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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의 변화 Sep 28. 2022

로미오와 줄리엣(2)

1부. 쓰기 전 

로미오와 줄리엣


나는 연극을 준비하는데 오래 걸리는 편이어서 연습을 하기 서너 달 전부터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시간 날 때마다 예술의 전당 자료실에 들러 공연과 관련된 문헌을 읽고 영상자료를 보았다. 상영됐던 영화들과 셰익스피어의 다른 작품들의 공연 영상을 이것저것 찾아서 봤다.

다른 작품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을 영화나 연극으로 본 사람은 많지만 대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사람은 아마도 많지 않을 것이다. 덧붙여 그들 중에서 공연 시간에 대해서 생각해 본 사람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BBC에서 제작한 셰익스피어 시리즈를 보면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그냥 영국에서 만드는 평범한 시리즈였는데  <로미오와 줄리엣>의 러닝타임이 자그마치 여섯 시간이 넘었다. 참고로 나는 이틀에 걸쳐서 겨우 다 봤다. 대본에 나온 대사 토씨 하나 빼먹지 않고 공연하는데 걸린 시간이다. 방송이 아니라 공연을 하는 경우에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아마도 우리가 보는 연극은, 다른 셰익스피어 작품들도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절반 이상을 편집한 걸 보는 것이다. 대체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관객들은 이 끔찍하게 긴 연극을 어떻게 봤을까? 요즘 사람들이 주말이나 휴가 때 찜한 드라마를 며칠에 걸쳐서 정주행하듯 그런 식으로 봤던 걸까.


내 기준에서 연극을 재밌게 볼 수 있는 러닝타임 최대치는 두 시간이다. 다른 연출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 이상은 자신이 없었다. 결국 대본의 대부분을 없애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할 일이 갑자기 많아졌다. 연습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삼 주 정도였다.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했다가는 축제는커녕 끔찍하게 지루한 블록버스터가 될 것이 뻔했고, 무작정 줄인다면 아무 특색 없는 학예회 수준의 재롱잔치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여섯 시간짜리 <로미오와 줄리엣>을 본 후 한 사흘 정도 고민을 했다. 새로운 연극을 위해서는 뭔가를 해야 했다. 결국 남은 시간 동안 도서관에 처박혀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각색해 보기로 했다.


각색은 처음 해보는 작업이었지만 마감에 쫓기면서 쓰는 독후감과는 전혀 달랐다. 엄청나게 새로운 걸 써내지는 못했지만. 새로운 걸 창작한다는 순수한 기쁨이 있었다. <문학 속의 의학>을 쓰는 동안은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이었다.

존과 로렌스 신부를 이야기의 중심부로 끌어오고 시간여행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현재와 과거를 연결했다. 인물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임무와 갈등이 있어야 했다. 존은 로렌스의 편지를 로미오에게 전달하는 임무 때문에 로렌스와 충돌한다. 존 신부는 죽음을 통한 사랑의 완성이 부당하다고 항변하고 로렌스는 두 가문의 화해를 위해서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설득한다.      


로렌스 신부 존경하는 존 신부님. 믿기지 않겠지만 저는 ‘로미오와 줄리엣’에 등장하는 로렌스 신붑니다.

잘 지내고 계시지요? 저에게 한없이 많은 시간이 있다면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끝도 없이 적겠지만 그렇지가 못하군요. 

당신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해서 쓰여졌습니다. 원수지간인 두 가문 캐퓰렛가와 몬태규가는 실제로 존재했고 로미오와 줄리엣 역시 실존 인물들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과거의 시간 속에서 오류가 생겨 두 젊은이의 희생이 두 가문의 화해를 낳기는커녕 오히려 극단적인 반목을 낳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정반대의 결과가 생긴 것은 존 신부가 편지를 로미오에게 전했기 때문입니다. 편지를 받은 로미오와 가사 상태에서 깨어난 쥴리엣은 도망갔지만 금방 잡히게 됩니다. 로미오는 캐퓰렛가의 사람들에게 죽게 되고 쥴리엣은 몬태규가의 사람들에게 죽게 됩니다. 그리고 두 가문은 영원히 철천지 원수로 지내게 됩니다. 

이 비극을 원상태로 되돌릴 수 있는 사람은 당신 뿐입니다. 두 개의 시곗바늘이 합쳐지는 순간. 12시를 알리는 종이 울리면 빛이 당신을 저의 암자로 데려갈 것입니다. 그리고 6시가 되면 다시 현실로 옮겨 줄 것입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계속)

30회 정기공연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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