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논문을 쓰면서 Conflict of interest(이해충돌), IRB(임상연구윤리센터), RCT(무작위임상실험), SCI(과학기술논문 인용색인) 같은 아리송한 영어단어를, 또는 투고, 게재, 수정 후 게재, 게재 불가(줄여서 게불) 같은 낯선 한국어 단어를 환자보다 훨씬 더 자주 만났다. 나와 인승은 다섯 명 정도의 ‘라이언’을 더 구했고 누룽지를 박박 긁는 심정으로 컴퓨터 하드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논문화되지 않은 데이터들을 긁어서 논문으로 완성 시켰다.
늦가을의 어느 날이었고 그해 전문의 시험을 보는 전공의 세 명의 논문을 모두 투고한 날이었다. 인승과 나는 병원 앞 치킨집에서 맥주를 마셨다. 인승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신의 할 일을 잘 찾아냈고 아는 것도 많았고 가르치는데 소질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전공의들도 잘 따랐다. 심지어 나조차도 크고 작은 문제(예를 들면, 파워포인트와 엑셀을 다루고 강의자료를 찾는 것)에 대해서 인승의 도움을 받았다.
“이제 ‘라이언 일병 구하기’ 1부가 끝난 건가. 아니지, 우리는 아홉 명을 구해야 되니까 라이언 분대 구하기?” 인승이 치킨 한 조각을 집어 먹으며 말했다.
중학교 2학년이었을 때, 부모님을 졸라서 클래식 기타를 배우게 됐다. 교회에서 포크기타를 치는 대학생 형들이 멋있어 보였다. 부모님은 ‘딴따라’는 안 된다면서 완고했고 나는 이미 어린 시절에 피아노를 배우다가 그만둔 불리한 전적이 있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어머니는 며칠 후 나를 포크가 아닌 클래식 기타 학원에(실은 가정집이었지만) 데리고 갔다. 그 후로 나는 사 년 동안 클래식 기타를 쳤고 사춘기 시절 내내 커다란 위안이 됐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부모님은 둘째인 내가 형과 동생 사이에서 치이는 것 같았고, 그래서 자꾸 학교에서 담임 선생님에게 대든다(중2병이었다)고 생각하셨다. 아마도 내가 원하는 걸 하나 정도는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카르캇시, 타레가, 소르의 악보를 펼치고, 존 윌리엄스, 크리스토퍼 파크닝, 엠마누엘 바루에코의 연주를 들었다. 그러다 보면 질풍노도 분노도, 형에 대한 콤플렉스도 사라졌다.
어떤 때는 클래식 기타 전공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진지한 생각은 아니었고 ‘그냥’, ‘괜히’, ‘심심풀이’로 해보는 그런 수준의 생각이었다. 어머니한테 농담 삼아 얘기했더니 요즘 말로 예능을 다큐로 받으며 정색을 했다. 넌 박자를 못 맞추잖니, 그리고 그거 졸업하면 다음엔 뭐할 거니, 와 같은 신경질적이고 날이 선 질문들을 받았다.
클래식 기타를 연습하는 동안 나는 4분의 3박자와 8분의 6박자는 무슨 차이인지(약분하면 똑같은데), 모데라토와 알레그로는 대체 얼마나 차이가 나는 빠르기인지, 어두운 장조와 밝은 단조는 무슨 차이가 있는지도 궁금했다. 하지만 나는 결국 아무런 답을 얻지 못한 채 아마추어 연주자 수준에서 끝났다.
“진짜 시간이 후딱 가네.” 인승이 기름이 묻은 손가락을 종이 냅킨으로 닦았다.
“그러게. 내년 되면 너도 떠나고 누구랑 논문 쓰지?”
“약해빠진 소리 하지 마. 형에겐 아직 네 명의 라이언이 남아있어.” 인승이 과장이 많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논문을 쓰는 것도 클래식 기타를 배울 때와 비슷했다. 논문을 쓰다 보면 인승과 전공의 사이에서 치이면서(내가 느끼기에 그랬다는 거다) 느꼈던 쓸모없고 무기력한 기분도, 막연한 콤플렉스도 조금씩 진정됐다.
“형, 내년에 논문 쓰기 같은 걸 전공의 대상으로 강의해 보면 어때?” 인승이 좋은 생각이라는 듯 탁자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좋은 생각이긴 한데, 클래식 기타를 칠 때처럼 결핍 같은 게 의문부호처럼 남았다. 대체 내가 글쓰기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뭐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