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9화 잔혹한 이별, 희망으로 기록되다 ]
“좋아...!! 이거 괜찮은 걸...!!!”
한국.
[ 그들만의 세상 ] 출판사에서 비밀리에 진행 중인, 전 세계 규모라는 공모전 정보를 미리 알아냈던 기태.
거의 일주일 가까이 집안에만 콕 틀어박혀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래... 내가 현실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치자,
이 나쁜 계집애야...’
지난 번, 소설의 소재 구상 차 번화가를 탐방 중,
본의 아니게 재회한 전 여자 친구와의 기막힌 해프닝 후, 기태는 바로 소재를 확정지었다.
바로 그 해프닝의 당사자, 전 여자 친구와 자신의 연애사를 모티브로 한 이야기.
이야기는 당연히 자신의 부정적인 시선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잘해주고 싶었지만 가난한 글쟁이였기에 그러지 못했던 자신, 그리고 결국 참지 못해 떠나가 버린 그녀.
재구성되는 이야기 속에는 그녀를 향한 부정적 시선 정도가 아닌, 현실에서 직접 행하지 못한 ‘복수’까지도 담을 계획이었다.
당연히 소설의 주요 캐릭터를 설정하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만나며 느껴온, 실재하던 기태의 여자친구 '희진'.
자신의 이미지 속에서 더한 악녀로 변화해 갔던 그녀의 모습은, 보다 과장된 캐릭터로 재탄생 되었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이야기여서 였을까,
진행 속도는 이전 글들보다 빨랐고, 사건 구성 역시도 매끄럽게 흘러가는 듯 했다.
'각오 단단히 해라...!! 한기태...
이번 한 번으로 네 인생은 180도 달라지는 거야...!'
"글이란 건 어차피 사람들이 보는 [ 이야기 ]야!!
보는 사람이 우선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사람들이 원하는 이야기, 좋죠...!
그래도, 그것 때문에 작가가 전혀 자기 색을 못 내서야 되겠어요?! 나름 살아오며 생각하던 바를 글로 옮기는 건데...!"
"어차피 이 시대에서 이야기란 상업적인 쪽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어!!
작가주의 좋다고 팔리지도 않는 글 쓰면 누가 봐주기라도 한데?! 독자는 냉정하다고!!"
기태는 자신이 기고 중인 출판사 관계자들과의 언쟁을 떠올려 보았다.
생각해 보면 늘 비슷한 지적이었다.
[ 무게 잡지 말고, 재미있게 좀 써라...! ]
늘 이론적인 옳고 그름에 집착하던 기태는,
본인이 만족하는 글이라면 자연히 독자도 따라와 줄 거라는 생각이었다.
다만 타이밍이 필요할 뿐.
반복되는 지적이 있었다 한들,
자신이 옳다고 믿어 따라 온 지금까지의 성향을 단번에 바꾸기는 어려웠다.
그렇지만 이번만큼은...!!
소재도, 전개도 직접 경험에서 기인한,
사람들이 흥미 있어 할 법한 멜로 복수극.
다른 의미로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써오던 글 중 가장 대중에 가깝게 다가가 있다는
점에서, 기대감이 차오르기 충분했다.
뭔가 자신이 넘쳤다.
과연 대중들에겐 어떻게 평가받을 수 있을 지...
기태는 자신이 쓴 글의 공개에 있어 혹시나 하는 도용이 두려워 외부로의 노출을 항상 꺼려왔다.
최종적으로 출판을 위한 편집자의 손으로 넘어가기 까지,
자신이 만든 이야기를 다른 누군가에게 노출해 미심쩍은 흔적을 남겨 놓는다는 사실 자체가 탐탁치 않았던 건지 모른다.
그렇기에 타인의 의견을 들어 수정하기보다, 이제까지 여러 실패를 통해 성장해 있다 여기는, 자신을 다시 믿어봐야 할 상황이었다.
“오빠, 내가 생각할 때 너무 문장이 길고 늘어지는 느낌이야, 좀 간결했으면 좋겠는데...”
