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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의 변화 Mar 15. 2022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25주년 재상봉에 부쳐

   1996년 9월, 분극의 밤 연습을 위해서 강당에 모였다. 최종적으로 결정된 작품은 이강백의 <결혼>. 내가 연출을 맡았고, 4학년 대표였던 ‘산적’이 기획을 맡았다. 문제는 배우였다. 석 달 후에 의사국가고시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배우를 구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참고로 두 해 전 의사국가고시는 역대 최저 합격률을 기록했다). 남자와 하인 역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독사’와 ‘극회장’으로 정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여배우가 없었다. 연극반 여자 동기들과 연극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던 여학생들에게 제안을 했지만 이러저러한 이유로 모두 거절당했다. 거의 자포자기 상태인 시점에 같은 실습 조였던 여학생이 자기가 하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내 대답은 당연히 오케이였다. 그리하여 공연 열흘 전에 간신히 연습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의사국가고시가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연습을 하는 동안만큼은 막 연극을 시작했던 신입생 때처럼 즐거웠다. 적어도 난 그랬다. 몸을 풀고 발성 연습을 하고 장면을 만들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얘는 왜 안 와?”  산적이 시계를 보며 투덜거렸다.  

“올 때까지 네가 대신 좀 해.”


아싸, 산적이 냉큼 무대 위로 올라갔다.  

극회장은 공교롭게도 그 시기에 동문회와 담임반 모임이 잡혀 있었다. 산적은 연습을 두 번 빠져야 한다고 얘기하는 극회장에게 꼴랑 열흘 연습하는데 말도 안 된다며 벌금을 걷겠다고 협박했다. 원칙적으로는 당연히 같이 연습을 해야 하는 게 맞지만 하인이 연습을 좀 빼먹는다고 공연이 어떻게 되는 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러닝 타임 이십 분이 조금 넘는 단막극인 <결혼> 속에서 하인이 맡은 역할이라는 게 대사 한 마디 없이 남자의 물건을 하나씩 빼앗는 것 뿐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두 번밖에 안 빠지는 것에 내가 감사해야 당연했지만 산적에게는 안 통했다.  


“오늘 메뉴는 뭐냐?” 독사가 물었다.  

“볶음밥과 깐풍기 되겠슴다.”


셋(연출, 독사, 여학생)이 동시에 ‘와!’하고 탄성을 질렀다. 산적은 항상 두둑한 제작비가 있으니 마음껏 먹으라고 너스레를 떨었고, 연습 때마다 ‘행운각’에서 요리(보통은 탕수육, 가끔은 깐풍기)를 시켜주며 돈 많은 기획자 행세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써도 줄지 않는 화수분이라고 큰소리를 쳤던 제작비는 공연 사흘 전 동이 났다. 과도한 식비 때문이었을 것이다.  

연습을 시작한 지 삼십 분 정도 지났을 때 행운각에 주문한 저녁이 도착했다.  


“연출 선생님, 하인이 계속 물건을 뺏는 게 대체 무슨 의미입니까?” 산적이 밥을 다 먹고 나서 손을 번쩍 들더니 수업 시간에 질문을 하는 학생처럼 짐짓 예의 바르게 물었다.  

“인생이라는 게 뭔가를 계속 잃어버리거나 뺏기는 거잖아.” 내가 말했다.  

“시인으로 태어나 도둑처럼 살다가 흡혈귀로 죽는 거지.”

독사가 담배 연기를 후욱 공중으로 내뿜었다.  

“에잇, 비관적인 쉐끼들.”

“하지만 결국 사랑을 덤으로 얻잖아.” 여학생이 말했다.  

“오호라, 그래서 여자 이름이 ‘덤’이구만.” 산적이 벽시계를 쳐다봤다. “근데 하인 이 쉐끼는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정작 이런 주옥같은 얘길 새겨들어야 할 놈은 술이나 퍼마시고 있으니.”  


끼익, 강당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쏴리.”  


극회장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불콰해진 얼굴을 하고 나타났다. 우리 넷은 모두 극회장을 보고 반색을 했다.


“어이 홍익인간, 빨랑 와서 벌금이나 내셔. 그 돈으로 아이스크림이나 사먹어야 쓰것다.”  


연습을 다시 시작했다. 하지만 술 취한 하인은 자꾸 동선이 꼬였다. 다행히도 대사가 꼬이지는 않았다. 대사가 한 마디도 없었으니까. 산적은 연습 시간이 부족해서 그런 거라며 따로 보충 연습을 시켜야겠다고 하인을 협박했다. 연습할 시간도 없는데 무슨 수로 보충을 하겠다는 건지.  

닷새 후에 우리는 큰 실수 없이, 비록 작은 실수들은 좀 있었지만, 무사히 <결혼>을 마쳤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산적은 3관왕(작품상, 남우, 여우주연상)은 따논 당상이라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심사위원들의 생각은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그나마 독사가 남우주연상을 받아서 체면치레는 한 셈이 됐다. 연극이 끝나고 우리 다섯은 무대 위에 모여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학창 시절 제일 기억에 남는 게 언제야?”  

“글쎄, 음 ‧‧‧‧‧‧ 분극의 밤?”  


‘여학생’이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연출과 여학생은 <결혼>을 공연한 후 사 년 뒤에 진짜 ‘결혼’을 했다.

