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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의 변화 Jul 24. 2023

7월에 스며드는 유전(遺傳)

아버님의 구순연(九旬燕)에 부쳐

7월에 스며드는 유전(遺傳)


2000년 12월 2일 저희 부부는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집이었던 햇빛마을 아파트로 돌아왔습니다. 신혼여행지였던 발리로 떠나는 비행기가 그날이 아닌 다음 날 아침에 출발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옷을 갈아입고 식탁에 앉아 있을 때 아내가 짐짓 나무라는 투로 제게 말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어쩜 그렇게 밥을 잘 먹어?” 

생각해보니 아버님도 어머님도 아내도 거의 먹지 않고 남겼다는 걸 그제서야 깨달았습니다. 그 방에서 제공된 식사를 모두 비운 사람은 저밖에 없었죠. 당시에는 전혀 이유를 몰랐습니다.

“어······”

저는 영문을 몰라 눈이 동그래졌습니다. 

“아까 결혼식 끝나고 준비실에서 아버지가 하신 얘기 못 들었어?”

원래 제 취미가 카페나 식당에 앉아서 남의 말 엿듣기인데 그날만큼은 그렇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그곳이 카페도 아니었고, 장인 장모님이 더 이상 남도 아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뭐라고 하셨는데?” 제가 눈치를 슬슬 보면서 무심한 척 물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내 방이 모두 치워진 걸 보고 가슴 한켠이 허전했다고 하셨잖아” 

아내의 눈시울이 약간 붉어졌습니다. 

저는 아버님이 하신 말씀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마치 생각난 것처럼 기계적으로 고개를 주억거렸습니다. 제가 기억나지 않았던 이유는 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아마도 아버님의 목소리에 담긴 무덤덤함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전혀 눈치챌 수 없었지만 아내는 그 무덤덤함 속에 담겨있는 희미한 슬픔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 순간으로부터 이십 년 넘는 세월을 부부로 함께 살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아내가 아버님을 많이 닮았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그날 제게는 무신경하게 들렸던 그 허전함도 아내에게는 쉽게 전달됐던 것 같습니다.      


저는 아버님과 직접 이야기를 나눈 적이 별로 없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아버님에 대한 인상은 대부분 아내에게 들은 이야기로부터 만들어진 것입니다. 

언젠가 아버님이 머리를 식히기 위해 취미 삼아 수학 문제를 풀곤 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문제 풀이로 빼곡한 칠판 앞에 서 계신 아버님의 모습을 떠올려보곤 합니다. 그리고 숫자가 흐르고 기호가 날아다니고 원기둥과 직육면체가 들쭉날쭉 무성한 수학의 숲을 거니는 아버님의 모습도 상상해보곤 합니다.      


저는 봉투에 적힌 아버님의 반듯한 글씨를 볼 때마다 아버님이 하셨다는 아르바이트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가난 때문에 해야 했던 일과 가난해서 할 수 없었던 일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학비를 벌기 위해 하셨다는 대필과 저는 생전 해본 적도 없는 농사일을 떠올려 봅니다. 아버님이 또박또박 써 내려간 무수한 글자들과 겨울을 나기 위해 쪼갠 장작이 수북이 쌓여있는 더미들도 떠올려 봅니다. 가난했던 전쟁통의 한국과 그만큼 가난했던 아버님의 집과 가난한 집안보다 더 작고 메마른 아버님의 모습이 제 머릿속에서 닮은꼴처럼 겹쳐집니다.      


비록 이제는 사라졌지만, 연애 시절 버스에서 내려 함께 비탈길을 걸어 올라 도착했던 초록색 철문이 있는 오래된 이층집을 떠올려봅니다. 철문을 열고 시멘트로 된 계단을 내려가면 자그마한 정원이 있었습니다. 푸르스름한 수국과 하얀 라일락과 붉은 열매가 빽빽하게 매달린 앵도나무가 자라던 그곳에서 비가 오면 아버님이 빗물을 받기 위해 벽돌색 고무 양동이를 정원 곳곳에 놓았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빗줄기와 푸르게 상승하는 식물들과 수평으로 채워지는 양동이 속의 투명한 빗물을 상상했습니다. 땅 밑으로 뿌리를 뻗는 나무들과 흙 위로 떨어져 느리게 스며드는 빗물도 상상했습니다. 아버님으로부터 시작돼 자손들에게 전해지는, 스며드는 빗물과도 같은 그리고 땅 밑으로 뻗어 내려가는 뿌리와도 같은 유전(遺傳)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님, 

장작처럼 단단하고 글자처럼 반듯한 성품을 물려주셔서 

작고 메마른 가난을 극복하는 성실함을 가르쳐주셔서

정원처럼 자그맣고 빗방울처럼 투명한 검소함을 보여주셔서 감사드립니다.      


2023년 

유난히 비가 많이 내리는 7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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