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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의 변화 Oct 17. 2023

한국어사전(1)

의사는 국문학수업이 필요없나요?

한국어 사전 


내 처음이자 마지막 부임지는 국군대전병원이었다. 국군대전병원은 자운대라고 하는 지역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곳에는 육해공군 대학, 군의학교, 간호사관학교를 포함한 학교들 그리고 몇 개 부대가 함께 있었다. 자운대라는 이름은 자운동이라는 지명에서 나왔는데, 두 가지 ‘자운’의 한자가 차이가 있다. 자운대의 한자는 ‘紫雲’ 자줏빛 구름이고 자운동의 한자는 ‘自雲’ 스스로 구름이라는 의미이다. 

4월에 임관을 하고 자운대로 들어서면서 자줏빛 구름의 의미를 알게 됐다. 위병 초소를 지나 관사 아파트로 향하는 길옆으로 자목련 나무들이 쭉 이어져 있는데 주먹만한 꽃들이 활짝 피어 있는 시기에는 (조금 과장하면) 자줏빛 구름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줏빛 구름이라는 이름이 1992년 이 지역이 군지역이 되면서 붙인 이름이기 때문에 아마도 당시에 자목련 나무들을 길가에 심고 나서 자줏빛 구름을 뜻하는 한자를 붙이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내 생각에 그렇다는 얘기다. 대체 스스로 구름이라는 건 무슨 뜻일까?

“최 대위, 뭐하냐?”

호종이 응급실 당직실 문을 벌컥 열더니 나를 불렀다. 

“뭐야? 할 일 드럽게 없는 모양이구만 왜 국어사전을 읽고 자빠졌어.”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국군대전병원의 응급의학과 군의관은 할 일이 별로 없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신체 검사를 통해서 뽑은 건강한 이십 대 청년들이 심각하게 아플 일이 있을 리 없었고, 전시가 아닌 평시에 군병원의 응급실이 민간 병원처럼 북적거린다면 그건 군대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몇 달 전만 해도 하루에 이백 명에 가까운 환자를 보면서 시도 때도 없이 심폐소생술을 땀을 뻘뻘 흘리면서 하다가 하루에 네댓 명 정도 되는 지극히 경미한 환자들을 보는 곳에 오게 되니 남아도는 게 시간이었다. 주체할 수 없이 시간이 남는다면 뭘 하는 게 좋을까. 당시에 내가 처음 선택한 건 책읽기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이 시기에 글쓰기를 연마해야 한다는 생각이 어렴풋하게 들었다. 한동안 뭐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고민하다가 군대에 있을 때 ‘국어사전을 읽고 단어장을 만들면서’ 작가로서의 기초를 다졌다는 소설가의 약력을 보면서 깨달았다. 그래 국어사전을 읽는 거야. 

국어사전을 틈틈이 읽으면서 단어 노트를 만들고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 원고지 열 장의 원칙을 지키면서 쓰다 보니 여전히 완성하는데 오래 걸렸지만 글이 한 편씩 쌓일 때마다 글쓰기 능력치 그래프가 조금씩 올라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당시에는 응급의학과 의사로서 배워야 할 수많은 술기들처럼 글쓰기도 ‘특별한’ 의사가 되기 위한 기술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전을 덮고 호종을 쳐다봤다. 

“웬일이셔?”

“당직 좀 바꿔 주라.”  

내과 군의관이었던 호종은 당시에 미혼이었는데 여자 친구를 만나러 서울로 올라가야 하니 일요일 후송 당직을 바꿔 달라고 했다. 응급실 당직은 응급실 야간근무를 서는 거였고 후송 당직은 상급병원으로 후송 갈 환자가 발생하면 동행해야 하는 일이었다. 나호종 말로는 후송 당직이 병원에 불려 나올 확률은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라고 했다. 국군대전병원이 대전 이남 군병원 중에서 최상급 병원이어서 웬만해서는 상급의료기관으로 후송 갈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9월에 태어난 우주가 아직 백일이 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차피 주말에도 멀리 갈 일은 없었다. 호종의 부탁을 흔쾌히 수락했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일 줄이야. 일요일 낮에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입원환자 중에 서울로 헬기 후송 갈 환자가 있으니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환자야?” 

