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2화 _ 설레임으로 흠뻑 취한 밤 ]
“해인씨!”
해인의 얼굴 앞, 바로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 민 세현.
해인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지 못한 채 태연한 척 세현을 정면으로 올려보았다.
그렇지만 떨리는 동공.
세현은 해인의 양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불과 몇 센치 앞에서 해인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진짜 중요한 얘기가 있는데...”
“예? 뭐...뭔데요...”
“요 주 금요일에 시간 되요?”
“금요일??”
세현은 입을 꼭 다물고 고개를 끄덕이며 해인을 내려 보았다.
“원래는 좀 더 걸릴 줄 알았어요. 이번 주 금요일로... 할까 해요. 임세현 ‘작가 지망생’과 이해인 ‘화가 지망생’이 처음 데뷔하는 날...!"
"아, 금요일에... 작품 제출하려고요...?"
세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요...! 날아오르게 될 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규모가 어마어마해서 발표까지 기간도 엄청 걸릴 테고... 당연히 경쟁률도 엄청나겠죠."
세현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씁...! 솔직히 이 소설... 딱히 이걸 목표로 해서 쓴 글도 아니었고, 열심히 쓰긴 했어도...
혼자서는 좀 자신없긴 했어요."
세현은 해인의 한쪽 손에 들려있는 그림을 가르키며 말했다.
"근데요, 해인씨 이 그림하고 같이 한다고 생각하니까...엄청 자신이 생겼어요!
뭐, 심사 결과가 어떻게 나오는가 이전에, 첫 작품인데 작가가 만족하는 퀄리티를 뽑아냈다는 게 더 중요 한 거 아닌가...!"
가볍게 미소지으며 살며시 고개를 끄덕여 주는 해인.
"직접 가서 제출하고 오려고 해요.
그러니까 그 날 저녁에 시간 꼭 내줘야 돼요!
또 막 바쁜 척하고 그러지 말고...”
세현은 무언가 아쉬운 듯, 해인의 어깨를 쉽게 놓아주지 못했지만 미소와 함께 해인을 보내주었다.
각자의 숙소로 복귀한 두 사람.
세현은 고이고이 모셔온 해인의 그림을 몇번이고 자신의 소설과 매칭시켜 보았다.
글의 클라이막스에 다다른 지점에서 슬쩍 배치해 본 해인의 그림.
"생전 처음 완성까지 가져왔다는 그림이라는 게 이 정도의 퀄리티라니...사실은 완전히 나 속이고 있는 거 아냐?"
소설의 흐름을 타고 이어져 최종적으로 전율마저 느끼게 할 법한 해인의 일러스트.
그 안에 글 전체의 이미지를 함축해 놓기라도 한 듯, 소설의 감정선은 몇배나 증폭되었다.
애초부터 텍스트로 읽히는 글의 형태를 유지한다면, 변주될 수 있는 모든 형태를 허용한다는 공모전의 요강.
꽤나 큰 기회인만큼, 다른 참가자들은 무수하게 이색적인 형태로 도전을 시도할 테지만,
세현과 선택한 방식은 글과 그림이 함께 한 기본 중에 기본, 말하자면 삽화가 곁들여진 소설
[ 그들만의 세상 ] 형태의 축소판과 다르지 않았다.
'Written by Sehyun',
'Illustrated by Haein'
여전히 세현은 그저 신기해하며 여러가지의 이미지가 머릿속을 스쳐갔다.
이제까지 보아왔던 어리바리하지만 귀여운 해인의 이미지와 프로페셔널한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모습...
도무지 매칭이 되지 않는 이미지들이었지만, 거기에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한 자신의 감정까지 더해지는 듯 했다.
신비로운 인연이 여기까지 이어진 지금,
몇초를 간격으로 떠올려지는 해인의 모습 때문에 세현은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
바로 옆 건물의 해인 역시도,
잠자리에 들기 위해 침대에 누워 있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기억을 해보려 해도 영 떠오르지 않는 한 가지...
'나 무슨 생각으로 저 그림 그리기 시작했었지?'
아무리 생각해도 큰 의미는 아니었다.
