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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의 변화 Sep 29. 2022

로미오와 줄리엣(3)

1부 쓰기 전 

로미오와 줄리엣


각색을 마치고 도서관을 나서니 밖은 컴컴했다. 하지 무렵이었으니 아마도 여덟 시 이후였던 것 같다. 그날 탈고를 자축하기 위해서 맥주집 ‘섬’에 들렀다. 만날 사람이 있었다. 경기도에서 공보의로 일하고 있던 후배 신영기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감독에게는 자신의 페르소나와 같은 배우가 있다고 한다. 만약 내게도 그런 게 있었다면 그건 영기였다. 중저음의 발성이 풍부한 목소리, 귀에 팍팍 꽂히는딕션, 고집스런 인상. 내가 재창조해낸 로렌스 신부 역을 맡기기에 최적의 인물이었다.

“형, 일반 관객들은 원작의 세세한 부분을 모르는데 그게 사랑이든 화해든 상관이 있을까요?”

까칠한 놈, 찬물을 끼얹기는. 이미 탈고의 기쁨과 맥주에 취해서 반박할 논리를 생각해내기 어려운 상태였다. 내가 대답을 못하고 미간만 찌푸리고 있는 사이에 영기가 방언이 터진 집사님처럼 속사포랩 속도로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든지 아니면 사귀었다가 헤어진다든지 그 정도의 엄청난 변화가 있어야 하는 데 그렇지는 않잖아요.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바뀐 게 아니라 약간의 변화만 준 거여서 관객은 각색의 효과를 전혀 못 느낄 거예요. 어차피 전 상관없어요. 무조건 할 거니까요.”


한 달 반 정도가 지나서 첫 런쓰루를 돌렸다. 

러닝타임 세 시간. 첫 번째 런쓰루를 마치고 처음 든 생각은, 이제 어떡하지? 였다. 너무 길고 지루했다. 영기의 말처럼 각색의 흔적은 너무 미미해서 바닷물에 넣은 맛소금 수준이었다. 대체 2주 동안 도서관에서 뭘 한 걸까?

“어, 어떻게 알고 왔냐?”

그날 극회장과 기획이 ‘섬’에서 술마시고 있던 날 찾아왔다. 

“척하면 척이죠. 배우들이 아직 멀었죠?” 

대답 대신 맥주를 따라 줬다. 

배우들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란다. 내가 쓴 대본이!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차마 뱉지는 못했다. 자존심 때문이기도 했고 두 달 동안 파업 때문에 신경 날카로워진 선배들한테 욕먹으면서 공연 준비한 후배들에게 미안해서이기도 했다. 

“오빠, 앞으로 2주 남았으니까 희망을 가져요. 원래 우리가 뒷심이 강하잖아요.”

뒷심 할애비가 있어도 넘을 수 없는 게 있단다. 다시 대답 없이 맥주를 따라 주었다, 이번에는 기획에게.  

“지금도 재밌던데. 조금 길긴 하지.” 극회장이 해맑은 표정을 지었다. 

으이구, 센스 없는 놈. 그래도 재밌게 봐주니 고맙구나.

“길면 짜르면 되지.” 기획이 맥주를 단숨에 마셨다. 

머릿속에 뭔가 번뜩 떠올랐다. 그렇다. 짜르면 된다. 여섯 시간이 지루하면 세 시간으로 만들고 세 시간이 지루하면 한 시간 반으로 만들면 된다. 그날 이후 매일 대사를 지우고 런쓰루를 하고, 지우고 런쓰루를 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제외하고 모두 매일 대사가 줄어들었다. 주연 배우 둘은 본인들 대사가 많은 게 미안했던지 자신들의 대사를 알아서 줄여 왔다. 


일주일이 지나서 리허설을 돌리니 두 시간이 안 걸렸다. 처음에는 대사가 줄어서 의기소침하던 배우들도 점점 적응하면서 연기력이 좋아졌다. 진짜 기획이 말한 뒷심이 발휘된 걸까. 공연은 어땠냐고? 나는 재밌었지만 그건 너무 주관적이어서 믿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세 시간 보다는 두 시간이 백배 천배 나았다.      


존 신부  줄리엣의 방문이 있던 다음 날, 암자에서 아침을 맞았습니다. 조금 열린 창문 틈으로 엷은 여름 햇살이 기다렸다는 듯이 어두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밖에는 베로나의 여름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저는 문을 활짝 열고 한참 동안 넋을 놓고 보았습니다. 그날이 엄청난 비극이 시작될 전날이라는 것도 잊은 채. 

로렌스 신부는 이미 언덕이 하늘과 맞닿은 곳, 막 떠오른 태양의 중심부를 향해 터벅터벅 걷고 있었습니다. 마치 태양 속으로 사라지려고 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손에 편지가 있음을 의식한다.) 참,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편지는 전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전할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제가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겠다는 줄리엣의 용기가 절 감동시켰던 것일까요. 아니면 로렌스의 말처럼 역사가 요구하는 필연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을까요. 

글쎄요. 굳이 이유를 대라고 한다면 베로나의 태양 속을 걸어가고 있는 로렌스의 뒷모습 때문이었다고 말씀드려야겠군요.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평생을 모르는 척하며 살아야 하는 인간의 뒷모습, 그것이 그가 건넨 편지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었기 때문이라고.

(로미오와 줄리엣이 등장하여 무도회 장면을 재현한다.) 


(계속)

30회 정기공연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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