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0화 _ 어쩌면 우린, 서로에게 필요할 지도...! ]
"선배님... 학교는 그때 관두셨지만 지금도 작가로 살고 계신 거 잖아요.“
"응, 뭐, 힘드네, 어쩌네 해도,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글 쓰면서 살고 있지..."
출판사에서 기태가 우연히 만난, 무려 이 출판사의 직원이라는 후배 소현은 무언가 수줍은 얼굴로 기태에게 이야기 했다.
“사실, 선배님이 쓰신 책들 다 봤어요.
저희 동기들끼리는 아직도 활발하게 연락들 하거든요. 선배님 그러고 나가신 후에 어떻게 사시나 가끔 얘기하기도 해요.”
“그래? 쑥스럽네... 그냥 다 버리고 나왔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래도 기억해 주는 친구들이 남아있긴 했네, 하핫, 책도 다 찾아 봐주고...!”
“그럼요, 사실 동기들 포함해서, 연락하는 친구들 모두 전업으로 작가를 하고 있는 친구들은 한 명도 없거든요.
아시다시피 업계가 많이 힘들어서, 다들 겁을 많이 내죠. 그런데 기태 선배님은 그걸 하고 계시잖아요. 부럽다고, 대단하시다고... 선배님 책 보면서도 다들 그렇게 얘기해요."
기태는 우연히 만난, 얼굴도 기억나지 않던 후배가 자신이 택한 인생의 형태를 이렇게 인정해주고 있다는 것에,
나름 마음고생 많았던 자신의 인생을 위로받는 느낌까지 들어 고맙기 그지없었다.
의심병이 생겨 사람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게 된 기태라도 칭찬에는 어쩔 수 없는 모양.
만면의 근육들이 씰룩 씰룩 반응을 해대고 있었다.
쑥스러움 때문이었는지, 다가가기 어려운 선 후배간의 벽을 느껴서 였는 지,
학창시절에는 이야기 한마디 해보지 못했다는
두 사람이었지만, 사회인으로 다시 만난 지금, 자신들도 놀랄 정도로 자연스러운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소현인...출판사 일은...어때? 졸업하고 바로 출판사 쪽에서 일하게 됐던 거야? 글을 좀 더 써보지 그랬어...?”
기태는 자신의 책까지 읽어 주었다는 소현에게 이제는 마치 ‘팬’을 대하듯 여유로운 자세를 취하며 물었다.
“글이요? 힘들죠... 저는 졸업하자마자 출판사 쪽으로만 일했어요. 저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글이란 게 쓰다보면 한계가 좀 드러나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워낙에 글 읽는 것 좋아하기도 하고, 그러다보니
글 밖으로 너무 떨어진 데에서 일하기는 싫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결국 관련 분야라고 있게 된 게 출판관련 쪽이 되어 버렸네요.”
“한계라...”
“요즘엔 워낙에 이야기 만드는 형식들이 다양해 지다보니까, 뭐랄까, 전통적으로 만들던 글만 고집하면 살아남기가 힘들더라고요.
출판계가 점점 힘들어지는 것도 그런 것들과 아주 관련이 없는 건 아니겠죠..."
“그래... 뭐 나도 일하는 편집장한테서 꽤나 듣던 소리긴 해. 요즘 트렌드에 맞게 해달라고, 독자가 우선이니 독자의 니즈를 맞춰 줘야 한다나...”
“그렇죠... 저희 역시도 마찬가지예요...
잘 아시겠지만, 자기 스타일 있는 작가는 자존심 때문에 그런 거에 맞춘다는 게 쉬운 게 아니잖아요. 옛날부터 유명했던 작가가 아니고 뒤늦게 도전하려는 작가라면...”
안부에서 시작해 출판계의 동향까지...
기태는 오래간만에 이런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를 만난 것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야기 도중, 소현은 기태가 이곳에서 받아들고 있던, 전단지를 발견했다.
“아, 선배님, 이 공모전 참가하시게요?
오늘 공개했는데, 어떻게 바로 알고 오셨네요...!”
“응, 참가해 보려고...! 뭐니 뭐니 해도
[ 그들만의 세상 ]을 냈던 출판사니까,
경쟁률은 만만치 않겠지만...!”
“역시, 선배님도 그 책 팬이시죠? 워낙에 인생 작으로 꼽는 사람이 많기도 하죠. 아, 이 공모전, 최초 기획 제가 했던 건데!! 하핫...”
“어, 정말이야!? 대단한데...!!”
소현은 뭔가 눈치를 보듯 주변을 힐끗 한번 훑어보고는 기태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아, 그리고 이건, 업계 쪽 비밀인데요,
[ 그들만의 세상 ]의 작가 임형우씨 아들이 작가로 데뷔할지 모른다는 소문이 있어요.”
언제가 될 지는 몰랐지만 이미 몇 년 전부터 알고 있어 본인을 뜯어말리기까지 했었던 사실.