그저 검토를 부탁받은 소설의 내용이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 이미지로 맴돌았고,
그것을 남들에게도 보여주고픈 형태로 남기고 싶은 욕심이었을 뿐.
해인은 자신의 손을 거쳐, 지금은 세현에게 넘겨진
첫 완성작 일러스트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공을 들이며 완성까지 해보려 했었던...
자신의 그림 인생 첫 완성작.
‘잘한 거겠지...? 받은 사람이 그렇게... 좋아했으니까...’
그림을 받아들고 기뻐하던 세현의 표정,
그리고 오는 길에 살포시 잡아주던 손의 감촉까지도 같이 떠올랐다.
'... 잘 될 수... 있을 까... 잘 되면 좋겠다...
아무리 큰 공모전이라도...'
처음에는 같이 하자는 세현의 제안을 완강히도 거절했었지만, 명백한 내숭이었다.
그림작업을 시작하면서부터 해인은 자신도 모르게 이런 상황을 꿈꾸어 왔음이 분명했다.
설마 설마하면서도...
해인은 계속해서 공모전 작품으로 자신의 일러스트가 삽입된 소설이 수상 대에 올라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뿌듯함을 넘어서, 너무도 보람 있을 세상에의 첫발.
프랑스로 넘어온 이래 가장 두근 거리는 밤이 틀림없었다.
*
다음 날.
행복한 꿈에서 깨어난 해인은 작업실로 출근했다.
바로 작업실로 향하려던 해인은 전 날 세현에게 공모전 소식을 전할 생각에 들떠 건성건성 답하고 나왔던 카와모토의 멘트가 떠올랐다.
"맞다...! 회식 예약...! 오늘... 이랬나...?"
해인은 마침 보이기 시작한, 세현이 일하는 레스토랑에 들러 사장 아저씨를 찾았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어, 해인양 왔어요? 세현이 이 녀석 아직 출근 안했는데? 오늘 좀 늦네...? 어제 같이 있던 거 아니었어요?"
“아니에요!! 세현씨 보러온 거...
사장님께 여쭤볼 게 있어서 왔어요. 작업실 분들 여기서 회식한다는데 예약을 해야 하는 게 맞겠죠?”
“아, 회식이요...! 저놈...아니, 작업실 화가들,
회식이라 하긴 뭐해도 간간이 여기서 술 한 잔씩들 하죠, 언제쯤 오나요?"
“음... 아마 오늘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오면 아마 한 8시 이후에나 오게 될 것 같고요.
전체 인원은 여섯명입니다."
“뭐, 아무 때나 와요! 요즘은 여행 성수기도 아니라 그 정도 자리야 항상 비어 있는 걸, 뭐.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자리하난 맡아 두지, 뭐!"
"예, 고맙습니다."
해인은 레스토랑의 예약을 마친 뒤, 바로 작업실로 들어갔다.
작업실에는 카와모토와 안톤은 보이지 않고 남은 3명의 화가들만이 아마도 새벽부터 나온 듯, 또랑또랑한 눈빛으로 작업에 열중하는 중이었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데스크에 앉아 일을 시작한 해인.
해인의 사무 업무란 여느 회사의 일과도 같은,
거의 매일이 반복되는 업무였다.
해인이 새로운 양식으로 작성해 두어 정리된 모습으로 차곡차곡 쌓이어 가는 서류들.
책상의 옆쪽으로 정리된 서류를 보관해 놓으려다 이 전에 책상 옆에 놓아 두었던 캔버스를 발견했다.
세현 소설의 삽화 작업에 밀려 잠시 잊고 있었던 아비뇽 그림.
이제 완성의 쾌감을 한번 맛 본 해인은 새 그림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 그림 역시 완성까지 가져가 보고자 했다.
어찌됐건 사무 일을 마친 후 진행될 그림 작업을 고대하며 해인은 재빠르게 업무를 해나갔다.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 즈음,
카와모토와 안톤이 같이 작업실에 들어왔다.
"아, 해인씨 왔어요?"
변함없이 미소로 인사하는 카와모토.