문득, 소설의 모티브이기도 한, 전 여자 친구가
이 전의 자신의 글을 보며 해주었던 지적이 떠올랐다.
유일하게 전 여자 친구에게는 공개했었던 자신의 글.
기태가 연애를 했을 때에 좋았던 몇 안 되는 경험 중 하나는, 자신의 최측근이었던 여자 친구와 함께 쓴 글에 대해 토론을 하는 순간이었다.
신나게 서로의 글에 대해 비난만 일삼아 대던 대학시절의 합평과는 달리,
오롯이 잘되기를 바라는 입장에서 이야기 해 줄 수 있던 여자 친구의 진심어린 ‘조언’은 그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기에 충분했었다.
여자 친구가 딱히 글에 대해 잘 아는 편은 아니었지만, 일반 독자의 시선이랄까,
충고를 들은 후에는, 신경 써서 다시 글을 살펴볼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되곤 했었다.
전 여자 친구를 무참히 씹어대는 글을 쓴 주제에
그 당사자와의 풋풋했던 장면에서 나온 충고를 떠올리다니...
“야 이 병신아! 지금 뭘 생각하는 거야!!”
나이가 들수록 기태의 생활패턴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친구는 많지 않았고, 자신 역시도 스스로 벽을 치며 살아 왔다.
조건 없는 무한 애정을 쏟아줄 수 있는 대상도 없어진 지금,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타인의 어떤 품평도 들을 수 없었다.
세계적으로 개최된다는 공모전의 주최 출판사.
문득 기태는 그 전설의 시작, [ 그들만의 세상 ] 책을 꺼내어 보았다.
익히 알고 있는 소설의 내용.
존경하는 작가 모습과 함께, 꽤 오래간만에
그 작가의 최측근인, 친구 세현의 잔상역시도 떠올랐다.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으로 일본에 간 후,
간혹 힘든 생활을 호소하며, 같이 공감을 바라는 마음에 연락을 주 받기도 했었지만,
늘 기태는 매몰차게 대놓고 틱틱대며 불만을 얘기 했었다.
지금은 어디에서 뭘 하는 지, 관심도 없다.
무엇보다 세현은 더 이상 기태에게 친구로 느껴지지 않는 존재였다.
[ 딸깍, 딸깍... ]
무수한 퇴고를 거쳐 완성한 기태의 공모전 출품작.
기태는 작성한 글이 컴퓨터 밖으로 절대 벗어나지 못하게 꽁꽁 싸매어두기라도 하고 싶었던 지, 작성을 마친 파일에 [저장] 버튼을 몇 번이고 눌러댔다.
"후우...!"
기태는 그제야 뭔가 홀가분해 진 기분으로 기지개를 켜며 오래간만의 바깥 외출을 나올 수 있었다.
“크으...! 나는 매일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진짜 세상은 이렇게 달라지지를 않는구나...!"
동네 주변 산책을 하던 기태는 문득,
혹시나 하는 공모전 발표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해져 자연스럽게 산책 방향을 출판사 쪽으로 틀기 시작했다.
아직은 낮이라 한적한 번화가를 지나,
지난 번 여자 친구와의 해프닝이 있었던 클럽 부근을 슬쩍 흘겨보며 출판사 건물 앞까지 다다랐다.
마침 출판사 입구에서는 용역업체로 보이는 유니폼을 입은 남자들이 사다리를 들고 밖으로 나와 작업 중이었다.
“뭐, 뭐지? 혹시...?”
용역 남성들은 양쪽에 사다리를 올려 건물의 거의 꼭대기까지 올라간 후, 건물을 감쌀 만큼 어마어마한 크기의 현수막을 내 걸었다.
[ 그들만의 세상 출판사 주최. 월드 와이드 단편 소설 공모전 ]
"드디어, 시작인가!!!"
국제적인 규모라는, 일부 단편적인 정보만 알고 있던 기태는 드디어 본격적으로 막을 연 듯한 공모전의 자세한 정보를 얻기 위해 출판사 주변으로 다가갔다.
