은 분이셨겠죠? 임형우씨 같이 이기적인 분은 아니시겠죠?”
“우리 아버지?”
해인은 갑자기 멍하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했다.
“글쎄요, 괜찮은 분 이셨을라나... 난 뵌 적이 없어서...”
“......?!”
“...괜찮은 남자니까 엄마가 결혼하지 않았겠어요? 좋은 남편이기는 했었을 거예요, 아마... 남자로서 어떤 남자였는가는 엄마가 잘 판단했겠죠 뭐...”
세현은 아차 싶은 마음에 아무 말 없이 해인의 눈치를 살폈다. 의외로 슬픈 표정도, 그리워하는 표정도 아닌, 그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찍 돌아... 가신 거예요?
미안해요, 그런 줄도 모르고...”
“뭐가 미안해요, 얼굴이 기억도 안 난다니까...
음, 나한테 동생이 하나 있으니까, 나 어릴 적에 잠깐 계셨던 거 같긴 한데...
말할 수 있을 때쯤에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대상, 난 없었어요...”
“그렇구나... 아이고, 이거 괜한 걸 물어봤네요... 완전 응석부린 셈이네...”
세현 역시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 후, 해인이 다시 보였다.
일을 만들어서 하고, 몸을 혹사시키면서 까지 무언가 열심히 움직여대던 이제까지의 모습들과 겹쳐지며 복잡한 감정들이 중첩되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맏이 역할이었으려나... 힘들게 살았겠구나... 이 여자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차는 어느덧 아를 시내로 진입했다. 10시에 가까운 시각.
두 사람은 처음 차를 탔던 빵집의 옆에다 차를 대고 집 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세현씨 오늘 즐거웠어요. 소풍까지 준비해주고... 고마워요.”
“아니에요. 모처럼 쉬는 날인데 같이 여행가면 좋은 거죠, 뭐... 오늘 얘기도 많이 해서 저도 좋았어요. 너무 수다를 떤 것 같지만... 하핫”
“훗, 뭐 그 수다 나쁘지 않았어요.
같이 가자 해놓고 아무 말 안하고 있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오늘 어려운 얘기도 해주고... 새롭게 안 사실이 충격적이긴 하지만서도!!”
“그 충격, 받지 말고 넣어둬요!! 어제랑 다른 게 뭐가 있겠어요?
내일은 또 난 레스토랑 가서 일하고 글쓰고... 해인씨도 작업실가서 일하고 그림 그리고...
그냥 아무렇지 않은 거예요.”
해인은 잠시 머뭇거리면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세현씨, 그... 나 보여줬던 세현씨 소설 말인데요...”
“예? 그 소설이 왜요?”
“아, 제가 사실... 음... 아, 아니에요!! 나중에 얘기해 줄게요.”
“뭐야, 뭔데 그러지...”
세현의 소설을 모티브로 그림 작업을 진행하며, 요즈음엔 온통 그 생각 밖에 없었던 해인.
얘기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지만 참고 또 참았다. 조금 더 완성도를 올려 떳떳하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말하고자 하는 욕심을 가로막았다.
“들어가요, 오늘 피곤할 텐데 얼른 쉬어요!”
“예, 세현 씨도요, 아... 세현씨!”
“응??”
해인은 문득 무슨 생각이라도 난 듯 집 문까지 갔다가 몸을 돌려 세현에게로 가까이 왔다.
깜짝 놀라는 세현.
“왜...”
해인은 세현의 바로 앞으로 다가와 손을 잡고 악수를 하며 세현의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나지막하게 소리로 말했다.
“세현 씨, 잘하고 있어요. 열심히 하고 있고...
힘내요... 이제 옛날 얘기하는데 그렇게 힘빠져 있을 필요 없어요! 그럼, 잘 자요!”
자신도 말해놓고 쑥스러 웠는 지, 자기 집 문으로 후다닥 들어가 버리는 해인.
세현은 해인이 들어가 버리고 닫힌 문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분노를 용서로 바꾸기 위해, 때늦은 꿈 타령을 하며 혼자 버티고 버텨 온 작가여행 길이었다.
듣기 싫은 수식어와 질투, 핍박을 무시해가며 선택한 이 길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보이는 결과를 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항상 자신을 옭아매어 왔다.
이겨내야 한다는 부담감은 자신을 외롭게 만들었고, 도와준답시고 나타난 이들의 영혼 없는 응원 메세지는 그저 비아냥으로 들릴 뿐이었다.
무수한 사람을 겪어오며 많은 일들을 경험해 왔다. 돌아와 보면 늘 혼자였지만.
그리고 이제는 누군가와의 대화에서 영혼의 유무를 식별할 수 있을 정도 이야기꾼은 되어 있는 세현이었다.
‘잘...하고 있다...’
분명하게 영혼이 꽉 꽉 들어 찬 긍정의 응원 메세지. 처음이었다
예상치도 않던 세현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저... 저 여자, 왜 사람을 가지고 노는 거야...”
늦은 아를의 골목.
주변에는 아무도 없이, 다만 자그마한 여자의 말 한마디에 찔찔 짜며, 얼굴을 닦는 한 남자가 우두커니 서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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