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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의 변화 Apr 25. 2023

개원(3)

개원했습니다.

블로그에 포스팅을 하면서 가뭄에 콩 나듯이 세 명의 환자를 보고 나니 오후 다섯 시가 됐다. 오후 다섯 시가 넘으면서 2층 로비를 지나다니는 학생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같은 층에 있는 수학학원에 다니는 학생들이었다. 교복을 입고 다크서클처럼 축 처진 커다란 백팩을 메고 무표정하게 병원 문 앞을 지나 좁고 기다란 복도를 따라서 들어갔다. 


누리는 원래도 가방에 잔뜩 넣어서 다녔는데 미술학원에 다니면서 더 심해졌다. 가방이 무거워지면서 말수는 더 줄었고 집에 있는 시간도 줄었다. 고3이 되기 전에 집에서 흔하게 볼 수 있던 풍경은 누리가 어두운 방에서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집에 있는 시간이 줄어들면서 그마저도 볼 수 없게 됐다. 내가 볼 수 있는 건 시간이 지나도 아무 것도 완성되지 않은 스케치북 뿐이었다. 지우고 또 지운 연필선과 바닥에 쌓인 지우개 가루와 함께.  


누리는 고등학생이 되면서 점점 더 도달할 수 없는 성에 사는 성주처럼 소통이 불가능하고 알 수 없는 존재가 되어갔다. 워낙에 아이들 마음속을 부모가 속속들이 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우주와 누리는 전혀 다른 이유로 알 수 없었다. 우주는 크고 작은 사고를 친 걸 수습하느라 마음속 심연을 파악할 수 없었다면 누리는 너무 조용해서 알 수 없었다. 우주의 심연으로 들어가는 길은 너무 시끄럽고 험난했고 누리의 심연은 안개가 자욱하고 한없이 아득했다.   


나는 지금도 밝고 환하게 깔깔대며 웃던 어린 시절의 누리를 상상하곤 한다. 그 시기에 누리는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에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아찔했던 순간이 있었다. 누리가 다섯 살 정도였을 무렵 부산으로 여름휴가를 간 적이 있었다. 다른 가족들과 함께 송정해수욕장에 갔는데 한창 휴가철이어서 백사장이 빽빽하게 피서객들로 가득 찼다. 우리는 바다에서 좀 먼 쪽에 자리를 잡았고 누리는 바닷가 근처에서 모래놀이를 했다. 내가 앉아 있던 파라솔과 누리 사이에 두 개 정도의 파라솔이 있어서 시야를 조금 가렸다. 누리를 한참 보고 있는 중에 누군가 지나가면서 내 시야를 십 초 정도 가렸다. 그런 후에 보니 누리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아무리 둘러봐도 없었다. 사실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둘러보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나와 아내를 포함해서 같이 온 모든 사람이 피서 인파를 헤치며 누리의 이름을 부르고 흩어져서 찾고 신고를 하고 난리 법석을 떤 후에 같이 온 내 친구가 찾았다고 전화를 했다. 아마 십오 분도 채 안 됐을 그 시간이 내겐 마치 열다섯 시간처럼 느껴졌다. 


ADHD 약을 먹던 초기에 완전히 상반된 두 명의 누리가 오전과 오후에 교대하며 빙의하던 시절도 떠올려보곤 한다. 잔뜩 풀이 죽어서 등교했던 누리는 학교에서 돌아와서 오후가 되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소파 위를 껑충껑충 뛰어다녔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조용한 누리만 남아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집에서만 누리를 보는 나와 아내로서는 ‘조용한’ 누리의 마음속을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중학교 1학년 때 누리가 ‘죽고 싶다’는 말을 상담 선생님에게 자주 한다는 얘길 들었을 때 그제서야 우리는 누리가 심각한 집중력 장애로 힘들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1년 뒤 경주 여행 마지막 날 약을 끊고 싶다고 얘길 했을 때 누리가 약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비록 결국 끊긴 했지만. 혹시 시끄럽고 수다스러운 누리는 여전히 송정 해수욕장을 헤매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말도 안되는 상상을 가끔 하곤 한다. 


아주 가끔 우주를 통해 누리의 학교생활에 대해서 들을 때도 있었다.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드문드문 불규칙하게 학교를 나가던 때의 일이다. 아마도 우주가 재수를 하고 누리가 고2 때의 일일 것이다. 우주는 누리를 항상 못마땅해 했지만 고3이 되면서는 누리에게 부쩍 살갑게 대했다. 

가끔 내가 학원에 차로 데려다 줄 때가 있었는데 그런 날 중의 하루였을 것이다. 

“아빠, 누리 지갑에 원래 얼마 있었는지 모르지?” 뒷좌석에 앉아 있던 우주가 물었다. 

“모르지.” 

“나오면서 내가 봤을 때는 돈이 많이 비는 것 같지는 않던데. 그럼 내 얘기가 전달이 잘 된 건가?” 우주가 뒷좌석에서 혼잣말하듯 얘기했다. 

“누리한테 돈 빌렸니?”

“아빠는 내가 다른 사람 전자담배를 쓰다가 잃어버렸다면 얼마를 물어줘야 한다고 생각해?” 

“전자담배 가격만큼 물어주면 되지 않을까? 다른 사람 거 잃어버렸니?” 

“아니. 그건 아니고. 하! 그 쉐끼 생각할수록 완전 쌩 양아치 새끼네.”

우주가 들은 바에 의하면 누리가 교실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서 선생님에게 드렸는데 그게 하필 전자담배 기계였고 그 소식을 들은 기계 주인이 완전 빡 돌았다는 것이다. ‘빡 돌은’ 그 아이는 누리에게 전자담배값의 네 배가 넘는 금액인 25만 원을 요구했다고 했다. 

“근데 넌 그걸 어떻게 알았어?” 

“그 새끼랑 내 친구랑 아는 사이여서 걔한테 들었지. 기계값 육만 원 정도 달라고 했으면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25만 원이라니. 양아치 새끼! 누리 형이 우주라는 걸 꼭 얘기해주라고 했으니까 알아 처먹었겠지. 수험생인 내가 왜 그런 거까지 신경 써야 돼!”

우주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면서 괴로운 시늉을 하며 누구한테 하는 얘기인지 알 수 없는 푸념을 했다. 

고등학생이 돼서도 누리의 사회성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코로나 팬데믹이 사회성이 전혀 없는 누리에게는 다행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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