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그곳에서...<34화>

[ 제34화 _ 이제부터 내가 뒤에 있을 테니까...!! ]

by youtoo

“어이, 카와모토, 얘기 좀 하자!
너 제정신 돌아온 거 맞지? 해인씨 대신 내가 너네 집 방문해 주려고 왔으니 얼른 문 활짝 열어라!!”

“뭐? 네놈하고 뭘 하자는 건데!? 너, 너 혹시...?? 오...오지 마!!”

“허이구? 지금 여자는 들이고 남자는 내치려는 거냐? 이런 성차별이 있나... 아무튼 넌 지금 선택권 없으니 조용히 문 여는 게 좋을 걸? 아니면 야밤에 경찰 사이렌소리 들리게 해준다? 이 새끼 변태 치한이라고...!

몇 년 동안 이 동네에서 입지를 다졌다더니 날아가는 건 한 순간이지...! 동양인이라 눈에 확 띌텐데..."

“그...그런 거 아니라고!! 조용히 하라고!!"

세현은 필사적으로 열지 않으려는 카와모토의 집 문 틈을 비집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각종 미완성 그림들로 가득한 방 안.
그림 도구들과 물통,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붓 등, 전체적으로 어수선하기 그지없는 모양새였다.

“후... 방 꼬라지 봐라...여자를 들일 생각이었으면 청소나 좀 해 놨어야 하는 거 아니냐?
꼭 이렇게 후줄근한 아티스트 티를 내야겠냐?
어디 전쟁 치르냐?”

무대포로 밀고 들어오는 통에 별 수 없이 세현을 방안으로 들여 마주 앉게 된 카와모토.

“넌, 이거... 명백한 납치 현행범이다. 내가 목격자고... 일 크게 만들기 싫으면... 내가 묻는 거에 똑바로 대답해!! 너, 처음부터 노린 거지?”

카와모토는 뒤늦게 정신이 돌아오기라도 한 듯, 깨질 듯이 아파오는 두통을 참아가며 세현에게 하소연 했다.

“저... 절대 아니다!! 그런 건...!!
나...남자가 술 먹으면 가끔 시...실수 할 수도 있는 거 아니냐!! 시...실수다 실수...”

“쳇, 어디 같이 산지 20년 넘은 남편이 바람피우고 와서 지껄이는 것 같은 핑계를 대고 앉았어?!

다른 외국인 놈들한테는 어떻게 말하고 둘이 그렇게 먼저 나온 거지? 계획범죄? 네가 그 집단 리더냐? 그냥 알고도 다 넘어가 주는 거야?
해인씨 꽐라 됐었던 건 내가 확인했으니 동의 하에 같이 온건 당연히 아니고...!"

세현은 최조를 진행하는 배태랑 형사와도 같은 자세로 카와모토에게 더 날카롭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아니다!! 그런 거... 얘기된 거 아무것도 없어!!
그냥 내 시...실수라고!!”

세현은 다시 한 번 카와모토의 방을 둘러보았다. 자그마한 골방에 머무르고 있는 자신과는 비교되는, 꽤나 있어 보이는 실내의 인테리어들.

“일본인이 유럽 와서 그림 작업하면서 이 정도 되는 집에 산다... 집에 돈은 좀 있는 모양이네...
아님, 그림 잘 팔리냐?”

“그...그런 건 네놈이 관여할 바 아니잖아!!
하...하고 싶다는 말이 뭔데!!! 그거나 얘기하고 얼른 돌아가!!"

세현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처음에... 작업실로 해인씨를 불러들인 이유가 이거였냐? 같은 동양인사람이니 동양인 여성에 대한 신비감이나 이런 건 아닐 테고... 그저 언젠가 이렇게 데려 올 목적이었냐고?!!"

“절대 아니야!! 아를에서 처음 만나고, 전시장에서도 만나고... 그냥 그림에 흥미를 보이는 동료 같은 입장에서 호의로 그랬던 거다!!
그...그건 외국인 친구들한테 물어봐!!”

세현은 늦은 밤에 이곳을 찾아오면서도 내내 생각했다.

해인에 대해 자신이 감정이 생겨나기 시작한 이유도 있지만,

자신과 비슷한 이유로 이곳에 머무르며,
명백히 지금 좋은 흐름을 타고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해인이게 가능하면 큰 변화를 일게 하고 싶지 않았다.

눈앞의 의심 가득한 카와모토라는 놈도 결국엔 예술인.

처음 해인의 순수한 예술 혼을 알아보고 도움을 주기 위함이었다면, 어쩌면 함부로 자신이 관여해서는 안 될 일임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해인씨가 오늘 일 다 기억하고 있다면 어떻게 할래?”

“사...사과 할 거다!! 그래도 내가 이제까지 해인 씨한테 일도 주고 그림도 알려주고 그랬으니... 아마 용서해 줄...”