수 백 미터 뒤에서 봐도 보일 듯한 큰 현수막이 설치된 건물의 가까이로 가 출판사와 관련된 사람으로 보이는 이에게 말을 걸었다.
“저, 이 공모전 말인데요, 자세한 요강 같은 건 어디서 볼 수 있나요?”
“아, 오늘 안에 홈페이지에 공지 될 겁니다. 필요하시면 전단지 한 장 드릴까요?”
“예!! 예, 한 장 부탁드리겠습니다.”
친절하게도 정보가 담긴 전단지까지 넘겨받은 기태. 전체적인 내용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월드와이드로 공전의 히트를 쳤던 명작
[ 그들만의 세상 ] 출판사에서 주최한다는 국제 공모전.
과연, 대 히트작으로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한 출판사다운 기획이었다.
전 세계의 신인과 기성 작가 모두에게 주어지는 이 기회.
활자로서 종이나 화면으로 출력되어진다는 형식 위에 어떤 형태로도 제출도 가능하다. 일러스트를 첨부한 제본의 형태로도, 완성 느낌의 소책자 느낌으로도.
작품의 심사위원으로, 참가하는 모든 국가에서 지정된 나라별 20명의 안팎의 작가를 선별해 둔다.
세계적인 규모인 만큼, 따라오게 되는 언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최 사에서는 나라별로 우수한 번역가들을 준비한다.
제출된 참가자들의 글은 각각 무작위로 다른 나라로 보내어 진다.
예를 들어 한국인이 작품을 제출하게 되면, 그 작품이 일본으로 보내어 질지, 영국으로 보내어 질지 누구도 알 수 없다.
다른 나라의 출품작 역시도 마찬가지.
작품을 넘겨받은 나라에서는 번역가를 통해 번역작업이 이루어지고,
해당 국가에서 지정되어있는 심사위원들이 그 작품을 평가해 순위를 매겨 주최사로 다시 보내어진다.
그렇게 해서 선별된 100명의 참가자들에게 상금과 함께 등단의 권리를 부여한다.
선택된 나라의 정서와 문화 등에 따라 번역된 문장이 원래의 작품의 질을 끌어 올릴지,
떨어뜨릴 지 여부 등은 모두 복불복.
실력과 운이 동시에 따라야만 하는 일종의 도박과도 같은 공모전이다.
여러 번의 절차를 거쳐야 하는 만큼 꽤 긴 기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와... 이거 내용을 직접 확인하니 무시무시한데...”
기태는 두근두근 대는 감정에 전단지를 든 양손이 파르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전 세계에서...100명이라...여기에 들기만 하면...’
기태는 떨림을 뒤로한 채, 유심히 전단지의 내용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며 출판사 건물의 출입문으로 나왔다.
“아얏!!”
[ 탁!! ]
건물 진입로 부근, 무수한 서류들을 한 아름 품고 뒤뚱대며 문으로 진입하려던 한 여성이 기태와 부딪혀 넘어지고 말았다.
동시에 그녀가 들고 운반하던 서류들도 주변으로 모두 흐트러지며 떨어졌다.
“앗, 죄...죄송합니다...!!”
기태는 여성을 일으켜 세우며 흐트러진 서류들을 하나 둘 주워 담아 여성에게 건냈다.
넘어졌을 때의 고통과 뭔가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기태와 눈도 마주치려하지 않던 이 여성.
“괜찮으세요? 여...여기...”
“에이, 됐어요! 주세요...!!”
기태가 흐트러진 서류를 모아 넘겨주자 여성은 매몰차게 빼앗다시피 돌려받고는 가던 길을 갔다.
신경질적인 자세로 출판사 문 쪽으로 걸어가던 그녀는 순간, 갑자기 멈추어 섰다.
“엇!!??”
천천히 뒤를 돌아다 본 여성.
갑작스런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였음일지, 따끈따끈한 공모전 정보에 정신이 팔렸음 인지,
기태는 별다른 불만 없이 등을 보이며 가던 길을 재촉하는 중이었다.
“이봐요, 자...잠깐만요!!”
여성은 무거운 서류들을 옆에 내려놓은 채,
이미 꽤나 멀어져 있는 기태에게 달려갔다.
