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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too Jul 03. 2017

클래스 있는 가족 지키기 <옥자>

개인적인 감상평입니다.(약스포)

봉준호 감독의 초유의 프로젝트.


알려진 영화의 요소들은 물론, 한 컷 한 컷의 디테일을 놓치지 않고 제작에 열과 성을 다한다 해 [봉테일]이라 불리우는 그는,


내놓는 작품마다 화제를 이끌며 호불호가 갈리기는 하지만 늘 대한민국 넘버원으로 지목되어 오던 감독이다.

이미 국내를 넘어 헐리우드와의 합작으로도 큰 성공을 거둔 바 있던 봉준호 감독은 이번에도 대한민국 영화판에 변화를 이끌어 낼 만한 기행을 시도했다.


처음부터 의도했던 것은 아니라고는 하지만,

국내 최초 넷플릭스 제작 및 극장 동시 상영,

그로 인한 국내 대표멀티 플랙스 3사의 보이콧,

영화제에서의 잡음...


개봉 전부터 영화 외부적으로 워낙에 말들이 많았기에 그렇지 않아도 작품만 내 놓아도 이목이 쏠리는 봉 감독의 영화는 이번에야 말로 전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된 모양이다.


영화의 출연진만 이야기해도 여느 헐리우드의 대작 영화들의 캐스팅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레벨.

감독을 굳게 믿고 벌써 두 번째 출연인 틸다 스윈튼, 작품 선정의 수준이 탁월하기로 소문 난 제이크 질렌할, 폴 다노, 스티브 연, 릴리 콜린스 등...


공개 한참 전, 소문만 무성하던 시절부터

소위 헐리우드 내에서도 A급 탑 배우들이 선택한 영화라며 스케일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아이러니하게도 저 헐리우드 명배우들이 나오는데 제목이 [ 옥자 ]?

무슨 시골 순박한 아가씨 이름 같기도 한 동양적인 오리엔탈리즘이라도 다룰 셈인지,


기대또한 무성했던 가운데 여전히 이곳저곳의 잡음이 끊이지 않은 상황에서 드디어 영화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영화를 본 감상은

[ 포장이 잘되어있는 퀴즈 문제 ] 

하나를 받아온 기분이다.


어떤 의미에선 홍상수 감독이 늘 해왔던 방식.

홍상수 자신만의 방식이라고 얘기하기는 하지만, 다른 영화들에 비해 투박하고 적응하는 데에 시간이 걸리던 홍상수의 작품 스타일에 비해,


봉준호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영화 엔터테인먼트로서의 형태를 먼저 만들어 낸 후, 알쏭달쏭한 퀴즈를 남겨놓는 이상적인 형태를 취해오곤 했었다.


플란더스의 개, 살인의 추억, 마더, 설국열차까지 매 작품마다 영화적 완성도 하나 만큼은 거의 흠잡을 데가 없을 정도의 꼼꼼한 만듦새 위에,


상징과 비유, 해석의 여지를 흩뿌려 놓아 그것을 찾아보라는 관객의 역할을 남겨둔다고 해야 할지.


관객은 감독이 일부러 남겨둔 부분을 자신들이 채워간다고 하는 부분에서 더더욱 만족감을 느껴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영화를 관람 후, 극장을 나서면서 문제를 하나 받아오는 셈이다.


정성스럽게 포장해 놓아 소장가치가 있고, 어서 열어 무슨 내용인지 해석하고픈 욕망을 불러  일으키는 문제상자.  


필자 역시도 그런 과제를 선물로 받은 듯하니, 나름의 생각을 채워 넣어볼까 한다.






미란다 코퍼레이션은 수퍼 피그 프로젝트라는 미명하에 유전자 조작으로 관리가 용이하되, 생산량은 극대화 할 수 있는 [슈퍼피그]를 만들어 내기에 이른다.

세계 각지로 보내어 10년 후로 완성체가 된 돼지들을 회수해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가려는 야심을 가지던 미란다사. 한국에도 한 시골 산골로 보내어져 참가하게 된 이들은 이 동줄에게 가족과도 같이 [옥자]라 이름지어 10년여를 같이 길러간다.

애초의 계획대로 10년이 지나 잘 성장한 돼지들을 회수하려던 미란다사는 슈퍼피그콘테스트라는 대회를 핑계 삼아 옥자가 있는 산골로 찾아와 옥자를 회수해 간다. 애완동물을 넘어서 가족과도 같은 친밀도로 늘 함께 해왔던 옥자를 빼앗겨버렸다 생각한 소녀[미자]는 옥자를 다시 데려오기 위해 홀로 여정을 떠나게 되는데...




