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211004)
몇 년 전에 둘째 아이의 중학교 2학년 중간고사 국어 시험문제를 푼 적이 있다. 풀고 나서 두 가지 이유로 놀랐다. 우선 문제의 질문이 너무 어렵다. 솔직히 뭘 물어보는 건지 잘 모르는 문제들도 꽤 있었다. 두번째는 그럼에도 평균 점수가 높다는 것이다. 참고로 나는 평균보다 한참 밑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을 잘 푸는 아이들의 문해력은 좋은 걸까 나쁜 걸까.
아이들의 낮은 문해력도 문제이지만 선생님들과 의사소통의 문제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만약 학교에서 시험문제에 등장한 '질문'의 형태로 아이들과 의사소통을 시도한다면 영원히 낮은 문해력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 같다. 교육이라는 것이 잘하는 아이들을 더 잘하게 만들기 위함도 있지만 그 보다는 못하는 아이들을 평균 이상으로 만들어 주는 데 더 큰 의의가 있는게 아닐까 싶다.
최근에 EBS에서 나온 이후로 '문해력'이란 말이 유행이다. 글자를 알지만 문장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면 문맹은 아니지만 문해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오늘 실린 두 개의 기사는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핸드폰과 타블렛 사용이 늘면서 책을 읽는 시간이 줄어들고 게다가 최근에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학교에서 수업을 하는 시간이 줄어들면서 아이들은 글을 읽는 절대적인 시간이 줄어들었다. 그래서 긴 글을 읽거나 강의에 오랜 시간 집중하는 걸 힘들어한다고 한다. 내 생각에는 조기 영어 교육의 영향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어 어휘력이 풍부해져야 할 시기에 한국어를 사용하는 것에 제한을 받고 영어 교육으로 간섭되는 것이 전혀 영향이 없을 것 같지는 않다.
요즘 아이들은 문해력도 좋아야 하고 , 영어 교육도 받아야 하고, 선행학습(이건 교육자들의 권유가 아니라 일종의 관행처럼 굳어졌다)도 해야 한다. 여기에 조기 코딩교육까지 시켜야 한다니 대체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 싶다. 무엇을 넣을까를 고민하기 전에 앞서서 무엇을 뺄까를 고민해야 한다. 앨빈 토플러의 조언은 아마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