기태는 세현과 자신과의 관계 이야기를 여기서 해주어야 할지 잠시 고민했지만, 세현을 그리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는 입장에서
‘내가 그 유명인의 아들을 알고 있다고!
나 대단하지?’
라는 식으로 자신의 주가를 높이려는 소인배들처럼은 보여 지고 싶지 않았다.
“아, 그래? 아버지가 그렇게 잘나가는 작가였는데, 부담 때문에 어디 데뷔나 할 수 있으려나...”
모르는 척하는 와중에도 은근히 드러낸 부정적인 시각.
"이제까지는 전혀 소식 없다가 몇 년 전부터 들리기 시작한 모양이예요. 역시...피는 못 속이는 건지..."
"음...글쎄..."
“선배님, 그럼 응원할게요. 전 이제 슬슬 다시 업무에 복귀해야 할 것 같아요.
저희 공모전 참여하신다니까...뭐, 궁금한 거 있으시거나 하시면 연락주세요. 다음에 저희 동기들하고도 같이 한번 뵈요...!”
인사말과 함께 소현은 다시 내려놓았던 무거운 서류들을 들고 낑낑대며 사무실로 돌아갔다.
생각지도 않게, 무려 그들만의 세상 출판사 직원이라는 지인이 생기다니...
작가로서 이곳에서의 데뷔가 최종 목표로서 노리고 있는 기태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리가 없다...!
분명한 아군이 생겼다는, 뿌듯한 기분을 안고
기태 역시 귀가 길을 재촉했다.
생각도 못했지만 자신의 길을 부럽게 여기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반드시 이번 만큼은 성공의 전례로 남기고 말리라 다짐했다.
***
“세현아 잠깐 이리 와봐!!”
프랑스 아를,
세현이 일하고 있는 레스토랑.
주인아저씨는 이 날 오전 중에 가게를 세현에게 맡기고, 볼 일이 있다는 아비뇽에 다녀와 세현을 불렀다.
“예, 무슨 일이세요?”
아저씨는 가져왔던 자신의 짐 외에 따로 들고 있던 종이 한 장을 세현에게 넘겼다.
“이게...?”
세현은 종이를 받아 꼼꼼히 살펴보았다.
한국에서 실시해 서서히 세계적으로 전파되어간,
[ 그들만의 세상 ] 출판사의 공모전 소식.
아저씨는 아마도 한국의 기태가 출판사에서 가져갔던 전단지의 프랑스 버전 일 것으로 짐작되는 공모전 전단지를 가져다 세현에게 넘긴 듯 했다.
“네 아버지 소설 나왔던 출판사... 맞지?
거기서 이번에 공모전을 여는 모양이더라...!
꽤나 규모가 큰 모양이던데, 알고 있었어?”
“아... 아뇨! 전혀 몰랐어요!!! 감사합니다, 아저씨!!!!”
전단지를 받아들고 종이가 뚫어져라 보고 또 보는 세현.
나중에 들어서 알게 된 것 이지만, 남프랑스 아비뇽에는 [ 그들만의 세상 ] 출판사의 프랑스 지부가 위치하고 있었다.
세현의 아버지와 친구였던 아저씨는
[ 그들만의 세상 ] 이 집필되던 시절, 같이 이곳저곳을 떠돌며 출판사를 알아보러 다녔었다고 했다.
“네가 어떤 글을 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왕에 네 아버지처럼 글 쓰며 살겠다고 인생 정했는데, 큰 데서 인정받으면 좋잖아!! 안 그래?!”
“그럼요!!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아저씨...!! 꼭 출품해 볼게요!!”
어딘 가에서 데뷔를 생각하기보다 아직까지 이 세계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세현으로선 오로지 좋은 작품을 만드는 데에만 열을 올리는 중이었다.
작품을 만들어만 놓으면 결국 어딘 가의 누군가에게는 인정받지 않을까 하는, 다소 순진한 생각으로 완성에만 매진하던 세현이었는데,
이 어마어마한 규모의 공모전이라면 뭔가 목표로 삼기에 충분했다.
‘전 세계 대상...? 이런 말도 안 되는 규모의 공모전이 있을 수가 있어?’
기태가 처음 이 공모전의 소식을 접했을 때와 같이 세현은 쿵쾅대는 심장소리가 귀에까지 들리는 듯 했다.
“아!! 단편...!!!”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길게 이야기를 구성하는 장편 소설에만 매달려오던 세현에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해프닝에 영감으로 일필에 휘갈긴 단편소설...!
마침 세현에겐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야말로 따끈따끈한 한편이 준비되어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이미 한 명의 팬에게는 인정을 받았던...
세현은 공모전 요강 중 특이점을 발견했다.
[ 활자와 종이에 인쇄되어진다는 형식 위에 어떤 형태로도 제출이 가능하다. ]
라는 항목.
‘결국에는 글 내용만 강조할 게 아니라 어떻게 포장할 지 까지 연구를 하란 소리겠지...?!’
*
미술계의 최근 소식을 정리해 자료로 만들어 화가들에게 제공하는 것.
