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그곳에서...<31화>

[ 제31화 _ 내 손, 잡아줄 거죠? ]

by youtoo

“해인씨” / “세현씨”

마주앉아 동시에 불리어진 서로의 이름에 흠칫 놀란 두 사람.

“머...먼저 얘기해요...”

“아...아니에요, 먼저 얘기해요...!!”

서로 미루고 미루며 눈치만 보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세현 쪽이었다.

“음... 해인씨, 다름이 아니라...내가 제안...
하고 싶은 게 한 가지 있는데요...”

“제...제안이요? 뭔데요?”

“흠, 먼저 얘기 해둘게요, 이건 어디까지나 제안이니까... 강제성 이런 건 조금도 없어요...
아니, 말하자면...제안이라기보다 부탁에 가깝다고나...”

이 남자가 지금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거지...
가만히 기다리며 해인은 자신의 이야기를 할 기회를 기다렸다.

“예, 말해요. 뭔데요?”

세현은 헛기침 한 두번으로 더 시간을 끌며 머뭇거리다, 이내 작정 한 듯 입을 열었다.

“해인씨, 나 그림 하나... 의뢰해도 되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해인.

혹시, 이 남자도 지금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른다는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그림이요? 나 같은 아마추어한테 무슨...”

해인은 놀라움과 왜인지 모를 벅찬 감정이 차고 올랐지만 일단 겉으로는 감정을 숨겼다.

“해인씨가 그린 그림, 나 아직 한 장도 본 적은 없는데, 그냥... 뭐랄까, 느낌이 있을 것 같아요. 그림 그리겠다고 다 포기하고 여기까지 온 것도...

어떻게 보면 그만큼 열정이 넘친다는 거고...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긴 하지만, 해인 씨한테도 분명히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 확신해요!"

해인은 이야기를 듣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현씨 혹시...[ 그들만의 세상 ] 출판사에서 큰 공모전 하는 거 알고 있어요?”

세현은 화들짝 놀라며 뭔가 커다란 비밀을 들킨 어린아이 마냥 잔뜩 쫄은 표정으로 해인을 바라보았다.

“앗, 그...그거 알고 있었어요? 나도 오늘 아저씨 통해서 겨우 알았어요.

전혀 몰랐는데, 아비뇽에 그 출판사 프랑스 지부가 있다네요. 전단지 가져다 주셔서 조금 전에 봤어요, 형식도 제한 없다고 하던데...!!”

“아, 알고 있었구나, 혹시 세현씨 모를 까봐 알려주려고 만나고 싶었던 것도 있는데... 이번에 썼던 글 내보라고...

그나저나 세현씨 쪽에서 그림 얘기를 해 줄 줄은 몰랐네요...!”


설마 이런 식으로 엮이는 일이 생길 줄이야,
이미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던 두 사람이지만, 순간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서로 무엇이 그렇게 말하기 어려웠던 건지, 갑작스럽게 만들어진 이 익숙지 않은 분위기에 두 사람은 그저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차 나왔어요!!”

순간의 정적을 깨고 차를 내온 가게 주인아저씨.

침묵이 생길 만한 절묘한 타이밍을 노리기라도 한 듯, 거침없이 치고 들어와 어색한 분위기를 전환시켜 주었다.

아저씨는 세현에게 곁눈질을 하며 무언가 사인을 보내는 듯 했다.

당황한 표정으로 답하는 세현. 그러나 아저씨의 사인에 힘을 얻기라도 한 것처럼, 다시금 목소리를 가다듬고 해인을 향해 입을 열기 시작했다.


"흠, 흠... 공모전 소식 듣자마자, 해인씨가...떠올랐어요.

사실, 알다시피 해인씨한테도 보여줬던 그 소설말인데, 공모전 때문에 썼던 글은 아니었어요.
그땐 이거 전혀 알지도 못했으니까...

근데 어쩌다 운대가 맞았다고 해야 할까... 해인씨가 읽고 괜찮다고 해 준 덕분에 자신감도 많이 붙은 상태였고...!"

세현의 솔직한 고백 앞에 해인은 이제 얘기를 꺼내도 되겠다 싶었는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도... 세현 씨한테 할 얘기가 하나 있는데요... 어쩌다 보니 세현씨가 이렇게 먼저 그림 의뢰한다고 얘기 해 줬지만...

나도 아마추어고, 어떻게 봐 줄 지 좀 두려워서 그냥 혼자 작업만 진행하고 있던 그림이...
사실 있어요.