당직실에서 TV를 보고 있던 응급실 당직 준석에게 물었다. 옆에 앉아 있던 진료부장이 심드렁하게 나를 쳐다보더니 손을 들어 알은체를 했다.

“근처 전투비행단에서 나흘 전에 경막하뇌출혈로 전원 와서 응급수술했는데 아직 코마야. 보호자들이 병원장실 가서 서울로 보내달라고 쌩난리를 쳤나봐. 깨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지만 그래도 어쩌것냐, 부대에서 다쳐서 죽게 생겼는데 보호자 말 대로 해 줘야지.”

TV에서는 영화 <미드웨이>가 끝나가고 있었다. 엔딩 크레딧이 내려올 때 준석이 TV를 껐다. 신경외과였던 준석은 전쟁사 개인홈피를 운영할 정도로 엄청난 전쟁과 무기에 관한 지식을 가진 이른바 밀덕(밀리터리 덕후)이었는데 당직 때마다 할리웃 전쟁영화를 가져와서 보곤 했다.

“어떻게 다쳤는지 못 들었지?” 준석이 담배를 꺼내서 불을 붙였다. 

“요즘에 2층 독방 앞에 헌병이 보초 서고 있는 거 봤어? 거기 갇힌 놈이 가해자야. 정신감정 받으려고 후송된 거래.”

“정신감정?”

준석이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진료부장을 쳐다봤다. 진료부장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더니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 새끼 지난 달에 신병으로 배치됐는데 완전 싸이코야. 사회에 있을 때도 분노조절장애 비슷한 게 있어서 한두 번 상대방을 심하게 다치게 한 적이 있었나 봐. 이후로는 그런 일이 있으면 자신이 그 상황을 알아서 피해 다녀 별문제가 없었는데 군대는 빼박이잖아. 

피엑스병이었는데 선임이 교육한다고 몇 번 갈구니까 그냥 벽돌로 머리를 찍었어. 두피에 여러 군데 상처가 있는 거 보니까 여러 번 내리쳤을 것 같아. 그리고 이 미친 새끼가 피엑스에 불도 질렀어. 사람이 없는 시간이었기에 망정이지. 다행히 화상 피해자는 없었어. 심신미약으로 빠져나가려고 정신감정 해달라는 거겠지. 미친놈인 건 맞지만 살인하는 놈 중에 제정신으로 하는 놈이 있겠어?”

진료부장이 중환자실에 전화를 걸어서 후송 준비가 잘 되고 있는지 확인했다.

“의무병은?”

“권상욱”

“엉뚱하지만 재밌지.” 

진료부장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가운 말고 겉옷도 가져가. 수송 헬기가 공군이지? 공군 애들은 목적지까지 데려가긴 하지만 데려오지는 않는다는 얘기가 있어. 군의관을 기다려 줄 만큼 기름이 여유가 없다나 어쨌다나. 지갑도 가져가고.”

11월이어서 밤에는 날씨가 제법 쌀쌀했지만 설마하니 진짜로 데려다 주기만 하겠냐는 생각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숙직이었던 의정장교 박중위한테 물어보니 절대 그럴 일 없다면서 자기가 공군부대에 연락을 해놓겠다고 했다. 시간이 충분히 있었지만 다시 집으로 가서 외투를 가져오는 건 너무 귀찮았기 때문에 결국 달랑 랩가운 하나만 걸치고 헬리콥터에 올랐다.

오후 4시 무렵 국군대전병원 지상 헬리콥터 착륙장에 도착했다. 준석이 보더니 ‘휴이’라는 별명을 가진 UH-1 헬리콥터라고 했다. 나와 권상욱이 이송용 들것에서 헬리콥터 안으로 환자를 옮겼다. 11월의 저녁은 쌀쌀했고 헬리콥터의 프로펠러가 일으키는 바람 때문에 더 쌀쌀했다. 헬기를 타고 가는 동안 진동과 소음이 심했다. 헬리콥터 조종사 중에는 소음성 난청 환자들이 많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었던 기억이 났다. 예전에 읽었던 <후송>에서도 소음성 난청 환자가 주인공이었는데······ 군인들의 직업병인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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