작업실 내에서의 업무 내용 중 필수 의무는 아니었지만, 같이 공부도 할 겸, 초반부터 해인이 자청했던 일 들 중 한 가지였다.
이 날 역시 최신 미술 동향과 자료들을 수집하러 관련 웹 사이트 검색을 하고 있던 해인.
자주 들르는 웹 사이트에 그간에는 보이지 않던 배너광고가 위치해 있었다.
‘응? 이거 뭐지?’
프랑스어를 읽는 것이 한국어를 읽는 것만큼은 빠르지 않았던 해인은 해당 배너광고에 써진 글씨를 차근차근 읽어갔다.
‘그들...만의 세상...의 출판사에서... 준비한 상식을 깨는 획기적인...공모전...?’
“공모전!!??”
해인은 배너를 타고 서둘러 링크된 출판사 사이트로 들어가 보았다.
기태, 세현이 보았던 내용과 같은 내용의 공모전. 해인 역시 내용을 차근차근 읽어갔다.
글을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최근 세현의 글을 토대로 계속되는 그림 작업이 진행하고 있어 그런지, 그것이 마치 본인의 작품이라는 착각에 빠져있는 듯도 했다.
‘세현씨가...이거 알까...’
평소 별다른 관심도 없이 글만 쓰는 세현의 패턴을 어느 정도 알고 있기에 외부 소식은 빠르게 접하지 못할 거라 판단되었던지,
해인은 어서 세현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해인의 눈에도 들어온 공모전 요강의 낯선 항목 하나.
[어떤 형태로도 제출이 가능하다]...!!
해인의 두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해인은 어서 세현을 만나야 했다.
아를에 밤이 찾아온 저녁 8시 경.
해인은 세현을 만나려는 생각에 내내 편치 못한 모양새로 사무 일을 마쳤다.
“해인 씨, 퇴근해요. 오늘 수고 많았어요, 아, 잠깐!!”
“예, 예??”
그렇지 않아도 빨리 나가봐야겠다는 생각에 책상 밑으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해인에게 카와모토가 말을 걸었다.
“무슨 급한 일 있어요? 해인 씨? 되게 초조해 보이네, 오늘...”
“예?!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그래요? 음... 그럼 저번에 트러블 아닌 트러블도 떨쳐내고 회포도 풀 겸, 오래간만에 우리 화가들하고 같이 회식 좀 할까 하는데 시간 어때요?”
“오...오늘요??!!”
“왜요? 좀 전에 아무 것도 없다더니...”
“아...아니...그...그게...!! 혹시 다음으로 하면 안 될까요? 생각해보니까 오늘 일이 좀 있네요!!”
“그래요, 뭐 급한 거 아니니까...
그럼 뭐 나중에 요 앞 레스토랑에서 같이 밥 먹고 술도 같이 먹고 그래요, 오래간만에...!”
“예...예!! 그럼 제가 가서 예약해 둘게요...!!”
대충 얼버무리고 작업실을 빠져나온 해인.
해인은 즉시 세현에게 연락했다.
“여보세요?”
“예, 세현씨, 전 데요...! 오늘 레스토랑 일 끝났어요? 요즘도 일찍 들어가서 작업해요?”
“아뇨 아직... 해인씨 전화 잘했다. 아직 작업실이에요? 가는 길에 레스토랑에 좀 들러요.”
“아..알았어요. 안 그래도 얘기 할 것도 있고 하니까...”
해인은 빠른 발걸음으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작업 중인 그림 역시 거의 마무리가 된 상태.
공모전 소식 전달과 함께 작업하고 있는 그림에 대한 얘기까지도 생각해 둔 해인은 괜스레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세현의 소설이 모티브인 것도 있지만, ‘완성’이라 얘기할 수 있는 자신의 첫 작품.
세현이 자신의 소설을 세상에 처음 공개했듯,
해인 역시 세상에 처음 내놓는 그림이었다.
“세현아, 오늘 들어가, 수고했어!”
“예, 아저씨. 아 근데 여기서 잠깐 누구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어서요.”
“그 아가씨? 후훗...! 잘되어가나 봐, 아주?
그 아가씨도 마음 없는 척 하더니 은근히 잘 만나주네... 아, 저번에 어디 갔다 온 것도 그 아가씨랑 갔던 거 맞지?”
“예...”
늘 부정하던 세현이지만 이제는 다 알아버려 놀리듯 세현을 가지고 노는 아저씨 앞에서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여기서 만난다는 거지? 차 한 잔씩 내 줄 테니까
저 자리에 앉아 얘기들 해 그럼!!”
“예, 고마워요, 아저씨...”
마침 저 멀리에서 해인이 오는 것이 보인다.
세현은 손을 흔들어 해인을 인도했다.
아저씨가 마련해 준, 가게 내에서도 가장 분위기가 사는 자리에 마주앉게 된 두 사람.
“해인씨... / 세현씨...”
마주보고 앉아 있었지만 뭔가 주저대던 두 사람은 이내 동시에 서로를 불러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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