해인은 얼마 전 안톤에게 들었던 하소연과
두 사람의 다투는 장면까지도 떠올라,
혹시 무언지 알 수없는 앙금이 아직까지도 풀어지지 않은 것은 아닐 까 하고 동시에 작업실에 들어온 두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투로 서로 대화하는 모습을 보니 쓸 데 없는 걱정이었던 듯하지만.
“아 카와모토씨, 저번에 말씀하셨던 회식,
이 앞의 레스토랑에 예약하고 왔어요.”
“아, 해인씨. 고마워요. 오늘은 정말 괜찮은 거죠?”
“예, 괜찮아요!!”
아마도 회식이야기가 전달 되어있던 건지,
오래간만에 작업실에는 5인의 화가들이 모두 모여 그림 작업을 진행해 갔다.
그림의 '완성'이라는 쾌감을 맛 본 해인은 업무 중에도 앞으로 슬쩍 슬쩍 보이는 화가들의 그림이 계속해서 신경이 쓰였다.
지금까지도 무수하게 그 기쁨을 누려왔을 화가들, 이들은 거침없는 손놀림으로 척척 단계를 진행시켜가고 있다.
저렇게 시간과 공을 들여 완성한 작품이 누군가에게 정당한 대가로서 팔리게 된다면,
그 기분은 또 어떨 지...
은은한 클래식 음악이 깔린 작업실,
종이에 붓이 닿을 적마다 새롭게 변화해 가는 다양한 스타일의 그림을 몰래 지켜보다 보니
어느 새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엇, 해인씨 옛날에 그리던 거 다시 그리네요? 한창 바꿔서 그리던 그 그림은 어디 있어요?”
업무를 마치고 그림 작업에 뛰어든 해인에게 카와모토가 물었다.
“아, 그 그림, 누구 줬어요. 이걸로 다시 완성까지 가져가 보려고요.”
“그 그림을 그냥 줬다고요? 에이... 그거 완성되면 갤러리에다 전시해서 팔릴 만도 했는데...!!
그냥 준 거예요?”
“전시는요, 무슨... 원래 모티브가 됐던 원작이 있던 그림이라 원작자한테 넘겼어요.”
“그래요? 음... 좀 아깝네...”
“예? 뭐가요? 그림이?”
“아, 아니에요. 음... 지금 그리는 거 한번 완성까지 가면 되죠 뭐.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봐요.”
“예, 감사해요...!”
전에 진행하던 그림의 완성을 지켜보고 싶었던 걸까, 미묘한 아쉬움을 토로했지만 여전히 친절한 카와모토.
오래간만에 재개된 이곳에서의 첫 번째 작품,
아비뇽 배경 그림.
세현의 소설 삽화 작업으로 뭔가 공력이라도 더 붙게 되었던 건지, 뭔가 전과 다른 기분으로 다시 집중해 들어갈 수 있었다.
그로부터 두 시간여가 지났을 무렵,
카와모토가 일어나 모두에게 말했다.
“자, 오늘은 작업 여기 까지들 하고 오래간만에 나가서 술 한 잔씩 합시다. 여러분들! 해인씨가 레스토랑 예약 해뒀다네요!! 나갑시다!!"
처음 들어와 소개할 때 이후,
꽤 오래간만에 함께하는 작업실 전체 사람들과의 회식.
이곳에서 사무와 그림 작업을 병행하기 시작해 벌써 두 달여가 지나가, 이제는 어엿한 한 명의 작업실 식구로 받아들여진 듯 했다.
많은 것이 달라지고 성장한 느낌이다.
온전히 자력으로만은 아니지만, 세상에 자신의 작품을 공개하게 될 날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어서 오세요!!"
바로, 레스토랑에서 미소로 손님을 맞이하는 훤칠한 이 남자와 함께.
세현은 작업실에서 온 화가들과 해인을 맞이했다. 물론 해인에게만은 특별한 눈빛을 아끼지 않은 채로.
[ 글에 그림 붙여봤어요? ]
[ 응, 완전 최고! ]
모두가 자리에 앉는 혼란을 틈타 가볍게 속삭이는 두 사람.
"자, 그럼 우리 회식 때 늘 먹던 메뉴로 하죠,
술은 와인 합시다."
