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
예심이 끝난 후에도 생활에 큰 변화는 없었다. 주기적으로 응급실 당직을 섰고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았고 논문을 썼다.
“이청준의 소설 속에서 질병에 걸린 주인공들은 현실 세계 속에서 패배하지만 작가는 이들이 쓰러지지 않고 패배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것을 꿈꾸고 있다.”
논문의 결론이었다. 예심을 통과한 후 6개월 정도 걸려서 논문을 완성했다. 몇 가지 절차가 남아있지만 가장 중요한 일을 끝낸 것이다.
논문을 완성하는 동안 두 사람이 죽었다. 작가 이청준이 2008년 7월 31일에 사망했다. 대학원에서는 작품론을 쓰게 되면 작가에게 논문을 보내는 전통이 있다. 하지만 작가론의 경우에는 작가가 사망한 후에 쓰는 경우가 많아서 그럴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비록 내 논문은 작가가 살아 있을 때 시작됐지만 결국 여느 작가론 논문들과 마찬가지로 작가에게 논문을 보내는 영광을 누릴 수 없게 됐다.
그해 가을이 끝나던 무렵 오광태 아버지의 부음을 들었다. 급성 심근경색이었다. 부산의 빈소에는 오광태 홀로 있었다. 다른 가족들은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를 포함해서. 당직을 바꿀 수가 없어서 거의 눈도장만 찍고 부랴부랴 서울로 올라왔다. 기차를 타고 올라오는 동안 마음 한구석이 답답했다. 광태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었지만 도저히 장례식장에서는 할 수 없었다.
삼 주 전 외상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선배로부터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거절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대답이 그렇게 쉽게 나오지 않았다. 생각해 보고 다시 연락하겠다고 한 것이다. 마치 이 질문을, 아니 이 순간을 오래전부터 기다려 온 사람처럼.
일주일 후에 나는 선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병원을 옮기기로 한 것이다.
장례식이 끝나고 열흘 정도가 지난 후에 낮 근무를 마치고 광태와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다.
“먼 길인데 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광태가 말했다.
광태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머님이 안 보이시던데?”
왜 갑자기 이 질문이 떠올랐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광태가 자신의 잔의 술을 원샷하고 나서 다시 새로 채웠다.
“본과 1학년일 때 출가하셨어요.”
광태의 어머니는 출가해서 비구니가 됐다. 출가한 후에는 거의 연락을 하지 않고 지냈다고 했다. 광태에게는 여동생이 한 명 있었는데 당시에 몸이 안 좋아서 상주를 할 수 없는 상태라고 했다. 어머니는 떠나고 아버지를 잃은 광태에게 내가 병원을 떠난다는 얘기를 어떻게 해야 할까. 대화가 길어질수록 얘기를 꺼낼 타이밍을 잡기가 더 어려워졌다. 우리 둘은 약속이나 한 듯이 말없이 동시에 잔을 비웠다.
“다음 달에 다른 병원으로 옮기기로 했다. 미안하다.”
광태가 고개를 푹 숙인 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조용하게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옆 좌석에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던 할머니가 우리 쪽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광태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서럽게 훌쩍거리는 소리가 더 커졌다.
“젊은이들, 그렇게 마시다가 죽어. 그만 마시고 어여 집에 가.”
할머니는 식사를 다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주를 어르듯이 울고 있는 광태의 등을 쓰다듬었다.
“괜찮습니다. 고맙습니다. 건강하세요.”
광태가 고개를 숙인 채 누구한테 하는 건지 알 수 없게 중얼거렸다. 광태는 한동안 계속 훌쩍거렸다. 불판에 올려놓은 김치찌개가 식어가는 동안 훌쩍거림은 잦아들었고 광태는 식은 찌개를 말없이 몇 번 떠먹었다.
“괜찮습니다. 고마웠습니다. 건강하세요.”
식당을 나와서 광태가 절을 꾸벅했다. 말을 마치고 나서 천천히 병원 쪽으로 걸어갔다. 옷 파는 트럭과 가판들은 모두 사라졌고 전설의 포장마차에서만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계속)