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두 권의 책
강의 노트
작가들은 사후 70년까지 저작권이 유지된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바흐의 샤콘느를 세고비아가 편곡해서 녹음하면 바흐의 샤콘느가 아닌 세고비아의 연주에 대한 저작권만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자 미상인 <금지된 장난>의 삽입곡 로망스는 어떨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작자 미상의 곡이기 때문에 음반이 아닌 곡에 대한 저작료는 발생하지 않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로망스에 대한 저작권는 예페스에게 있다.
예페스(1927-97)와 그의 자손들은 예페스가 일곱 살 생일날 어머니를 위해서 이 곡을 작곡했다고 공식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생일날 어머니한테 연주했고 이후에 다른 이들이 발렌시아 지역에 (알 수 없는 방식으로) 퍼뜨렸고 점점 여러 다양한 연주자들에 의해서 연주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 예페스가 작곡한 걸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이미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1897년과 1901년 사이에) 녹음됐다는 기록이 있고, 1913년에 악보가 출판됐기 때문이다. 표지에 'Sort-Estudio'라고 적혀 있었던 걸로 봐서는 소르(Sor)의 작품일 가능성이 가장 많다는 것이 중론이다. 단조-장조-단조로 연주되는 곡의 진행이 19세기 유행하던 살롱 뮤직의 방식이라는 것도 '소르설'에 힘을 실어준다. 그렇다면 일곱 살의 예페스는 왜 자신이 로망스를 작곡했다고 믿게 된 걸까.
병원을 옮기고 문학과 의학 수업을 맡게 됐다. 일주일에 한 번씩 8주간 여덟 번의 수업으로 끝나는 1학점짜리 교양과목에 불과했지만 나는 의욕에 불타고 있었다. 의학과 관련된 문학 작품을 읽고 서평을 쓰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읽을 책을 정하고 자료를 복사하고 강의노트를 미리 작성했다. 강의 노트를 쓰는 것을 미리 쓸 수는 없었는데 그건 전날 토론했던 내용과 학생들이 제출한 서평을 참고해서 작성해야 했기 때문이다. 가장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었다. 외상센터에서 새로운 환자를 보고 수술을 배우는 것도 벅찬 일이었는데, 강의 준비까지 하려니 시간이 빠듯했다.
지도교수로부터 부탁을 받았다. 의과대학 학생이 선택 실습을 국문학과로 신청했다는 것이다. 지도교수는 웬만한 부탁은 들어주는 편이었지만 의과대학생 한 명을 위해서 삼 개월 프로그램을 짤 정도의 시간적인 여유는 없었다. 나를 만나서 얘길 해보고 내 수업을 듣는 쪽으로 설명을 했다고 했다.
병원 내 커피전문점에서 학생을 만났다.
“국문학 수업은 왜 들으려고?” 내가 물었다.
나 자신에게 물어봐야 하는 질문 아닌가.
“너무 하고 싶은 건 해봐야 할 것 같아서요. 국문학과에서 뭘 배우는 지 진짜 궁금했거든요.”
내가 고개를 형식적으로 끄덕였다.
“선생님은 뭐 때문에?”
내가 불의의 일격을 당한 사람처럼 움찔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고, 실험하고 숫자랑 표를 정리해서 논문 쓰는 건 나랑 안 맞는 것 같아서. 그냥 그 당시에는 문학에 끌리더라구. 이유는 잘 몰라. 차츰 생각나겠지.”
학생은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얼음이 든 플라스틱 컵을 만지작 거렸다.
“최근에 잠수에 관한 책을 읽었는데, 심해 어류들은 빛이 없는 곳에서도 동서남북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대요.”
“사람한테도 그런 능력이 있으면 티맵 같은 거 없어도 될텐데.”
내가 웃으며 말했다.
“있어요. 호주의 원주민 부족은 절대 방향감을 가지고 있어서 컵을 오른쪽이 아닌 서쪽으로 옮겨 주세요, 라고 얘기한대요.”
학생이 자신의 컵을 오른쪽으로 살짝 옮겼다.
“신기하네.”
“마음 속에서 어떤 걸 너무 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면, 그게 바로 방향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도 이유 같은 걸 따지지 않으려구요. 선생님처럼요.” 학생이 말했다.
내가?, 라는 표정을 나도 모르게 지었다.
“특별한 이유 없이 그냥 그 순간에 끌려서 오신 거라면서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