작업실 화가들은 스테이크, 샐러드, 칩스 등 다양하게 안주를 시켜 놓고 와인을 마셔댔다.
술자리를 갖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원래부터도 술을 이리도 잘 마시는 사람들 이었는지,
한번 코르크 마개가 열리기 시작하자 끝도 없이 들이키는 술잔들.
와인과 맥주... 다양한 국적의 화가들이 모여있는 만큼 취향따라 다양한 술들을 주문하는 듯 했다,
"해인씨, 술 좋아해요? 이거 보르도 와인인데 괜찮아서 우리 여기 올 때 마다 자주 마셔요. 자! 한 잔 받아요!"
"예, 술을... 못 먹는 편은 아닌데, 와인은 많이 못 마셔 봤어요. 한국 직장생활에선 술은 좀 마실 줄 알아야 되거든요. 한국선 먹어봤자 소맥이지 뭐...”
"소맥? 그게 뭐예요?"
"있어요, 한국식 칵테일...! 카와모토씨는 한국친구 많다더니 안마셔봤어요? 유명한데..."
"하핫, 나 만나는 친구들이 술을 잘 안 먹어서요, 소맥? 한번 마셔보고 싶네...!"
간만에 그림 세계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해서 일까.
화가들은 일상의 가십들과 현실의 걱정거리들을 서로 이야기하며 한껏 떠들어 댔고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어 갔다.
"아, 정말 해인씨 들어오고 나서 사무 체계가 확 다시 잡힌 것 같아...! 교류도 더 활발해진 느낌이고 문의도 더 많아졌잖아!!"
"그러게 말이야, 요 몇 달 사이에 뭔가 엄청 좋아진 느낌이야 !! 해인씨 한국에선 무슨 일을 하셨길래... 이렇게 똑 부러지게 일을 잘하는 거예요?"
"기획 쪽 일도 하다가 마케팅 쪽으로도 갔다가...
이 일 저 일 많이 해봤어요. 저한텐 뭐 늘 하던 일이었던 걸요, 뭐."
"그러고 보니, 해인씨 요 몇 달 동안 그림도 정말 많이 늘은 것 같아!"
" 그러게 말이야...! 정말 재능이 넘치는 게,
진짜 정식으로 배웠으면 우리보다도 낫겠더라고! 좀 무서울 정도야!!"
"에이, 무슨 말씀들이세요, 햇병아리한테..."
진심인지, 그저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인 지,
한껏 들뜬 기분에 평소에 입에 잘 담지 않던 칭찬들을 술기운에 빌어 신나게 떠들어대는 화가들.
"푸우우....!! 너네들도 그림들 좋더라...
너! 너! 어? 머리가... 노란데...? 뭐야 이거, 외국인이냐?”
그다지 많은 경험이 있지 않던 술자리에서 허세를 한번 부려보고 싶어서였을까.
이쪽저쪽에서 종류도 많은 술들을 주는 대로 다 털어 넣던 해인은 그만 취해 버리고 말았다.
혀 꼬인 소리로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게 웅얼거리던 해인.
"해인씨? 해인씨? 취했어요? 음..."
"으...으음...!! 몰라 임마!!"
"해인씨, 정신 차려요! 해인씨...!!"
혼자 떠들어 대다 그만 테이블에 엎드려 꿈틀대고 있는 해인을 이리저리 흔들어 깨우려던 카와모토.
작업실 동료 화가들에게 뭔가 알 수없는 눈빛을 보내고는 인사불성이 된 해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아이고 해인씨, 이거 큰일 났네... 어이, 여봐 들, 나 해인씨 좀 집에 데려다 주고 올께.
마저 마시고들 있어."
인사불성이 되어 걸음도 제대로 잘 걷지 못하는 해인을 부축하며 카와모토는 무리에서 벗어나 저 어둠 한 켠으로 사라졌다.
마침 다른 테이블에 서빙을 하던 세현은 몇 시간이나 이어지던 이들의 회식을 일부러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무심결에 고개를 돌리다 그 테이블에서 카와모토와 해인의 빈자리를 목격했다.
'뭐야, 이 여자, 말도 없이 먼저 집에...갔나...’
"어!?"
방문하셔서 응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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