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차를 팔았다. 탁송기사가 몰고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찍은 모습이다.
거의 십 년에 한 번 차를 바꾸다 보니 30대는 아반떼 XD, 40대는 CRV와 보냈던 것 같다. 아반떼를 팔던 날 큰 아이가 너무 큰 소리로 엉엉 울어서 깜짝 놀랐던 게 기억난다. 요즘 큰 아이는 차를 파는지 어쩌는지 관심도 없지만 내 기분은 당시 큰 아이의 기분처럼 허전하고 울적하다.
CRV를 샀던 때가 기억난다. 당시에 프로야구 선수가 꿈이었던 큰 아이를 태우고 남양주의 컨테이너 박스 안에 마련된 훈련장으로 자주 데려다 줬다. 그 때 잠깐 , 진짜 아주 잠깐이었지만, 큰 아이가 야구 선수가 되는 꿈을 꾸었다.
큰 아이는 중학생이 되면서 더 이상 야구 선수가 되고 싶어하지 않았다. 아무 것도 되고 싶지도, 하고 싶지도 않은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그 긴 암흑기 동안 CRV는 아파트의 주차장을 하루 종일 지키고 있을 때가 많았다. 병원 동료들은 내가 차를 너무 안 몰고 다녀서 '혼다'가 아니라 '논다' 라고 놀리곤 했다.
용촌으로 옮긴 후에는 출퇴근 거리가 길어져서 비교적 장시간 운전을 하는 일이 많아졌다. 십만 킬로미터를 넘는 마일리지의 대부분은 아마도 용촌에서 일하기 시작했던 2016년 이후의 몫일 것이다.
이 차를 가지고 있는 동안 두 아들의 사춘기가 폭풍처럼 때로는 암흑처럼 지나갔다. 큰 아이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공부를 해보겠다고 해서 미친 듯이 공부를 하던 시기에는 가끔 학원을 데려다 주기도 했다. 그 시절의 큰 아이는 하루 종일 아무하고도 얘기하지 않고 지내서 그랬는지 학원에 도착할 때까지 보조석에 앉아 쉴 새 없이 미주알고주알 많은 말을 했다. 소란스럽지만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큰 아이의 수능 시험이 끝나고 모든 가족이 살바도르 달리의 전시회를 보러 갔던 일요일도 기억난다. 그 순간은 달리의 그림처럼 낯설고 초현실적이었다. 너무 일상적이고 평범해서 오히려 낯설었던 행복했던 순간의 그 모든 날들처럼 그랬다.
아무런 불안도 아무런 걱정도 없었던 군의관 시절처럼, 두 아이가 태어나서 자랐던 자목련 백목련이 만발했던 자운대처럼, 환호와 흥분으로 가득했던 멜빌의 옷세고파크처럼, 바닷물 위로 햇살이 알알이 쪼개지던 롱아일랜드 해변에서 보낸 어느 평범한 여름 날처럼 그날은 나와 아내 모두에게 낯설고 비현실적이었다.
차는 출발했고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전부는 아니지만 그 시절이 CRV와 함께 조금 묻어서 떠나갔다, 어제 오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