“이봐! 이봐...! 내가 이만큼 해줬으니 이 정도 실수 정도는 받아들여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 아냐?
그게 호의냐? 대가를 그런 쪽으로 은근 바라고 있는 거 아냐?

아까 레스토랑에서 막 그러더만,
[ 해인씨 덕분에 우리 업무가 많이 편해졌어요... ]라고...!

그건 일도 잘하고 있다는 거 아냐!!”


“아니, 내 말은 그런 건...아니,
근데 너네 레스토랑에선 손님들 말하는 것도 다 엿듣고 그러냐?”

“말장난 하지 마! 이씨...! 너네처럼 수상한 놈들이 하는 얘기니까 엿듣지!!”

세현은 가능하면 해인이 이 날의 일을 전부 기억해 주지 않았으면 했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내일을 맞이할 수 있도록.

그렇지만 자신이 목격해 버린 이상,
눈앞의 이 자식과는 담판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앞으로 네놈은 해인씨한테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

“뭐, 뭘 어떻게 해... 그냥 계속 같이 했으면 좋겠는 거지...일도 잘하고...”

세현은 입을 꼭 다문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너... 앞으로 다시 이런 일 생기면 나 진짜 가만히 안 있는다. 다른 외국 놈들한테도 똑똑히 전해 둬라!! 내가 코앞에서 지켜보고 있다고...!!”

“넌 대체 뭐냐 해인씨한테, 부모처럼 왜 이렇게 참견 질이야!! 해인씨는 무슨 어린 애냐!!?
그런 거 결정이야 혼자 할 수도...”

“애지!! 이렇게 아무 의심 없이 헤헤 실실대면서 더러운 꼴 당할 뻔 할 곳까지 왔었는데...!!”

“뭘 또 더럽기 까지...”

“애라서 참견하는 게 아니야!! 좋으니까...
지켜주고 싶은 거지! 네놈 같은 놈팽이들한테!!"

“딱히 남자친구도 아니라면서 오지랖은...!!”

봐주는 모드로 들어서는 듯하자 슬슬 기어오르는 카와모토에게 다시 무서운 얼굴을 하며 세현이 눈을 부라렸다.

“야! 이 새끼, 한번 참아 주려고 하니까 만만해 보이냐? 조심하라고 이 새끼야!!”

“아...알았다고!!”

본의 아니게 범죄좌와 딜을 하는 듯한 세현.

과연 이게 잘한 건지 모르겠다.

기어이 본능을 드러낸 저 남자들의 소굴에서 하루빨리 해인을 빼내오고 싶지만,

지금의 해인을 위한다면 그건 그다지 최선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과거 무수히 이어졌던 다른 여인들과 연애시절.
자신을 옭아매고 오로지 소유하려 했던 상대의 패턴에 지칠 대로 지쳐봤던 세현은,

왜 그렇게 ‘소유’를 하려 하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누구를 좋아하게 되면 그 어마어마해진 크기의 감정에 치우쳐 이성적으로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소유하려는 욕심은 집착으로, 집착은 결국 증오의 감정으로 이어져갔었다.

그런데 정말로 이 여자에게 만큼은 달랐다.

'지켜주고 싶다'

해인이 많은 것을 포기하고 이곳에 온 목적을 존중해야 했다. 연애나 하려고 온 것은 아닐 테니. 그것은 세현 역시 마찬가지.

어리바리한 모습 뒤에 슬쩍 슬쩍 보이던 단호한 해인의 모습.

아직 채워지지 않은 꿈에의 갈망은 어떤 이유로도 간섭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너, 앞으로 내가 예의 주시할테니까 똑바로 해.
가만, 안되겠다. 네놈 연락처도 알아 놔야겠어.
또 구라 칠 테니, 내가 직접 봐야지, 핸드폰 줘봐!"

허락도 맡지 않고 옆에 놓인 카와모토의 핸드폰을 열어 번호를 확인하려던 세현.

핸드폰을 열자 초기화면에는 한 여자와 같이 찍은 사진이 올려져 있다. 같이 끌어안고 웃고 있는 모습.

"뭐야, 이 새끼 완전 쓰레기 구만?
여자 친구도 따로 있었어? 에라이!!"

"내놔!! 임마!! 도...동생이야!!"

"동생은 무슨... 누가 다 커서 여동생하고 이러고 사진 찍냐?! 그리고 하나도 안 닮았구만!!

네 사생활에 관여하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해인씨 한테나 떨어져 임마!!"

당황한 카와모토, 급히 핸드폰을 뺏으려 했지만 기어이 세현은 직접 폰에서 번호를 확인한 뒤, 돌려주었다.

"자, 마지막으로 말한다. 해인씨한테는 일단 나도 얘기 안 할테니, 가능하면 아무렇지도 않게 대해줘. 그림 같은 거 앞으로 더 도와주고!!!"