세현씨가 이번에 보여준 단편소설 보고...
처음부터 보여줄 걸 기대하고 그렸다기보다,
연습 삼아 그냥 끌리는 대로 시작한 작업이었어요.”

“그림을...? 내 소설 모티브로 그림을 벌써 그리고 있었다고요??”

“...네... 이런 건 숨기는 게 아니었는데...
미안해요... 그래도 세현씨가 어렵게 보여준 소설인데 허락도 없이 그림 그려서...”

세현은 이제까지 지어 본 적이 없던 환한 미소로 해인을 바라보았다.

"그거... 혹시 볼 수 있어요?"

나름대로 자신감을 가지고 그림을 진행해왔지만, 정작 원래의 주인에게 납득을 받아야 한다는 긴장감 때문일지 빠르게 동공이 흔들리는 해인.

해인은 늘 가지고 다니던 스케치북을 서서히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여기... 그 그림 있는 거예요?”

세현은 해인의 스케치북을 첫 장부터 천천히 넘겨보았다.

한장 한장... 그 간의 스케치나 미완성분 그림들까지도 볼 수 있었다.

예술이니 그림이니, 잘 모른다고 말하던 세현이 보기에도 꽤나 퀄리티가 있어 보이는 작업들.

자신의 소설을 모티브로 했다는 그림은 몇 장을 넘겨야 나올 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전장의 그림들의 완성도 있는 스케치들은 점점 세현의 기대감을 증폭시켜갔다.





스케치북의 절반 이상 쯤 넘겼을까.
이제까지의 종이 질감과 무게와는 다른, 완성도 있게 채색이 되어 진 묵직한 한 장이 나타났다.



"이...이게...!"


세현의 눈동자가 커지며 빠르게 이쪽저쪽으로 움직일 뿐, 그 모습 그대로 동작은 굳어버린 듯 했다.

눈앞의 세현이 짓는 얼굴 표정의 변화를 유심히 지켜보며 평가를 기다리는 해인.

세현은 그렇게 한참동안 말없이 그림을 응시했다.
자신이 소설을 구상하며 기초작업을 하던 때가 자연스럽게 떠오른 것인 지.

카페를 자주 찾으며, 사이좋은 노년기를 보내던 노부부에게 닥친 비극.

퇴고에 정성을 들이느라 완성까진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자신의 성장과정까지도 연관 지어지며 순식간에 잡혀갔던 구상과 스토리 전개.

그림은 소설 속 홀로 남은 할머니의 초상화였다.

평화로운 안정 속에서 살던 한 여성이 사별을 겪으며 느꼈을 상실감과 자책, 좌절감까지도 포함한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림 속 여성.

그렇지만 여생에의 희망을 놓지 않는, 불안감까지 이야기에 담아내고 팠던 자신의 의도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이미지였다.



세현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앞 자리의 해인은 바짝 긴장한 듯, 타들어가는 자신의 입가를 혀로 적셔주며, 언제, 무어라 터져 나올 지 모를 세현의 입 주위를 계속해서 주시할 뿐이었다.

심각한 표정에서 천천히, 자연스럽게 입가에 머금어 지기 시작한 미소.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는 것 같네요...!"

"어...어때요?"

세현은 아무 말 없이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세현씨 글에서 시작한 그림이에요. 예의 안차려도 되니까, 진짜로 얘기 해줘요...!!”

"또...! 이렇게 또 사람 말 안 믿기에요? 좋아요!! 직접적으로 얘기합니다. 해인씨 그림,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환한 미소로 이야기하는 세현을 보며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짓던 해인은,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다행이다. 나쁘지 않다는 거네...!"

"혹시, 소설 모델인 할머니 만난 적 있어요?
어떻게 이렇게 내가 떠올렸던 이미지 대로의 모습 그대로 일수가 있지...!!

어두운 배경 속에 복잡 미묘한 표정을 한 나이든 여성의 모습...! 내가 글로 담아내고 싶었던 감정들이 하나하나 다 보여 지는 것 같아요.

이건 나한테는 모나리자보다도 더한 감동인데요!! 어떻게 이렇게 한 컷으로...!! 아마추어라더니, 해인씨 정말...천재구나...!!!"

더해가는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던 해인 역시도 서서히 미소를 찾아갔다.

"이거 한장이 소설에 같이 들어가면...
시너지가 어마어마할 것 같아요...!!!
공모전에 같이 삽입해 출품해도 되겠어요?!”

“그림을... 공모전에 같이 출품한다고요??!!”

해인은 그저 허락도 맡지 않고 소설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를 옮기기에 급급했을 뿐이었다.