무심하게 걷던 기태는 누군가가 부르는 기척에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저, 호...혹시 한기태 선배님...아니세요??”
기태의 바로 앞까지 달려온 이 여성.
기태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예, 한기태 인 건 맞는데... 근데, 선배님...이라뇨?
제가 어디 선배인 적이...”
“아, 기태 선배님 맞으시구나!! 저, 전소현이라고... 기억 안 나시죠?
뭐, 같이 얘기하고 그래본 적은 없으니까 모르는 게 당연하시겠지만... 저 기태 선배님하고 같은 과 2년 후배...예요...!”
“아...대학...! 뭐 중간에 관두고 신경도 안 쓰고 살았어서...아, 후배님인가 보네요.”
“선배님 참석하신 합평자리에 그냥 전 참관만 했었거든요. 선배님 앞에서 발표 같은 건 따로 한 적이 없으니 당연히 잘 모르실거예요.
제가 그렇게 튀는 학생도 아니었어서...
그나저나 이렇게 다시 만나 뵙게 될 줄 몰랐어요, 선배님!! 혹시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
몇 년 만일지 모르는 학교 선후배간의 재회.
학교를 뛰쳐나온 후부터는 학교와 관련된 일과 사람들 모두 전혀 관심을 두려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지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전 후배의 아는 척에 흥미가 가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이곳은 공모전을 주최하고 있는 출판사.
무언가 얻어갈 수 있을 지도...
두 사람은 출판사 내부에 위치한 작은 카페에 들어갔다.
“아무튼, 반갑습니다. 선배님. 아, 저는...”
여성은 자신의 지갑 속의 명함을 꺼내어 기태에게 넘겼다.
[ 그들만의 세상 출판사 기획부 과장 전소현 ]
“전소현...아, 이름 보니까 기억이 좀 나는 것 같기도 하네요... 이 출판사에서 일하시는 구나...”
“아, 선배님, 말씀 편하게 하세요...!!”
“아, 하핫, 그...그래...”
기태와 후배 소현이라는 여성은 커피를 마시며
더 깊은 이야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저를... 아, 나를 어떻게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거야? 나는 중간에 학교도 관뒀는데...”
“아, 바로 나가셔서 안 돌아오셨으니 모르시겠구나. 그 무시무시한 합평 때문에 과내에서 유명인사 되셨던 건...”
“...유명인사?”
“그 왜 꼬투리 잘 잡기로 유명했던 선배님 있잖아요, 누가 뭐만 발표했다하면 끌어내리기 바빴던, 그 안경 쓰고 덩치 좀 있으셨던 선배님...”
“아, 알지...! 그 색 ...아니... 만식이 그 놈...!!”
“사실 그 분이 워낙에 말도 잘하시고, 항상 뭐랄까, 좀 있어 보이는 말만 골라하시고 해서 동기, 선후배 할 것 없이 뭐라고 지적 받아도 별 대꾸를 못했었어요.”
“그... 그래, 그 자식이 말발 하나는 아주 번지르르했었지...”
“사실은 그 분 합평 듣고 울면서 집에 간 후배들도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솔직히 좀 얄밉게 얘기하시잖아요. 너무 정곡을 찌르고...”
“그랬지...지금도 생각해 보면 아주...!!”
“훗, 그런데 선배님을 마지막으로 뵜던 날이기도 한데, 그 합평 날, 기태 선배님이 여전히 얄미운 투로 얘기하는 그 선배를 아주 잘근잘근 밟아주셨었어요!
뭐 감정들이 격앙되어 싸움으로까지 번지긴 했었지만...”
“흠, 그...그랬나...나는 내 변호하기에 바빠서...핫...!”
“그럼요!, 얼마나 통쾌했는데요!!! 그때 선배님 멋있다고 하는 후배들 얼마나 많았는지 모르시죠?”
“엣??”
이건 또 무슨 상황인지,
전혀 기억도 나지 않던 이 어여쁜 후배님이 지금 기태의 앞에서 무장해제 된 채 웃고 있다.
방문하셔서 응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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