후반부에 분위기가 반전 되기는 하지만, 영화를 처음 본 느낌은 일단 경쾌하고 밝다.


특히 봉준호 감독의 영화 중에서도 이번 스토리는 헤매는 일 따위는 없을 정도로 진행이 단순 명료하다.


동물과 어린아이를 전면에 내세워 서로 간의 교감, 아껴주고 위해주며, 위험까지 무릅쓰고 공생을 꿈꾼다는 큰 맥락의 스토리 라인에서는 디즈니 동화의 한 형태로 보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까지도 무수히도 많은, 비슷한 스토리라인의 영화들이 있어오기는 했다.

전혀 분위기와 느낌은 다르지만,

가족과도 같은 애완 코끼리가 납치되어 이를 찾아 홀로 여정을 떠난다는 스토리 라인의 [옹박],

딸이 납치되어 아버지가 구하러 가는 [테이큰], [아저씨] 등이 무수히 떠오른다.


그렇다면 이 새롭지 않은 스토리 라인에 어떤 비유 상징 요소들을 담아 메시지를 보여주고자 한 건지, 예측해 볼 기회가 주어졌다.



1. 자본주의의 비판


인류의 식량문제를 해결해보기 위해 유전자조작으로 만들어졌다는 슈퍼 피그.


순수하게 이 목적 그대로라 해도 분명히 자연의 법칙을 거슬러 가며 ‘인간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행동임이 분명하고,


이 같은 원대한 목적을 제시하며 좋은 취지하에 슬쩍 뒤로 물러나있기는 하지만 이는 결국 ‘미란다’라고 하는 회사의 금전적 수익이 가장 우선시되었음은 두말 할 나위 없어 보인다.

일차적으로 느껴지는 상징은 전 세계로 만연해 있는 지나친 자본주의 사회에의 비판이었다.


돈이면 다 해결되는 사회가 되어버린 세상.

그리고 아직까지는 금전의 가치보다 인간 본연의 감정이 최우선이라 믿는 순수한 소녀가 맞서는 내용.


심지어는 소녀의 편에 서주겠다던 동물해방연대조차 순수한 목적이 아닌,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소녀를 이용하는 형국이 되어버린 잔인한 모습을 보여주며 이를 상징한다.


자본주의의 병폐.

극중 자매로 등장하는 미란다의 사장 루시와 낸시는 회사의 이익만을 위해 소비자나 다른 요소들은 안중에도 없는, 그야말로 이기적인 자본주의의 정점으로 묘사되었다.


앞서 언급한 바 있다시피, 자본주의와 반자본주의의 대립을 자본주의의 정점인

[루시-낸시] 와 [미자-옥자(유사자매)] 라는, 자매의 대결 형태로 나타낸 것도 흥미롭다.



이 부분에선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하는 순서로서 다루어질 수 있는 것이, 가족을 지키고자 하는 신념과 돈의 가치를 따져보는 문제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연인, 부부, 부모자식 간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누군가에게 잘해주고 지켜준다는 것.


현대 사회에서 그것은 얼마만큼 그 상대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물질적인 증거품의 문제가 되어버렸다.


‘내 아이에게만은 정말 아끼고 내 모은 사랑을 다 줄 거야’


하지만, 그것을 가능케 하는 자본, 즉 ‘돈’이 없어 발만 동동 구를 뿐,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면?


결국 인내가 필요한 상황에 그 인내의 한계를 벗어나게 된다면 증오와 이별까지로도 이어질 수 있는 상황에 처할 지 모른다.


감정만으로 인간관계를 이어가기엔 현대사회는 너무 많은 유혹들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리고 그 유혹을 쉽게 떨칠 수 있는 이들이란 그리 많지 않을 거라 장담한다.


그리고 그 대부분을 행함에는 돈이 필요하다.

극중 할아버지의 손녀가 내친 황금 돼지를 줍는 장면이나 떨어진 돈다발의 돈을 챙기는 장면이 개그로서 묘사되기는 하지만, 개인적인 욕심보다도 손녀를 위해 준비를 해 놓는 다는 개념이 더 컸던 것으로 보여졌다.


정작 미자가 더 크기 시작해 비교할 만한 친구들이 주변에 생겨나게 되면 정 반대의 위치가 될지 모를 일이다.