사실은 바라던 일이건만, 막상 직접 이렇게 말해주니 몸둘 바를 몰랐다.

이제와 허락을 맡고, 나쁘지 않게 생각해주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던 것을,



“그래요!! 공모전 요강 봤다면서요!!
출품작에 형식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다 하는 건,
삽화를 붙여도, 아니면 일러스트가 대부분인 글이 되어도 된다는 거라고 봐요!!

해인씨가 그렇게 좋아하던 [ 그들만의 세상 ] 떠올려 봐요. 이 공모전, 그 출판사 주최라고요!”

그림의 완성이 가까워 올 때 즈음, 해인도 어렴풋이 떠올리기는 했었다.

이 완성된 이 소설의 어느 한 부분에 위치해 있는 자신의 일러스트.

그렇지만 그저 욕심이라 여겼다.

“아...안돼요!! 그러다가 그림 때문에 글 이미지가 안 좋게 보이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요!?
그런 큰 위험 감수하기엔 난 아직 자신이 없어요!!”

마치 몰래 꿈꾸던 계획을 들키기라도 한 듯 강하게 부정해대는 해인.

세현은 손사래를 치며 거절하는 해인의 손을 덥석 잡았다.

“???”

“해인씨!! 나도 프로 작가 아니에요. 해인씨가 본인을 아마추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나도 아마추어라고요!!

그리고 그런 게 무슨 상관이에요?
원작 작가가 좋다는데??

제안을 할 생각이었는데, 그림을 보고 나니까
내가 참을 수가 없네요...!! 이렇게 부탁 합니다...!”


손을 잡힌 채 당황한 해인.
세현은 해인의 눈을 정면으로 강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진심이 담긴 세현의 눈빛에서 절실함이 느껴진 건지, 그다지 강하게 거부반응을 보일 수 없던 해인.

그리고 빠르게 다가온 데뷔라, 다시 생각해 보니 분명 두근 거릴만한 사건임에는 틀림없었다.

“아... 알았어요. 그럼 같이 할게요...
허락도 없이 그림 그린 잘못도 있으니까...”

“왜 그렇게 힘 빠지게 얘기해요? 내가 그랬잖아요, 처음으로 소설 해인씨 보여준 건 해인씨가 왠지 믿음이 가서 였다고...! 미안할 거 없어요. 나는 지금 화가한테 정식으로 그림 의뢰한 거라고요!”






“화가...”




그렇게 바래오던 명칭.
과거의 힘든 일과 결심 후에 많은 우여곡절들이 생각나서였을까.

아직 눈앞의 한 사람뿐 이었지만, 자신을
[ 화가 ]라고 하는 지칭해 주는 사실에 감동을 받은 듯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아직까지도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있던 세현.
해인의 눈물을 확인하고는 다른 편 손을 들어 해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야기 했다.

“해인씨, 잘하고 있어요. 열심히 하고 있잖아요... 힘내요...!!”



해인은 눈물을 왈칵 쏟았다.
눈가에 들어 찬 눈물들로 시야가 흐려져 눈앞의 세현의 형태는 뿌옇게 보일 뿐이었지만,

이내 해인의 양 뺨에 따스한 손이 다가와 눈물을 닦아 주었다.

“바보같이, 왜 우냐!?”

어린아이 같이, 그저 앞에서 해주는 대로 가만히 따르며 훌쩍대기만 하던 해인.

“왜...왜 따라하냐!! 내가 했던 말인데...”

“내 맘이지...! 훗, 해인씨, 이제 가요, 늦었다...!”

우느라 기운이 빠졌는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듯한 해인을 잡고 세현은 카페에서 나와 숙소 쪽으로 걸어갔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웬일인지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없이 걸었다.

아를에 도착하는 날부터 몇 번이고 두 사람이 같이 걷던 길, 넓지도 않은 골목 중앙으로 걷던 두 사람의 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가까웠다.

카페에서 나오면서부터 어색하게 맞잡고 있던 손이지만 집까지 오면서 그들은 손을 놓지 않았다.

두 사람은 왜인지 서로 말을 아꼈다.

서로 돌고 돌아 만난 영혼의 동료.

어렵게 만났다고 생각한 이 상대를 놓칠 세랴
이 전에 만났던 인연들처럼 경솔한 언행이 조심스럽다고 여겼기 때문일까.

걷는 속도마저 맞추어 가며 숙소 앞까지 다다른 두 사람.

그제야 잡았던 손을 조심스레 놓아주며 현관문 앞에 멀뚱히 서서 여전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해인의 양 어깨에 손을 올린 세현.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가 해인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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