2014년 내과학 교실에서 99년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산적’ 임동준을 기리는 뜻에서 전공의들에게 주는 상을 제정했다. 행사 담당자가 내게 추모의 글을 부탁했다. 기념식장에서 글을 읽으면서 스크린에 띄울 슬라이드를 한 장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연극 <결혼>을 마치고 의대 강당 무대 위에서 같이 찍은 사진이었다. 아마 내 생각도 아내와 비슷했던 것 같다. 그날 임동준 상 기념식장에서 내과 교수가 된 독사와 극회장을 만났다, 그리고 임동준의 어머님도. 못 알아 보실 줄 알았는데 내 이름까지 기억하고 계셔서 조금 놀랐다. 잘 지내신다고 하셨다, 씩씩하게 잘 사신다고. 당신의 말이 사실이기를 바랐지만, 자식을 먼저 보낸 어느 부모가 ‘진짜’ 씩씩하게 잘 살 수 있을까.  


작년 여름 병원에서 퇴근 준비를 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임동준 어머니’라고 액정에 떴다. 언젠가 연락처를 드리긴 했지만 한 번도 연락하신 적이 없었는데, 웬일일까.  


“누가 날 병원에 가뒀어요. 제발 좀 꺼내 줘요, 제발.”  


전화를 받으니 다짜고짜 제발 꺼내 달라고 애원하셨다. 어머님의 말씀은 어수선했고 나는 혼란스럽고 상황 파악이 안 된 채 한참 동안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겨우 정신을 차려 어머님을 진정시키고 설득해서 담당 간호사와 연결이 됐다.

어머니는 작년 봄에 혈액암을 진단받았고 항암 치료 후에 백혈구 수치가 많이 떨어져 입원했다. 격리 병동에 입원해 계신 중에 섬망이 생겼다고 했다. 당신께 차근차근 설명을 드렸지만 이해하지 못하셨고 나는 어머니를 병원이라는 감옥에서 꺼내 드릴 수 없었다. 그해 겨울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부고를 들은 날 오래 전에 사고로 죽은 벗과 암 투병 중에 돌아가신 벗의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울었다.  


평범한 시간들이 강물처럼 흘러 연출은 남편이 되고, 여학생은 아내가 되고, 독사와 극회장은 교수가 됐다. 삶의 의미는 주어지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 하지만 산적은 불의의 사고로 죽었고 어머니는 남편과 아들과 목숨까지 모든 걸 잃었다. 벗과 벗의 어머니가 만든 삶의 의미는 뭐였을까, 그 생각을 하니 슬프고 억울했다.  


“분극의 밤이 왜?”  

“그냥 누군가가 덤으로 얹어 준 시간 같아서.” 아내가 대답했다.  


‘덤’, 바닥으로 툭 하고 던져진 것 같은 그 단어가 이상하게 위로처럼 들렸다. 슬프고 무력했던 시간들에 대한 위로.  

 기억은 챙이 넓은 녹색 린넨 모자를 비뚜름하게 쓰고 찍은 어머니의 영정사진으로부터 출발해서 부고를 알려줬던 노란 카카오톡 단톡방을 지나 작년 여름의 후덥지근했던 섬망과 함께 혼란스러워졌다. 다시  시간을 훌쩍 넘어서 동준 기념식장에서 읽었던 추모의 글과 함께 울먹거리고, 어머니의 오열과 함께 벽제 화장터에서  줌의 재로 변했다. 한동안 나는 재가 돼버린  시간 속에서 무력했다.  


“덤?”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신 핸드폰에 있는 전화번호 옮기면서 봤는데 임동준 번호가 아직 있더라. 어머님 전화번호도 있던데?”


최근 아내는 새로운 애플 계정을 만들어 로그인하면서 예전 주소록이 전부 사라졌다. 그래서 틈틈이 내 핸드폰에서 자신이 아는 사람의 전화번호를 복사해 옮기고 있는 중이었다.  


“당신은 죽은 사람 번호가 왜 필요해?”  


아내는 중요한 결정 기다리는 사람처럼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적당한 이유가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사라지면 안 될 것 같아서.” 잠깐 뜸을 들인 후에 대답했다.  


아내가 핸드폰을 내게 건넸다.  


“그런 게 덤인 것 같아. 사라졌지만 사라지면 안 될 것 같은 것.”  


다시 의대 강당이다. 산적은 강당 입구에서 헬멧을 쓴 남자로부터 ‘행운각’이라는 글씨가 궁서체로 붉게 쓰인 철가방을 받고 돈을 건넨다. 붉은 카펫이 깔린 비탈진 통로를 성큼성큼 내려와서 무대 위에 철가방을 ‘턱’ 올려놓는다. 철가방 뚜껑을 위로 휙 잡아당겨서 빼더니 “자,” 하는 추임새와 함께 카드를 나눠주듯 플라스틱 그릇을 각자에게 스르륵 밀어준다.  

흰색 플라스틱 그릇을   표면에는 물방울이 몽글몽글 맺혀 있다. 우리는 의식을 치르듯 검은 짜장 소스를 면이 담긴 그릇에 끼얹고 나무 젓가락을 쪼개서 휘적휘적 비빈다. 산적은 부먹인지 찍먹인지 묻지도 않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물컹한 뜨거운 탕수육 소스를 고기 튀김 위로 함부로 붓는다. 짜장면과 탕수육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무대 위에 옹기종기 앉아 있는 우리에게 느리게 스며든다. 그가 아니었으면 경험할  없었을, 사라지지 않는 ‘ 시간. 삶의 의미는 ‘ 아니라 내가 맺은 관계로 만들어진다는 단순한 진실을 새삼 깨닫는다. 산적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반백 년의 삶을 영위한 모든 이들도.





2022년 25주년 재상봉에 부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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