이야기 안에서도 낸시와 루시가 악역으로 묘사되기는 하지만, 사회적인 맥락으로 보면 그들은 도덕적인 측면이 조금 결여되어 있을 뿐, 기업의 대표로서 매출을 내어야만 한다는 의무 실행을 냉정하고 성실하게 실행하고 있는 모습인 것이다.


영화의 끝에서는 명쾌한 해답이라기보다 결국엔

이 자본주의에 물들어 버린 세상에 결코 혼자만의 힘으로는 감당해 낼 수 없다는,


결국은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자본의 논리에 굴복해 버리고 말았다는 씁쓸한 인상을 심어주기도 한다.  



2. 가족을 지켜라


특히 봉준호의 영화에서는 늘

[가족을 지키는 것]이 늘 중요한 가치로 기본 틀을 형성해왔다.


플란더스의 개, 살인의 추억, 괴물, 설국열차 모두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한 남은 가족들의 고군분투의 플롯이 늘 큰 축을 담당해왔으며 심지어 이 영화에는 그 가치를 전면에 내세웠다.


딸을 잃었지만 딸과 함께 있던 아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였던 영화 [괴물]에서도, 항상 보호를 받던 존재였던 딸이 열차가 전복된 후 더 어린 아이를 케어하기 시작했던 영화 [설국열차]에서도.


약자로 나오는 인물이 시스템이 지켜주지 못하고 있는 더 약한 자를 돕는 형식은 늘 있어왔다.

[옥자]에서 자매 이름의 돌림자처럼 분양받은 돼지에게 이름을 붙였다는 것은 단순 애완으로서의 개념을 넘어 가족의 일원으로서 받아들인다는 의도가 깔려 있을 것으로,


10년을 같이 지내오며 정을 쌓은 미자와 옥자는 가족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 흥미있는 가설을 놓고 생각해 본다면 더 감정이입이 될 수 있음직 한데,

[옥자]를 그저 돼지가 아닌 한명의 인간으로서 설정을 해놓고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어떻게 될까 하는 점이었다.


이복자매, 다른 의미에선 AI나 인조인간, 유전자 변형을 통한 인간 이외의 존재라 해도 10년이라는 시간동안 정을 붙여오며 같이 먹고 자라온 인간의 형태를 한 존재라 가정하고,


그대로 영화 속에 적용을 시켜보자면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실험실에서 옥자에게 강제로 자행되었던 ‘짝짓기’, ‘가혹행위’ 그리고 내 가족을 이용해 돈을 벌려는 무리들, 그리고 결국엔 돈으로 사올 수밖에 없는 방법들,

인간에게라면 그것은 [강간]에 [고문], [인신매매]가 되는 행위.


감독 역시도 가족이라는 프레임 안에 그것들을 짐승이라 포장해 잔혹함을 다소 상쇄시켰을지 모를 일이다.


할아버지는 극 중에서 어차피 옥자의 운명이 언젠가는 사람들의 식용으로 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언제가 될 지 모를 이별을 각오하면서 살아왔다고 한다면,


아직 철없는 미자로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별을 부정하면서 살아왔다.


그리고 영화는 마치 해피엔딩처럼 모든 것이 정상화 되었다고 마무리를 지어주기는 했지만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 하나로 모두가 행복해 졌다고 보기엔 이 전에 보여준 이미지들이 너무 잔혹하다.




3. 그럼에도 먹을 수밖에... 축산업에의 일침?


슈퍼 피그 프로젝트.

인간의 식량난을 해결할 수 있다는 취지하에 거행된 이 프로젝트에 세계인들이 동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 실험 대상이 인류의 시작부터 우리에게 늘 식량이 되어왔던 돼지, 소, 닭 등의 대표적인 가축이라는 점이었다.


실제로 봉준호 감독은 돼지의 세세한 도축과정을 목도한 후 몇 달 간 고기를 먹지 못할 만큼 큰 비주얼 쇼크를 받았다고 말한 바 있었다.


먹방, 먹거리를 소재로 한 방송들이 넘쳐나는 현재. 돼지고기가 구워지는 장면이 하루라도 방송을 타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로 대중화된 인간의 식량이 되어주고 있지만, 살아있는 돼지, 소, 닭 등과 연관지어 생각하는 경우는 드물다.

과정은 생략해 버리고 일단은 혀끝으로 전달되어오는 맛과 포만감으로 전달되는 위장의 만족을 극대화해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취급하는 식당의 이해관계를 생각해야 했기에.