"알았다고!! 자기가 아빠처럼 얘기하고 있네? 아주..."

"아빠..."

세현은 문득 액상프로방스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해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대상이 난 없었어요...]

'그러고 보니 해인씨는 아빠...한테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겠구나...'

"아...암튼 앞으로 지켜 볼 거야!! 너, 이번 한번, 그냥 넘어가 주는 걸 고맙게 생각해라!!"

"쳇!!"

첫번째의 만남처럼 으르렁대며 돌아선 두 남자.
세현은 억지로 태연한 척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이 소란스럽기만 했던 하루가 마무리 되는 건가,
드디어 잔뜩 들어가 있던 긴장을 내려놓으며 방안 침대에 누운 세현.

"응??? 잠깐만!!?? 저... 저 놈...??"



***



"야, 너 그동안 뭐 알아낸 거 없어??"

“어...없어... 이젠 아주 날 노예로 부릴 작정이야!?”

“너 지금 어디야? 또 어디 피규어 매장 가서 헐벗은 여자 캐릭터 피규어나 들고 실실 대고 있는 거 아니지? 빨리 정보나 더 알아봐! 신고해 버리기 전에...!”

“아, 아니야!!! 나도 일하는 중이라고!! 아씨...
그리고 그놈의 신고 소리 좀 그만해..!!"

일본.
크리스의 행방을 찾으려 아영과 함께 동조수사를 펼치기로 한 추레하기 그지없는 이 남자.

다분히 오타쿠스러운 외견의 이 남자 이름은 야마다였다.

현지인이라는 장점으로 정보 알아내기는 더 수월했던 모양으로,

아영이 혼자 움직일 때보다 더 빠르게 수사망을 좁혀들어 갈 수 있었다

아영은 야마다가 스토커처럼 몰래 자신을 따라오다 들켰던 이 전의 사건을 눈감아준다는 빌미로 그를 정보통으로 이용하기로 했다.

주기적으로, 보고를 받듯 연락을 해댔다.

"어이, 야마다! 네가 사기 당했다는 그 외국인 이름은 뭐라고 했냐? 서양인이랬지? 국적은 알아?"

"성만 알아. 에릭슨이라고.
느낌은...잘은 몰라도 생긴 게 미국보다는 유럽 쪽에 ..."

"에릭슨?"

"그래, 미스터 에릭슨이라고 불렀었어."

틈 날 때마다 얻은 정보들을 빠짐없이 기록하며 추리를 시작한 아영. 조금씩이지만 퍼즐이 맞추어져 가는 듯 했다.

[미스터 에릭슨...유럽인 추정, 호주 워킹홀리데이에서 만났고...야마다가 돈을 떼였다.

크리스 말대로 동료와 프로젝트 사업을 하는 게 맞다면, 비지니스 파트너 정도일 것이고...

이쪽은 가명으로 추정되는 크리스...일본인 ,
서른 하나, 과거 도쿄거주. 현재 도쿄에서는 나간듯 하지만 정확히 알려진 바 없음]

간만에 활기를 찾은 아영의 추리노트.

" 그 에릭슨이라는 사람... 호주에서 뭐했었어?
넌 어떻게 만난 거고?"

"아마... 무슨 예술 관련 공부를 하러 왔었댔어.
난 동호회에서 만났고."

"예술? 무슨 동호회 였는데?"

"작품 감상 동호회."

"작품? 무슨 작품? 소설? 영화? 미술? 뭐 그리 범위가 커?"

"뭐든. 한 명이 작품을 소개하면 그것에 대한 감상 같은 걸 영어로 얘기하면서 토론해보는...
그냥 언어 실력 늘리려고 들어갔던 데 였어."

꽤나 많은 정보량으로 흩어진 퍼즐조각을 맞추는 아영.

대부분이 그 에릭슨이란 남자의 정보였지만 같이 공모를 했다고 확신하는 만큼,

그의 뒤를 파내다보면 줄줄이 크리스의 정보도 따라 올 것이라 확신했다.

아영은 세현과 같이 일하던 그 레스토랑에서 일을 마친 참이었다. 세현이 나간 이 후 한국인 알바생은 오직 본인 혼자.

야마다의 등장으로 크리스 찾기에 더 정신을 쏟을 수 있게 되기는 했지만 늘 수다를 떨며 일을 같이하던 세현의 빈 자리는 의외로 컸다.

"후... 이것들... 서로 짝짝궁 맞아서 뭐래도 하고 있는 거 아냐? 요즘은 연락이 뜸하네...
새끼 새들이 야생으로 떠나면 어미는 안 찾게 되는 논리 인가..."

[ 부르르르르르!!!! ]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울려대기 시작한 아영의 폰.

"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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