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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의 변화 Oct 17. 2023

한국어사전(2)

의사는 국문학 수업이 필요없나요?

한국어사전


인천의 병원, 아니 항구의 착륙장까지는 40분 정도 걸렸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에어울프는 영화 속에서나 존재하는 거야, 준석의 말에 따르면 특수하게 개발된 헬리콥터가 아닌 경우에는 보통 시속 200킬로미터를 넘지 않는다고 했다. 착륙하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구급차로 환자를 옮겼다. 차 속에서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돌아올 때까지 헬리콥터가 과연 그 자리에 있을까. 왜냐하면 헬기에서 내릴 때조차도 조종사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옮기세요’와 ‘내리세요’ 외에 나와 상욱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금방 돌아온다고 생각했더라도(전혀 그랬을 것 같지 않지만) 언제 오는지 정도는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었을까. 

병원에 환자를 인계하고 구급차를 타고 다시 착륙장으로 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헬리콥터는 없었다. 구급차 운전사도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위를 몇 번 돌았지만 헬리콥터는 없었다. 결국 차는 돌려보내고 나와 권상욱만 남았다. 

“야! 환자만 후송하면 다야. 대전까지 걸어가라는 거야.” 

박 중위가 쩔쩔매며 죄송하다는 말을 연발했다. 열받은 내가 한참 퍼붓고 나니 충전 상태가 간당간당했던 휴대폰이 얼마 있다가 꺼져버렸다. 진료부장 말 대로였다. 헬기가 가버린 게 박 중위 탓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공군에 전화로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인천항의 바닷바람은 매서웠다. 나는 하얀 가운을 오른팔에 끼고 오들오들 떨었다. 그나마 지갑이라도 챙겨온 게 다행이었다. 

“차편 보내주겠다고 합니다. 앞으로 세 시간 정도 걸리지 말입니다.”

공중전화 박스에서 나온 상욱의 표정이 밝았다. 하긴 상욱 입장에서는 주말에 내무반에 처박혀 있는 것보다는 바깥 바람 좀 쐬다가 들어가는 게 전혀 나쁠 게 없었다.

“놀다가 들어가니 좋냐?”

“아니지 말입니다. 근데 최 대위님, 부대 가서 저녁 먹습니까? 도착하면 열 시 넘지 말입니다.”

“빨리 아무 데나 들어가자.”

상욱이 내 눈치를 슬쩍 살폈다. 어차피 딱히 할 일도 없었고 연락을 받으려면 핸드폰 충전을 해야 했다. 근처 횟집에 들어가기로 했다. 수조가 깨끗해 보이는 아무 식당을 골라 들어갔다. 방어회가 제철이라고 해서 회와 소주를 시켰다. 

“저 술 마시면 안 되지 말입니다.”

“어차피 한 병 가지고 나눠 마실 거야. 병원 도착할 때쯤 다 깬다.” 

딱 두 잔을 마셨을 뿐인데도 상욱의 얼굴이 벌게졌다.  

“헬기가 가버린 게 차라리 나았지 말입니다.” 

“왜?” 

“추락하는 일도 많고 위험하지 말입니다. 오늘 진짜 무서워 죽는 줄 알았습니다.” 상욱이 한숨을 크게 쉬며 오른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참, 그깟 헬기 한 번 탄 것 가지고.  


상욱은 이번 일을 계기로 새삼 신병들이 무서워졌다면서 예전에 있던 부대에서 있던 일을 얘기해 줬다. 

“예전에 저희 내무반에 이상한 신병이 들어온 적 있지 말입니다. 들어온 첫날부터 귀신을 본다고 하길래 무슨 또라이 새끼인가 싶어서 제발 그 얘기 아무한테도 하지 말라고 그랬지 말입니다. 헛소리 같았고 어차피 간부들에게 그런 얘기 해 봤자 관심 사병으로 찍혀서 완전 골치 아파지지 말입니다. 

어느 날 저희 부대가 옆 부대로 가서 사격 훈련하는 날이 있었습니다. 점심 먹고 신병이랑 같이 화장실에 갔는데 걔가 가운데 칸 양변기 화장실 문을 물끄러미 보면서 줄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무슨 얘기냐고 했더니 그냥 줄이 보인다고만 했습니다. 이 또라이 새끼 또 시작이구나 싶어서 개소리하지 말고 다른 칸에서 똥 싸고 빨리 복귀하라고 했지 말입니다.”

상욱이 서비스로 준 콜라를 벌컥벌컥 마셨다. 

“근데 말입니다. 제가 그날 이후에 혹시나 해서 그 부대 행보관에게 화장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지 말입니다. 근데 진짜 목매달아 죽은 사건이 있었지 말입니다.”

“신병은 어떻게 됐어?” 내가 눈이 동그래져서 물었다.

“작년 겨울에 논산 신병훈련소장 바뀐 다음에 그쪽 훈련이 완전 빡세졌지 말입니다. 그러면서 겨울에 심한 폐렴환자가 많이 왔었습니다. 두 달 동안 거의 매주 한두 명 씩 죽어 나갔지 말입니다. 신병이 중환자실 소속이었는데 그때 좀 이상해졌습니다. 본근대에서 밤마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 막 소리 지르고 그래서 행보관하고 얘기해서 환자 안 보는 보직으로 뺐습니다. 걔 전역한 지 얼마 안 됐지 말입니다.”

소주를 한 병 더 시켜서 절반 정도를 남기고 식당을 나와서 당구를 쳤다. 어차피 게임비는 내가 내야 했지만 너무 상대도 안 되게 졌기 때문에 내기를 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근처 부대에서 배차해 준 쓰리쿼터 트럭을 타고 열 시가 조금 넘어 집에 도착했다.  


포대기에 폭 싸인 채 우주가 자고 있었다. 자고 있는 아내와 아기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당시의 나는 가끔씩 이유 없이 불안하곤 했다. 좋은 부모가 되지 못할 것 같았고, 군대에 있는 삼 년 동안 아무 것도 배우는 것 없이 푹 썩을 것만 같았고, 전역해도 아무 병원에서도 나를 불러주지 않을 것 같았고, 끝내 평범하게 늙어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오늘 후송을 간 병사처럼 무자비하고 무차별적인 괴물 같은 운명이 갑자기 나를 덮칠 것만 같았다. 상욱이 말했던 귀신 보는 신병이 떠올랐다. 그 신병은 진짜 죽은 사람을 보았던 걸까. 매주 폐렴으로 죽어 나가는 신병들을 보았을 그를 상상하니 끔찍했다.  

3주 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향년 81세. 너무 적지도 많지도 않은, 하지만 아쉬운 나이였다. 일 년만 더 사셨어도 증손자를 보여드리러 갈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치매여서 내가 누군지 알아보시지도 못하셨지만. 고모 말로는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는 할머니께서 아직 집이 안 만들어졌다고 하셨는데 전날은 집이 모두 지어져서 이제 갈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기독교인이었던 고모는 (할머니도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천국의 집을 생각하면서 얘기했지만 나는 우주의 이름 속에 들어 있는 두 채의 집[집 우(宇)와 집 주(宙)]을 생각했다. 할머니는 증손자 우주의 존재를 전혀 몰랐다. 하지만 어쩌면 상상을 초월한 방식으로 알고 계셨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귀신을 보는 신병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서울에서 장례식을 마치고 대전으로 내려오는 날 경부 고속도로 위로 첫눈이 소복소복 내렸다. 다음 날 아침 자운대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금병산이 온통 하얬다, 마치 스스로 구름이 된 것처럼.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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