극중, 도축을 기다리고 있는 수천마리의 슈퍼 돼지들 가운데 옥자만이 (돈으로)구출되어져 좁디좁은 길을 서서히 걸어 나오지만, 철창에 갇혀 죽음을 앞두고 있는 돼지들의 모습은 처량하기 그지없다.  


필자 역시 인간의 측근으로서 [개]의 인생을 다룬 이야기를 만들어 본적이 있는데, 식용견으로 분류되는 개들의 처참함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있어 이 부분만큼은 특히 찡하게 다가오는 장면이었다.

자체 순화 컷


한국이 개를 먹는 민족이라 세계에서 놀림거리가 되었던 시절, 그들 주장의 전제는 이러했다.


“인간과 가장 가까운, 애완으로도 같이 생활하는 개를 어떻게 먹을 수가 있느냐!”


그럼 우리는 이렇게 반박하곤 했다.


“애완으로 기르던 개를 먹는 것이 아니라, 돼지, 소처럼 식용으로 따로 분류되는 가축을 먹는 것뿐이다!”   


이렇듯 소, 돼지는 변명거리로 사용되어도 사람들이 이해를 해줄 만큼 대중적인 먹거리였다.


약육강식이라는 생태계의 원리를 따른다고 보면 이상할 일은 없지만,이성을 가지고 생각할 줄 아는 인간의 입장에선 그저 굶주림 해결을 위해 다른 짐승들을 잡아먹는 것이 그렇게 기분 좋은 일만으로는 여겨지지 않을 수도 있다.

더군다나 그 대상이 성장과정을 함께 해온 가족 같은 가축이라면...


영화에서 강조하고 있는 부분은


“이렇게 잔인하게 짐승이 도축당하고 있으니, 채식합시다 여러분!!”

“유전자 같은 거 조작해서 대량으로 도축하고, 이렇게 생태계를 농락하면 안 됩니다! 그냥 있는 대로 잘 먹읍시다!”


같은 단순한 주장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어느 정도 식량에 대한 고마움은 인지해야 한다는 것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사실 결론 따윈 없을 지도 모른다.




영화의 만듦새 측면에서 이 영화는 설국열차 때와 비슷한 구도를 띠고 있다고 보여진다.


내용적인 측면이 아니라 이야기와 캐릭터를 운용하는 방법적인 부분 말인데,


치밀하기로 소문난 봉준호 감독이 이야기 구석구석 적절한 성격과 대사를 치는 캐릭터들을 설정해 놓은 후, 그에 맞는 인물이 딱 제 역할만을 할 수 있게끔 한다는 것으로,


설국열차 때 한 인터뷰에서

[ 캐릭터가 이야기에 종속 되어있다 ] 고 표현하던 그 부분이다.


즉, 모든 것이 짜여진 각본대로 진행하기에 캐릭터들이 튀지 않고 이야기의 흐름에 봉사한다는 의미이다.


보통 단순한 플롯의 이야기에 매력적인 캐릭터의 활약으로 이야기 전체의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형태와


약간은 복잡한 플롯, 설정의 이야기는 적재적소의 캐릭터들을 배치해 두어 알맞은 역할로서 패스 패스해가며 결말에 다다르게 하는 형태의 두 가지 패턴이 있다고 보는데,


이는 장르별 특성이기도 하며, 호불호가 나뉠 수도 있는 감독별 스타일이라 여겨도 무방할 듯하다.  


봉준호 감독은 명백하게 후자의 쪽으로 이야기의 짜임새와 구성을 중요하게 여겨 결말까지 이어가는 완성도를 중시하는 스타일이라고 본다.


이 영화 역시 전체적인 세 가지의 팀으로 구성되는 캐릭터 집단이 존재하는 만큼, 적재적소에 캐릭터를 다수 배치하고 딱 그 위치에 맞는 역할을 부여했다.


그래서인지, 연기력으로는 누구하나 흠잡을 부분이 없을 정도였지만, 간혹 존재감이 미비한 캐릭터들이 눈에 띄기도 했다.


캐릭터의 비중에 비해 존재감이 떨어지는 것이 배우의 역량부족인 지 까지는 알 수 없으나,


한 사람 한 사람 존재의 이유에 정성스럽게 어떤 상징을 부여하고자 하니 놓치게 되는 캐릭터가 생겨났던 것일 지도 모르겠다.






전체적으로 유쾌하지만 메시지와 여운이 남는 영화 옥자.


한국 영화 극장계의 판도를 달리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라는 외면적 이유 외에도,


믿고 보는 봉준호의 작품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관람할 이유는 충분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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