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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의 변화 Sep 24. 2022

추모사

1부 쓰기 전

추모사


내 바람과 달리 본과 3학년 동안 내내 그리고 4학년 초반까지도 신문사를 들락거렸다. 독후감, 영화평, 음반평과 어쩌다가 문화시평을 썼고 다른 사람들이 쓴 원고를 받아서 교정하고 사진을 찾고 소제목을 뽑았다. 신문을 몇 번 내고 나니 타자를 전혀 치지 못했던 내가 어느새 분당 사백 타 정도를 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듬해 봄 나는 신문사에서 도망쳤다. 더 이상 거기 있다가는 의사가 될 수 없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석 달 정도 연락을 끊었더니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 당시를 생각하면 미안하긴 하지만 어쨌든 본과 4학년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의사국가고시에 합격하는 거였다.

일 년 동안 신문사에서 여러 종류의 글을 썼지만 쓸 때마다 항상 어려웠다. 타자 속도가 느는 것처럼 금방 늘지 않았다. 새로운 책, 새로운 영화, 새로운 음반, 매번 새로운 글이었고 쉬운 건 없었다. 박한수처럼 술술 잘 읽히는 글을 마감에 딱 맞춰서 쓰고 싶었지만 막상 쓰려고 하면 늘 처음 시작할 때처럼 어렵기만 했다.


졸업식을 앞두고 당시 4학년 대표였던 태용이 내게 부탁할 게 있다고 했다.  

“졸업생 대표로 글을 써서 읽어야 하는데 알다시피 글은 젬병이라. 너는 그래도 쫌 쓰지 않냐?”

원래 졸업식 행사 때 공연하기로 했던 분극의 밤 앵콜 공연은 여러 사람들의 반대로 취소됐다. 우선 출연 배우들이 난색을 표했다. 대사를 다시 외워야 했고 산만한 졸업식장에서 공연을 하는 것을 별로 탐탁치 않아 했다. 사실 내가 보기에도 졸업식과 연극은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태용의 졸업식 준비를 돕고 싶었다. 그래서 결국, 써보기로 했다.

“오호, 좋은데. 어디더라, 그래 여기! 손에 묻은 추위를 입김으로 녹이며, 좋아 좋아.”

태용이 내 원고를 읽더니 너무 좋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다음엔 더 멋진 걸 써주마.”

언젠가 태용에게 줬던 그 원고를 읽은 적이 있다. 나쁘지는 않았지만 태용이 그토록 칭찬을 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졸업식 행사는 무사히 끝났고 그날 나는 태용을 만나서 교정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었다.

“야, 나도 같이 찍자”

의과대학 정문 앞에서 검정색 졸업가운을 입고 사각모를 든 채 얼쩡거리고 있던 정태가 우릴 보고 알은 체를 했다. 그날 나와 태용과 정태는 의대 도서관에서 의과대학 정문으로 내려가는 비탈길에서 멀리 굴다리 위 기찻길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키가 제일 컸던 태용이 가운데 서서 나와 정태에게 어깨 동무를 하며 찍었다.   


내 모든 이야기는 돌고 돌다가 자꾸 그 시간에서 멈춰 선다. 불행한 소식을 전하는 우편배달부처럼 불안한 표정으로 거기 서있다. 그 시간을 벗어나서 한참을 달린 뒤 숨을 헐떡이면서 뒤돌아봐도 어느새 그 시간이 뒤통수에 바짝 다가와 있다. 사라지지도 지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는 시간.  

“이런 사진도 있었네?”

언젠가 여기저기에 있는 사진들을 정리해서 앨범에 넣다가 아내가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사진이었다. 유정태는 98 여름에 김태용은 99 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공포영화 속에 숱하게 등장하는 클리셰처럼 사진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오직  혼자뿐이었. 내가 태용에게 약속했던 글은, 비록 그는 들을 수도 읽을 수도 없었지만, 그의 장례식을 위해서  추모사가 됐다.  때론 삶은 무자비하고 무차별적이다.

그래서  나는 이야기한다. 고로, 당신은 존재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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